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너여야만 하는 세계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 (작가: 리체르카, 작품정보)
리뷰어: Ello, 18년 2월, 조회 240

0.

 

얼굴은 보는 것

 

거울은 다만 빛이 부족한 것

따뜻함은 이미 넘치고 넘치는 것

 

뒤돌아가면 왔던 길이 남아 있다

다시 되돌아가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새가 새를

나무가 나무를

구름이 구름을 불러 모으듯

 

어떤 믿음이 너와 나를 구별되게 했다

 

믿고 싶어서 믿기 시작하다 보면

믿지 않아도 믿게 되는 순간이 온다고

 

나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

네가 너를 속이고 있듯이

 

그러니까 오늘 밤은 멀리멀리로 가자

아름다움 앞에서는 죽어도 상관없는 얼굴로

축제의 깃발을 흔드는 기분으로

 

우리는 아주 작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

 

얼굴과 얼굴로 오래오래 가만히 마주 보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과 사람의 일이었다고

 

그러니까

얼굴은 마주 보는 것

마음은 서로 나누는 것

 

사람은 우는 것 사랑은 하는 것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을 얻는 대신

그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1.

아무래도 디트마일과의 마지막이 머릿속에 크게 남아버린 모양입니다. 시를 대여섯 편 찾아놨는데 거의 비슷비슷하네요. 그리고 놀랍게도 모두 사랑에 관한 시였어요.

음. 글쎄요. 이건 사랑보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요. 장르야 뭐 어때요. 네가 나를 구원해줄거란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현시키는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였어요.

붓질하기를 멈추고 가만히 사라질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일, 내가 할 수 있어서 그렇게 한 일, 그래주길 바랐던 일이지만 차마 마무리를 할 수가 없어 주저리 입으로만 떠드는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이야.

 

2.

디트마일과는 믿음이 수반된 우정이었기 때문에 결국 디트마일과의 끝까지 함께하는 마지막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며 감사해했던 칼스텐, 강압적인 사랑을 강요했던 마녀, 자기애만 가득했던 사제, 질투에 눈이 멀었던 알젠토와의 관계는 우정과는 다르게 한 쪽의 일방적인 감정이었으니까요.

저는 중간중간 숨막히고 비밀스러운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겠는 그런 조마조마한 마음을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첫번째 읽을 때는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몰라요. 응원 댓글 단 걸 보면 아시겠지만 한 번에 쭉 읽지 못하고 숨참고 한 편 읽고, 걱정하며 다음 편 읽느라 속도가 더뎠어요.

하지만 한 번 끝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모든 비밀과 안 팎의 수근거림을 다 아는 디트마일이 된 기분이요. 휴, 그래 일정 부분은 사실이니까 떠들어라, 이젠 고쳐주기도 귀찮다. 소문이 어디까지 퍼지나 보자 싶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슐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관리 하나도 안된 정원이나 그 정원에 맨발로 다니는 여인, 꿈만 꾸면 앓아 눕는 사람들, 하수구 근처에 토막난 시체 하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제가 딱 그 기분이었으니까요.

작품 속에 음산한 분위기를 어떻게 배치하면 되는지를 잘 알고 미로 같이 배치했다고 느꼈어요. 분명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한 공간이 한 군데도 없었거든요. 읽지도 못하는 종이를 들고 하수구를 들어갔을 때부터요. 처음엔 방 안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니 마음이 편했는데,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글귀나 엘렌의 발이 보이는 것이 어떤 뜻인지 알면서부터 이 곳도 두려워졌어요.

길을 잃기 좋은 복도나 하수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이나 물감을 배우러 간 곳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 공간이었어요. 그리고 결국 마침내 탑에 올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준비해 놓은 그림도구들을 손에 쥐었을 때 결국 그 공간에서 평온을 얻었다니.

너무 먼 길이었죠.

 

3.

자꾸 도돌이표처럼 디트마일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요. 죽음을 앞둔 이와의 대화니까 울컥했을 뿐 아무래도 디트마일과의 관계가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기엔 약했던 것 같아요. 그들이 친구라고 불릴만큼 서로 의지하고 대화를 나누었던가  싶고요. 그래서 친구를 잃는 슬픔, 그가 소망했던 죽음을 힘들지만 이루어주는 그런 강렬함이 조금 약하지 않았나 싶었어요.

슐러의 말이

“저야말로 항상 나쁜 일 없게 같이 다녀줘서 고맙네요. 어르신 명 때문이었다지만, 나중에는 불편한 느낌 같은 것도 별로 없었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같이 다닌 거잖아요. 그쵸? 그러니까 그런 사이를 친구라고 하는 거고요. 그래서 더 미웠어요. 어차피 헤어지게 될 걸 알면서. 마음의 준비 할 시간 하나 안 주고.”

라고 했고, 저는 이 부분이 살짝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좀 더 서로에게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될만한 일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4.

작가님의 작품을 정주행 했었어요. 평범한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누구든 특별해 질 수 있고, 나라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 특별함은 세계를 구하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알 법한 특별함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나는 너에게만은 특별해질 수 있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만 하는 세상, 관계. 그래서 모든 사람이 소중해 지는 그런 세계를 그려주기 때문에 장르가 호러여도, 미스테리여도 끝까지 볼 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슐러여야만 했던 세계, 평범한 사람이여도 노력으로 특별해지는 세계를 그려주셔서요.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