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읽기 시작한 소설 초반부터 ‘이건 남자 작가가 쓴 소설이구나’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별개 아니에요. 작가의 페르소나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남자인데, 즉 남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어서 여캐를 꽂아주는 소설들이 그래요. 남주가 편의점에 갔는데 알바생이 여자이면 헉 여자, 미지의 존재가 여자로 등장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알려주는 힌트를 줄 때도 헉 여자…마치 자신의 남주 주변에 여자가 없다는 걸 견디기 힘든 것처럼 종잇장 같은 여캐를 이야기 곳곳에 꽂아 넣습니다. 성별이 여자인 사람이 아니라 여자이기만 한 캐릭터를요. 저는 이런 소설들에 흥미를 쉽게 읽고 마저 읽지를 못해요.
별고양이 작가님의 [짝사랑 문제]는 한국의 고2 남학생의 짝사랑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애를 좋아하는데, 그 애도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의 독백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1화로 가면 첫번째 캐릭터로 여자가 나옵니다. 하지만 [짝사랑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지리멸렬함을 이렇게 피해가지요.
(…) 여튼 나는 머리 숙인 채 테이블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대뜸 고백해도 당황스럽지 않겠어요.”
테이블 반대쪽 끝에는 30대 여성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갈색으로 염색한 긴 파마머리에 검은 스웨터를 입고 계신다. 아줌마라는 말은 실례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사 느낌이랄까. 회색 뿔테 안경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검은 스웨터, 회색 뿔테 안경….혹시라도 오해할까봐 작가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사 느낌이라고까지 확실하게 설명합니다. 순간 이 소설은 다를 것 같다는 기대감을 안겨줍니다. 최소한 헛발질은 안할 것 같다는 좋은 인상을 주더군요.
소설의 시기는 고2 겨울이고 곧 고3이 되는 아이들이 남녀공학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합니다. 주인공은 몇달째 같은 반 여학생인 ‘예은’을 좋아하고 있고요. “나도 안다. 물어봐야 한다. 내 마음을 고백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왜 나는 머뭇거리는 걸까? 아니…뭔가 불편하다.” 알지만 아직 고백하지 못한 상태이고, 고3으로 올라가면 반이 바뀔지도 모르며, 뭣보다 수험생이 될테니 지금이 제일 고백하기 좋은 시기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런 짝사랑 + 십대 + 남학생 소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어떻게 언제 뭐라고 고백하나에 온 에너지를 쏟거나 혹은 차마 고백하지 못하는 ‘이 숫기없고 순수한 나’라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짝사랑 문제]는 두 가지 다 피해갑니다. 왜냐면 주인공은 계속해서 자신의 고백이 상대방에게도 좋은 것일지, 폐가 아닐지, 확신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주인공의 고민은 짝사랑 고백보다는 오히려 예은이의 빨간 노트에 적힌 윤동주의 ‘서시’를 우연히 본 행동을 사과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바뀝니다. 우연일지언정 상대방의 동의 없이 상대방의 소중한 노트 한 부분을 봤고 이는 사과해야 한다, 주인공 소년은 사랑 고백보다 사과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어요. 잘못한 행동에 대한 고백과 사과….그에게는 사과와 사랑고백 둘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얼핏 보면 결벽증이나 순수함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어떤 결기같은 게 느껴지더군요. 이 소년에게는 아주 소중한 감정이고 몇달째 좋아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인데, 그 사람과의 관계를 자기가 그 노트를 봤다는 얘기를 안 하고 시작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게 관계가 진짜 시작하든 깨지든 간에 말이죠. 어찌 보면 소설에서 인용되는 [어린 왕자]처럼 자폐적인 느낌도 잠깐 받았습니다만 그래도 좋더군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선택하겠다는데 아 그렇게 돌아갈 필요 없다거나 어려운 길로 갈 필요 없다거나 반응을 한다는 건 오만한 거잖아요.
이렇게 짝사랑 문제로 고민하는 동안 기말고사를 치루고 방학을 하고 예은이와 함께 공부를 하고 계절은 한 겨울이고 학교이고 학생인권조례 얘기를 툭 던지고…..아마 지금같은 한파에 읽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제게 더 반짝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 남학생이나 예은이나 서로 불가능한 것을 찾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어요. 둘이 뭘 찾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걸 서로에게서 찾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분위기, 어떤 가느다란 감정의 끈 같은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이어져 있는 느낌이에요.
물론 진부함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어린 왕자, 서시, 카레,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동생(그런데 보통 클리셰라면 오빠 사랑 홧팅 해주는 여동생일텐데 남동생이에요)……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는데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짝사랑 문제]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질척거리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겠고 자기연민에 빠질 수도 있겠고 어떤 것도 안 해보고 끝날 수도 있겠고 시궁창이 될 수도 있겠지요. 지금 제가 느끼는 호감이 다 깨져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든 이 두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선택할지 끝까지 보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지금이 겨울이고 절정 한파인 날씨를 떠올려봅니다. 날씨 때문에 더 이 아이들이 있는 교정이,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떠올랐던걸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 두 아이에게 결말을 맺어주시길 바랍니다. 꼭 완결하시란 얘기입니다.
덧.
까먹고 안 쓴게 생각나 허겁지겁 덧붙입니다. 선생님이 날 부르셨다/말씀해주셨다 식으로 존대말이 너무 많습니다. 주인공들이 고2라는 점을 감안하면, 왠만한 세상 사람들 묘사할 때 다 존칭을 써야할 것 같은데….이 부분은 읽기에 좀 방해가 된다고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