(!)주의(!)스포일러 대잔치(!)
주인을 알 수 없는 어항이, 그 안에 산호초가, 그리고 또 아이가 식물원의 ‘온실’에 나타납니다.
식물원 근처에 살고 식물원에서 일하는 ‘나’는 꽃을 좋아합니다. 식물원 근처에 살고 식물원에서 일하며 꽃을 돌보는 사람이 꽃을 좋아하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식물원에 어항과 산호초는 조금 이상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좋아하는 ‘나’에게 꽃을 닮은 산호초는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항을, 산호초를, 그 아이를 식물원에 계속 두기로 합니다.
아이는 신비하고 사랑스럽고 무방비합니다. ‘나’는 그런 아이가 다칠까봐 아이를 숨기고, 더 숨기고, 더 감추고, 두려움을 가르칩니다. 아이를 위해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해버립니다.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아이를 숨기고 감추었어도 시간으로부터는 숨을 수 없습니다. 아이의 변화에 초조해진 ‘나’는 아이에게 이내 거짓말까지 하게 됩니다. 세상은 위험하다고, 모두가 너를 속이고 거짓으로 기만할 것이라고 가르쳤던 그 입으로 자신이 직접 거짓말을 하며 아이의 외모를 비난하고 겁을 주고 마치 백신 접종을 하듯 아이의 마음에 미리 상처를 냅니다.
결국 아이는 ‘유리’ 혹은 ‘벽’을 깨부수고 온실을, 식물원을 벗어납니다. ‘나’는 어떻게든 아이를 안으로 다시 들여보내려 하지만 아이는 저항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예뻐해주고 사랑해준 사람과 같이 있겠다고 하며 기어코 ‘나’를 떠나갑니다.
마지막을 향하는 이 시점에서 ‘나’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니.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어디서 많이 보고 들었던 대사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이 이야기는, 낳거나 기른 아이를 향한 양육인의 뒤틀린 애정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요?
일차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님의 실제 의도 또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저 그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단정짓기엔, 이야기 초반에서부터 묘사된 아이의 감정과 특징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역시,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펼쳐진, 작가님이 직접 달아놓으신 태그들까지 본 뒤에는 90%까지 확신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작품에 대한 저의 해석에 혹시라도 작가님의 의도를 곡해했거나 과대해석한 부분이 있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리뷰를 삭제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사건의 순서에서 어느 부분을 뚝 잘라다 놓은 느낌입니다. 굳이 왜 이 부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을까요. 아마도 작가님은 이야기를 읽게 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평생 그리워도 좋을 것 같은 이것은 무엇이냐고 아이는 묻습니다. 그립다는 것은 좋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슬플 때가 많죠. 그러니까 아이의 질문을 이해해보자면, 슬프고 힘들고 괴로워도 좋으니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이 감정은 무엇이냐, 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나’는 모르는 게 좋다고, 해로울 거라고 말하고 그것이 쓸데 없는 생각이라 말합니다.
아이가 묻고 있는 그 감정은 아마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묻는 아이보다 주인공의 대답이 조금 더 교묘합니다.
아마 ‘네겐’ 해로울거야.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슬픔과 고통과 그리움 같은 것을 동반한다는 이유로 모르는 것이 좋을 거라 말한거라면, 왜 굳이 ‘너에겐’ 해로울 거라고 뜸을 들이며 말했을까요.
갑작스럽게 잘려나온 듯한 장면이 막을 내리고 이야기의 서곡이 끝납니다. 그리고 본론을 읽으면 읽을수록, 왜 그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주인공과 산호초 아이가 처음 만나던 순간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진행됩니다. 아이는 어항속에 담긴 산호초의 모습으로 ‘식물원’에 나타납니다.
더 고민할 필요 없이 명료한 부분입니다. 수족관에나 있어야 할 어항이, 바다에나 있어야 할 산호초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마치 동성애가 강요되는 세상에 태어나버린 이성애자처럼, 이성애가 강요되는 세상에 태어나버린 동성애자처럼, 날개가 있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태어나버린 날개 없는 인간처럼 말이죠.
