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요즘들어 늘어나기 시작하는, 미러링 기법을 사용한 평범한 폐미니즘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절반만 맞는 추측이었군요. 솔직히 과장된 건 맞습니다. 가정마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연예에 대한 가치관도 다르죠. 게다가 요즘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1인 가구를 선택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강요가 군대의 의무와 동의어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하겠죠. 불완전하지만 선택권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저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일부가 생각났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얌보는 어린 시절을 파시스트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보냈습니다. 교실에서는 전쟁을 가르치고, 국가를 위해 생명을 불태우라고 가르쳤죠. 거리는 더러운 미국과 영국을 욕하는 노래들로 가득 찼습니다. 국민들은 희생을 강요받았습니다. 생명은 국가의 발전에 비하면 티끌만한 가치로 치부되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무솔리니를 위해 죽어갔죠.
아시다시피 한국의 근현대사는 정말로 특이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수천년동안 쌓아온 전통문화는 순식간에 날아갔고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언제나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견딜 수 없었죠. 물론 반공교육과 독재정권의 영향도 있었으나, 한국인들은 강력한 애국심으로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네. 그게 발전의 시작이었고,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대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공포에 맞선 단합체는 조금씩 흩어지고, 국가에 대한 인식은 주인에서 자신이 사는 집으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윗동네는 여전히 개판이었으며, imf가 찾아왔습니다. 쌓아온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들은 공포에 빠졌을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까지도 국가주의에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회지도층들은 그 책임을 과잉투자를 시도했던 기업들에게는 조금도 돌리지 않고, 국민들의 개인적인 과소비를 문제 삼았습니다. 당연스럽게도, 국민들은 스스로의 책임을 강조하며 더욱 국가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했답니다. 오오. 대단해. 너무 대단해서 이민가고 싶어져. 막 빛이 눈부셔서 도망가고 싶어지네.
이 기묘한 빛을 가장 앞에서 전통으로 쐬면서 눈을 찡그리던 사람들은 군인 장병들이었습니다. 그 점은 정말로 부인할 수 없죠. 그러나 선진국이 되고, 저출산 시대가 열리면서 그 빛은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야할 젊은 여성들에게까지 향합니다. 국가주의에 뒤틀린 유교 근본주의는 그것을 더 부추기고요.
아 이제 둘 다 아프군요. 그럼 원인은 무엇일까요? 대체 무엇이 문제여서 고통받을까요? 그래, 부모님 세대의 고통이야 발전의 희생양이라고 쳐요. 근데 지금은? 이미 한국은 이탈리아 못지 않은 선진국인데?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원인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괴물집은 너무 거대해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 그러면 뭘 해야 할까요? 그렇군요. 저기 정수기를 업고 가느라 자신을 흘겨보는 남성도 집의 구성원이잖아요? 돈이라는 유모차없이 아이를 엎고 가느라 주변에 욕을 하는 젊은 여성도 집의 구성원이잖아요? 저걸 엎읍시다. 그럼 바뀌겠지 뭐. 아마 바뀌겠지 뭐. 아니라고? 네가 몰라서 그래. 공부 하던가.
요즘 들어 미투 광풍이 불고 있으나, 저는 낙관할 수 없습니다. sns의 바람은 매우 충동적이기 때문에 애꿎은 사람을 거꾸러뜨릴 수 있거든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상향을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세상.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인생. 그러나 거인에 의해 좌절된다면, 그 작은 공들은 도대체 어디로 쏘아질지 무섭습니다. 지금 쓴 이 글도 과장이길 빌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