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에는 [묵호의 꽃] 결말 내용노출이 있습니다. 되도록 리뷰 대상인 [묵호의 꽃]을 감상 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새벽에 [묵호의 꽃]을 다 읽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이전에 [묵호의 꽃] 리뷰를 쓴 적이 있기에 또 리뷰를 써도 되나 싶긴 합니다만 그때는 완결작을 읽은 상태가 아니었고 이번에는 완결까지 다 봤다는 점이 다르니 써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서없이 생각한 점을 죽 적어나가려 해요.
1.
[묵호의 꽃] 주요 캐릭터는 총 다섯 명으로 각기 특색이 있습니다.
‘듣는 자’ 이솔 – 이솔은 인간 아닌 생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모친은 사망했고 부친과 함께 사는 이솔은 이 능력 덕에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기도 하고 남에게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 고유한 초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덕에 이솔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요. 또 이 능력 덕에 착하지만 오지랖 부리는 민폐형 캐릭터란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보는 자’ 현 – 주인공 이솔의 이웃입니다. 과거 왕족이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현재 이솔이 사는 작은 마을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는데 이솔과는 오빠 동생처럼 어릴때부터 가까운 사이였고요. 현은 ‘관망자’ 혹은 ‘관찰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사건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아요.
‘읽는 자’ 시백 – 시백에게는 이솔보다 더 대단한 초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동물을 부릴 줄 알고 최면도 걸 수 있는 듯 하고요. 그는 듣고 보는데 이솔이나 현보다 더 뛰어난 듯 하고 모종의 진실을 알고 있는 듯 하며 숨겨진 음모를 읽고 있는 듯 합니다. 어쩌면 그가 음모의 판을 짜는 주체일 수도 있겠고요.
다른 둘은 세도가 양반가의 외동들인 민현과 시호 입니다. 둘은 약혼한 사이이나 혼례는 아직 올리지 않았고 사이가 가깝지도 않습니다. 몇년전 사망한 여동생의 일로 반 폐인이 된 민훈은 밤마다 저승사자가 되어 자신이 모르는 진실에 접근하려 합니다. 그러다 이솔과 엮이지요.
2.
[묵호의 꽃]이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로맨스의 향방은 일찌감치 정해졌기에 사랑의 방해물인 갈등은 이솔과 민훈의 계급차에 있다고 봤고요.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가상의 조선 시대입니다. 때문에 계급차로 오는 갈등이 현대 소설보다는 더 커지지요. 주인공 이솔은 그냥 동물과 말이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격이 굉장히 밝고 화사합니다. 또 동물들과의 대화 때문에 동화 주인공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시대 배경이 조선인걸요. 지금처럼 도시화된 사회가 아닙니다. 때문에 저는 또 하나의 드러나지 않는 갈등을, ‘이솔’의 이런 특성이라고 봤습니다. 로맨스의 방해요소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고요. 이솔의 능력이 드러날 수록 [묵호의 꽃]에 담긴 동화적/환상적인 분위기는 더 강해집니다. 이는 이솔에 대한 저의 호감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더불어 의문도 갖게 합니다.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특히 동물과 말을 하는 동화주인공 같은 스무살 조선 시대 여자인 이솔이 과연 남자주인공과 섹스할 수 있는가? 소설에서 잠자리가 묘사되고 안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종종 상상이 되는가. 연인 사이의 케미가 느껴지는가. 등장인물들이 가진 ‘사랑’이란 감정 자체에 동력이 있는가.
게다가 주요 남자 캐릭터인 민훈은 여동생의 사망을 겪어 이솔을 보는 눈이 연인을 보는건지 또 다른 동생으로 보는건지 의심스럽고, 현 역시 이솔과는 오빠동생 사이로 성장한 사람이라 현의 감정이 가족애인지 남녀간의 사랑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로맨스 소설 장르팬 관점에서 [묵호의 꽃]이 가진 설정상의 걸림돌일 거라고 봤고, 그 점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3.
후반부로 갈수록 이솔이 지닌 고유한 능력은 거의 발휘되지 않습니다. 이솔은 광에 갇히거나 납치되지요. 남주에게 구해지는 여주가 되기 위해서요. 민훈은 여주를 구해주는 남주가 되기 위해서 이솔을 구하고 보호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달립니다. 현은 서브남주가 되기 위해서 함께 행동했다가 민훈을 치료했다가 방관자에서 벗어나려 움직입니다. [묵호의 꽃] 삼각관계의 세 축이자 세 주인공은 갈수록 이솔이니까, 민훈이니까, 현이니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여주이고 남주이고 서브남주니까 행동합니다. 때문에 셋의 구멍을 채우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캐릭터는 시백 그리고 특히 시호가 됩니다. 더불어 남주 버프를 그리 받는데도 민훈은 끝까지 로설의 매력적인 남주가 되지 못합니다. 가장 기대에 못 미치는 캐릭터는 이솔이었고요. 아마 제가 가진 이솔에 대한 감정은 배신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럴 거면 여주한테 능력은 왜 있는 건가 싶기도 했어요.
4.
급해요.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급해지고 ‘씬’ 위주의 흐름이라 느꼈습니다. 사건 위주과 아니라 씬이요. 캐릭터들을 빨리 한 장소에 몰아 넣으려 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단 느낌도 받았습니다. 대화문이 가진 생생함은 여전하지만 대화문 외의 문장들은 점점 단정적으로 변해간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이런거야, 얘넨 그래서 이러는거야, 곧 완결이니 그 전에 빨리 이해하렴 – 이런 느낌이요. 저는 이솔, 민훈, 현이 왜 저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더 알고 싶은데 말이지요. 재촉한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캐릭터들과 같이 소설의 결말을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빨리 알아서 이해하라고 재촉하는 느낌이요.
5.
적다 보니 싫은 소리만 잔뜩 늘어놓은 리뷰가 되어버렸네요. 아마 이 리뷰만 보면 [묵호의 꽃]이 별로라는 건가? 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될 정도로요. 그렇지는 않고요. 제가 이전에 쓴 리뷰를 보면 어떤 장점을 가진 소설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결국은 제가 이 작품에 대해 기존에 품고 있던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이렇게 볼멘 소리를 하는 리뷰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대란 것을 누가 강요한 것도 제 마음대로 품은 것이지만요. 더불어 갈등을 해요. 고유의 장점이 많았고 또 장편 완결이라는 큰 산을 넘은 작품에 이런 리뷰를 덧붙인다는 게 나쁜 행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를 쓰고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