그러나 아이는 자신과 다른 것들 투성이인 세상에 대해 당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긴 다들 뿌리가 있구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에 주눅들지 않고 그저 그들이 그렇다는 것을 투명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름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그렇게나 순수합니다.
주인공은 처음 보는 형태의 아이의 생식기에 놀랍니다. 그것은 절대 평범하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정상’이 아닌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생식기라는 것은, 가장 직설적으로 누군가의 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세상의 시선에 평범하지 않은, 어쩌면 ‘정상’이 아닌, 그러나 그대로 아름다울 뿐인 정체성을 타고났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아이에게 꽃에 대해 가르치는데 여기서도 그 메세지가 암시됩니다. 암술과 수술, 또 어떤 것도 없는 무성화. 여기서도 아이는 “꽃은 그렇구나”라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왜 꽃은 나와 같은 생식기가 없느냐고, 나는 왜 꽃과 다른 생식기를 가졌느냐고 묻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쯤되면 이제 주인공이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산호초로 된 생식기를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죠. 세상과 다른, 평범하거나 정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 정체성을 숨기라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야기의 시작점에서 주인공이 아이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말라고, ‘너’에게는 그것이 해로울 것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제가 결정적인 추측을 가지고 이야기를 읽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주인공이, 그러니까 화자와 아이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습니다.
화자가 어떤 모양의 생식기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아이의 산호초 생식기가 의미하는 그것, 그 ‘정체성’이 화자에게도 있었고 어쩌면 산호초 아이는 화자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존재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화자는 자신과 다른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에 억압당하고 고통과 상처를 받으며 살았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 자신이 기억할 어떤 상처도 아직 없던, 순수할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으며 사는 꿈을 간절히 소원한 나머지 환상이 아닌 환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화자는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듯 합니다. 그저 아직도 자신이 배운 두려움과 받아온 상처들을 기준으로 세상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이제는 자신이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가두고 숨기고 감춥니다.
화자가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만난 대목에서 이 두려움은 다시 현실이 됩니다. 산호초를 키우면 어떻겠냐는 화자의 짧은 질문에 그들은 크게 비웃고 무시합니다.
산호초는 독이 있다더라. 모양이 이유없이 징그럽다.
우리가 사회에서 많이 듣고 자란 이야기들입니다. 에이즈가 어떻다더라, 전염이 어떻다더라, 나는 그거 그냥 이유 없이 싫더라, 내 주변에서는 한 번도 못 봤다. 그런 말들이요. 화자는 반박하지도 못하고 분을 참습니다. 아마 우리 주변에도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화자가 돌아와서 백과사전을 찾았을 때, 작가님이 강조 표시를 해두신 단어들 중 ‘다세포 동물’ 이라는 단어와 ‘공생’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마음에 박혔습니다. 또한 산호초에 얼마나 많은 종의 생물이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규모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히 추측하건대 작가님이 얼마나 고심하고 고심하여 ‘산호초’라는 상징물을 선택하셨을까 생각이 들어서 조금 숙연해졌습니다.
결국 다시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온 화자는 아이에게 더 심한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아이를 더욱 철저하게 숨기고,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것에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지 알려주면서 겁을 주고, 아이의 생식기, 남들과 다른 그 정체성이 얼마나 역겹고 괴상한 일인지 본인이 도리어 주절주절 폭언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평생 두려워했던 것들이고 그래서 아이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리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아이에게 상처를 내고 있습니다. 비뚤어진 애정과 신념으로 학대인 줄도 모르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양육자들의 모습과 많이 겹치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사랑을 찾았습니다. 화자가 평생 하지 못했던, 꿈으로만 꿀 수밖에 없었고 그 염원이 너무 강한 나머지 아마 환상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던 그 사랑을, 아이는 기어이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온실의 유리벽’을 깨버립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줄 사람. 징그럽다고 하지 않고 예쁘다 해줄 사람. 함께 있으면 어떤 것도 하나도 무섭지 않을 사람.
