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과 청년 사이에서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의 청춘개론 (작가: dcdcssss, 작품정보)
리뷰어: 한정우기, 18년 2월, 조회 45

* 저는 개인적으로 텍스트를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주는 평론을 선호합니다. 그 관점이 텍스트의 내용 전반을 관통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아주 일부분에만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저렇게도 볼 수 있구나 라고 편하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 년 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큰 인기를 얻었었죠. 저도 직접 구매해서 읽었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름 감동도 받았었죠. 하지만 불편한 책이기도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서울대 교수가 서울대 제자에게 조언할 만 한 말들이었거든요. 일반 대중에게는, 글쎄요, 소위 ‘청춘’에 해당되던 88만원 세대에게 이 글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힘들고 막막한 지금 이 순간(청춘)만 견디면 곧 나아질 거라는 이런 근거 없는 장밋빛 미래가 N포 세대에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책을 두고 ‘꼰대’의 시각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는 이유도 바로 이점 때문이겠죠. 김난도 교수의 전공이 ‘법학’과 ‘행정학과’라는 점도 주목해볼만한 사실일 겁니다. 굳이 ‘좌’와 ‘우’로 나누자면 ‘좌’로 분류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분야니까요.

 

기성세대라고 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다 긍정하는 건 아닙니다. 한 번은 학교 교수님이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제목부터 글러먹었다고 비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청춘’이라는 말 자체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셨죠. ‘청춘(青春)’의 춘은 ‘봄 춘’입니다. 어휘 자체가 낭만적이면서도 계절의 의미를 지니지요. 계절은 항상 순환합니다. 필요한 건 오직 시간 뿐이지요. 그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은 자연과 다르다는 점이지요. ‘청춘’이 겪고 있는 고통은 일종의 성장통이고 곧 지나갈 것이라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프레임은 곧 사회 기득권층이 될 서울대생이면 모를까(물론 이것도 옛날이야기지요. 학벌로 계급을 올릴 수 있는 시대가 끝났다는 홍지의 말은 사실입니다. 서울대 졸업증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아니니까요.) 대다수의 젊은이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니까요.

 

우리의 고난이, 우리 사회의 문제가 정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나요? ‘보이지 않는 손’과 ‘낙수효과’가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던가요. 일개 고등학생인 홍지도 그 문제점을 간파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본의 장악으로 인해 노동의 가치가 떨어졌다고요. 우리가 지닌 문제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어른들은 구조를 고칠 용기가 없기에 아이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노력을 강요하죠. 자기는 두꺼운 등산 점퍼를 입고서는 학생들에게는 뜨거운 청춘의 혈기로 버티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노오오오오오력을 하라는 말이죠.

 

홍지와 오손의 담임인 아닥은 청춘과 추억을 임용시험에 꼴아 박은 젊은 교사입니다. 오손의 말을 빌어서 보자면 아닥은 386네 꼬봉들이죠. 386세대는 대학만 잘 나왔으면 쉽게 사회에 연착륙할 수 있었지만 그 뒷 세대는 아니죠.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경쟁을 뚫고 왔더니 386세대의 꼬봉이나 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어디 그뿐인가요. 학교는 지금 총체적 난국을 맞이하고 있거든요. 입시에 초점을 맞추자니 수시 위주의 입시정책이 발목을 잡고(특히 학생부 종합전형이나 논술전형은 학교에서도 어쩔 방법이 없으니까요), 입시를 버리자니 학벌사회가 버티고 있고, 기술을 가르치자니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고용주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지요. 실습 나간 학생이 목숨을 잃다니,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사회입니까? 심지어 인공지능까지 발달하면서 인간이 기계만도 못한 세상이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아닥은 거짓말을 내뱉으며 자신이 속한 세상을 지키려합니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옭매려 합니다. 터프한 스케치를 멋진 그림으로 만든다는 구실을 내세워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을 러프(Rough)함으로 규정해 깎아내리고 자기 맘에 들도록 평평하게 만듭니다. 소설 속 표현대로 조잡한 권력욕을 채우는 행위이자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자기가 속아 넘어간 꼴이지요. 오손의 덕질이 ‘열정함량미달’로 판정받은 것은 김꽃비를 향한 오손의 팬심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아닥이 원하는 형태의 ‘청춘’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자, ‘청춘’이라는 어휘를 질색하던 그 교수님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요. 이 교수님이 ‘청춘’ 대신 언급을 한 어휘는 ‘청년(青年)’이었습니다. 훨씬 더 계급적으로 접근하는 어휘죠. 참고로 이 교수님은 전형적인 386세대이고,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을 때 전라도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으며, 대학 시절 온갖 시위에 참여해 보도블럭을 뜯어 던지던 분입니다. 아, 이것 외에도 맑시즘을 방법론으로 삼은 학자이자, 루쉰 문학으로 학위를 땄다는 특징도 있네요. 한 마디로 빨갱이 기질(?)이 다분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기득권이 되어버린 386세대와는 다르게 초심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분이죠. 무릇 청년이라면 기득권에 대항할 줄 알아야한다고(굳이 예를 들자면 학교에서 등록금을 인상하면 학교에 드러누워 항의를 해야 하며, 지도교수가 쓴 논문도 비판할 줄 알아야한다 정도 겠네요.), 술에 취할 때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시던 분이었죠. 제자에게만 강요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본인도 저런 삶을 살고 있는 분이었구요.

 

저 자신도 빨갱이 기질이 다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청년’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청춘을 만끽하는 청년이 되고 싶네요. ‘청춘’은 소모하면서 버티라고 있는 게 아니라 만끽하라고 있는 거거든요. 하루가 24시간이면 16시간을 놀아도 모자라기 마련이죠!

 

홍지가 ‘청년’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닥이 창문을 열었을 때, 아픈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기지를 발휘하는 대신 아닥에게 항의를 하며 직접적으로 저항을 했겠지요. B동 2층 남자 화장실 2번 칸과 1번 칸에 ‘비인가하교자문위원실’을 세우지는 않았을 겁니다. 위법과 합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타는 유쾌한 캐릭터가 되지도 않았겠지요. 물론 누군가는 비판할 수도 있겠지요.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는다고요. 예,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홍지는 부조리에 저항하는 사람을 외면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힘이 되어주겠지요. 팬질과 덕질을 위해 야자를 빠지고 싶어 하는 오손도 결국에는 도와주었으니까요.

 

추신: 덕질은 가장 생산적이면서도 위대한 활동이죠! 저도 소싯적(?)에는 십덕후로 불리며 덕력을 자랑했는데, 지금은 쉽지 않네요ㅠ  작가님의 덕질을 응원하는 바입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