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미가 뭘까
한참을 생각했다
동물의 종류라기보단 이름인 듯 한데, 쉽사리 짐작가는 부분이 없었다
얼핏 보기엔 벌레 이름같기도 하고 어딘가 해괴한 부분이 있는 듯도 하여 궁금해하던 차 검은 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인 개였음이 밝혀진다
어미가 놓고서는 다른 새끼들만 데리고 떠난 모양이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아이의 눈에는 그러미가 보이질 않는다
마치 지애의 엄마가 지애를 볼 때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글의 시작에서부터 지애는 내내 엄마를 찾는다
엄마가 자신을 평소 부르는 방식, 엄마가 남을 흉보는 방식 등
자신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어떠한 행동을 하기 전에 고려하게 되는 것도 엄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애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소 맹목적이지만 당연하다
식상한 표현이겠으나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 하였고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부모 아래에서 자녀가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리가 무방하다
이치를 따져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사고방식의 체계를 갖추었을리도 만무하다
그러니 아이는 상상한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현실과 다른 상황이 오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 상상은 서글픈 현실을 더 슬프게 만든다
지애는 엄마의 애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때문에 상상에서조차 엄마의 애정을 받는 것은 ‘다른’ 내가 된다
대신 ‘나’의 굴레와 모습을 벗어던지고 대신 입은 옷, 그러미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미가 개인 것은 지애 때문이다
지애가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했던 것은 이전에 엄마와 함께 길을 걷다 보았던 애견샵의 강아지였다
애정을 얻어낼 수 있을 주체를 고양이라 상상했다면 그러미는 고양이였을테다
어찌되었건 그 리스트에 지애는 없었을테고
천육백원으로 얻어낸 꿈만 같은 순간은 샤워가 끝난 후 바닥의 비누거품처럼 차게 꺼져 버린다
아이에게 건넨 것이 이천원이었다면 사백원어치의 사치를 더 즐길 수 있었을까?
그 허상을 행복이라고 불러도 괜찮은걸까?
여러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