아이가 묘사하는 그 누군가는 화자가 가장 바라고 원했던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건 전부 공포였다.’ 화자는 자신이 감히 꿈으로나 꿀 수 밖에 없었던 깊은 비밀을 당당하게 외치는 아이, 혹은 또다른 자신의 낯설고 모르는 모습 앞에 두려워하고 울부짖습니다.
결국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광기마저 부렸던 화자 자신이 아이를 다치게 했습니다. 손목을 비틀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그 깨진 조각들을 밟고 발바닥에서 피를 흘려가면서도 자신이 찾은 사랑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이는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 그 사랑과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하고, 있는 힘껏 사랑합니다. 그리고 바다에 빠져듭니다.
바다속에서 아름답고 찬란하게 유영하는 아이와 그 사랑을 바라보며,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니고 그럼에도 자신일 아이의 행복을 관망하며 화자는 마침내 무릎을 꿇습니다. ‘환상이나 전설이 아닌, 실재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광경을 인정합니다.
자신의 또다른 과거이자 현재였고 또 미래일 수 있는 그 사랑의 모습 앞에서 화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절망을 했을까요, 아니면 위로를 받았을까요. 앞으로 화자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산호초가 아니라서 바다에 살 수 없고 아직 세상 위에서 두 다리로 걸으며 살아야만 하는 화자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또다른 모습이 그랬듯 다치고 피를 흘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랑과 행복을 찾기 위해 나아갈까요? 아니면 그저 그것은 지나간 환상으로 꿈으로 묻어두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까요. 바다에 뛰어들 수도 있으려나요. 산호초가 있어도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모든 것이 정상이고 자연스러우며 아름답고 공생하는 그 바다에.
저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괜찮다,라고 전해주고 싶습니다. 아이처럼 용기를 내고 세상과 맞서 싸워도 괜찮고, 그렇지 않아 용기를 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천의 생명을 품을 수 있고 그 존재의 가치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대로도 아름답고 귀한 산호초에게 독을 품었다, 징그럽다, 이유 없이 싫다라고 함부로 손가락질 하는 그들이 나쁜 것이고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 당신은 잘못이 없다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용기를 내어도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당신이 아이에게, 아마도 당신 자신에게 말했듯, 그대로도 그저 아름답다고요.
매일같이 자신에 대해 못생겼다, 뚱뚱하다, 쓸모 없다, 징그럽다 따위의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누군가 말합니다. 어린 시절의 네가 눈 앞에 앉아있다고 상상해보라고, 그리고 네가 네 자신에게 했던 그 말들을 그대로 그 어린 아이에게 해보라고.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스치듯 보았던 드라마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장면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상징성이 강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이야기도 읽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모두 ‘사랑’이었고 산호초 아이의 ‘다름’이 생식기에 조명되었기에 그것을 특정한 주제로 인지했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상징주의의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죠. 표면에 드러난 그대로 일반적이지 않은 ‘외형’을 가진 존재에 대해 그 다름에 대해 위로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사람들이 무지하여 두려워하는 특수한 질병에 대한 위로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것도 아니면 또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겠고요.
우리는 꽃일까요. 암술과 수술이 모두 있는 꽃일까요. 암술이 있는 꽃일까요. 수술이 있는 꽃일까요. 아니면 그 무엇도 없는 꽃일까요. 그 무엇도 없는 그것은 꽃이 아닐까요. 무엇도 아닌 다른 것이 있는 꽃은 꽃이 아닐까요. 나는 내가 꽃인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꽃입니까.
사실 다른 사람의 작품에 대한 리뷰를 쓰거나 하는 것이 처음이라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님께 누가 되지나 않았으면 합니다. 결론은, 이것은 무척 소중하고 귀한 이야기입니다. 잘 썼다 못 썼다, 좋다 나쁘다의 구분이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이렇게 고심하고 정성 가득한 위로를 창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깊은 위로가 더 많이 전해지길 바라며, 리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