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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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둠의 탐정 장아미]: 겨울나라 대모험
2. [어둠의 탐정 장아미]: 대기권 돌파 우주 대모험 -1-
3. [어둠의 탐정 장아미]: 대기권 돌파 우주 대모험 -2-
4. [어둠의 탐정 장아미]: 대기권 돌파 우주 대모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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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탐정 장아미]: 붉은 곰
1.
아이라비로부터 유권조가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아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유권조가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는 모습을 그녀의 두 눈으로 지켜봤으니까. 그러나, 보고서는 그녀의 기억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었다.
장아미는 적외선라이트로 CIA의 감청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혹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 암호가 적혀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암호 따위는 없었다.
[남쪽으로 1km 이동 후 접촉. 교전 직후 도주. 동쪽으로 1km, 북쪽으로 1km 이동 후 위치 미상. 교전 당시 ‘곰’은 녹색.]
코드네임 ‘곰’. 정체불명의 타겟에 대해 보고서는 그렇게 적고 있었다. 소속불명의 특수전 그룹이 ‘곰’의 행방을 쫒는 중이다.
“1km라고? 이상할 정도로 딱 떨어지는 숫자 아니야?”
장아미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곰의 색깔에 대한 구절도 의심스러웠다. 자기들끼리 쓰는 작전용어인 듯 했다.
문서 아래 여백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곰’이 유권조라는 설이 있어. 확률은 반반.]
보고서를 해킹한 리체르카의 삐뚤빼뚤한 손 글씨. 요정종족인 리체르카는 아직 인간의 문자를 쓰는 데 서툴렀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악필을 짧은 손가락 탓으로 돌렸지만 장아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리체르카는 그 짧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세계 최고의 해커가 되었으니까.
루돌프의 배신으로 산타클로스가 사망하면서 대부분의 요정들은 빈민가와 뒷골목으로 흩어졌다. 한때 세계정부의 전산망을 주무르던 리체르카 역시 이제는 정보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보잘 것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겠군.”
장아미가 혼잣말을 했다. 그것은 위대한 탐정이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이기도 했다. ‘곰’이 목격된 장소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샤이바 사막. 그래서 그녀는 샤이바로 가야했다. 관광비자가 없고 여성의 입국이 까다로운 사우디에 들어가는 방법은, 그녀가 알기론 단 하나뿐이었다.
2.
장아미는 카타르에서 배를 타고 밀항을 했다. 바레인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어느새 사이펨(Saipem)사의 엔지니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무덤덤한 얼굴로 사우디 비자가 붙은 위조여권을 내밀었다. 이민국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쟌 에이미(Jan Amy). 이탈리아 여권을 가진 동양 여자라니.
자국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회사 직원에 대해서는 공무원들도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무사히 담맘에 도착한 장아미는 남장을 하고 샤이바까지 차를 몰았다. 꼬박 여섯 시간이 걸리는 길. 차창 너머로 끝도 없는 모래사막이 펼쳐졌다. 파도의 형상을 띤 사구가 그녀를 덮칠 듯이 출렁거렸다.
보고서에는 교전지점의 좌표가 적혀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장아미는 오래지 않아 말라붙은 혈흔을 발견했다. 근처에서 12.7mm 탄피도 몇 개 찾았다. 놈들은 대물저격총으로 ‘곰’을 사냥하는 중이었다.
장아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만큼은 리체르카가 틀렸다. 정말로 ‘곰’이 유권조라면 이런 총에 맞은 채 2km를 이동했을 리 없다. 그게 진짜 ‘사람’이라면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어깨만 스쳐도 팔이 뿌리째 뜯겨져 나갔을 테니까.
그나저나. 다시금 의문이 떠올랐다. 딱 떨어지는 1km라니. 1050미터도 아니고, 950미터도 아닌, 딱 떨어지는 1000미터라고? 그것도 세 번이나 연속으로? 그것이 과연 도망치는 곰이 감각만으로 인지할 수 있는 거리일까?
장아미는 그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3.
“손들어.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건조한 남자 목소리. 장아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반갑지 않은 얼굴의 등장이었다.
“외눈박이 조. 내 뒤를 밟았나?”
장아미가 물었다. 거구의 흑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그래. 바레인에서부터.”
“내가 올 줄 알고 있었군.”
“물론이지.”
코드네임 Assajokuna. 탄자니아 반투족 출신의 살인청부업자. Assajokuna는 스와힐리어로 ‘소리 없는 죽음’을 뜻한다고 했다.* (*주: 거짓말입니다.) 업계에서는 ‘외눈박이 조’로 통하는 사내였다.
외눈박이 조가 말했다.
“보고서는 너를 끌어내기 위한 역공작이었다. 우리가 기밀서버의 백도어를 열어뒀지. 리체르카의 해킹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도 일주일 만에 CIA를 털 순 없잖아. 그게 이상하다는 걸 몰랐나?”
장아미는 낄낄대는 외눈박이 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놈은 세계 최고의 킬러팀, 브릿지팀 소속이다. 브릿지팀은 절대 단독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마담X가 조준경 너머로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는 소리다. 마담X, 코드네임 영국쥐. 세계 최고의 암살자.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머리통이 날아간다.’
영국쥐는 마흔 네 번의 암살임무에 성공한 최정상급 저격수였다. 그리고 그 마흔 네 번 중 단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놈의 얼굴을 본 사람은 25미터 근접저격 임무에서 살해당한 피해자뿐이었다. 베일에 싸인 영국쥐에게 인터폴은 ‘마담X’라는 별명을 붙였다.
고심 끝에 장아미가 물었다.
“나를 끌어내서 어쩔 셈인데? 이번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
“너, ‘곰’의 정체를 알고 있나?”
외눈박이 조가 되물었다. 장아미는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흔들었다. 외눈박이 조는 장아미의 어깨에 팔을 올린 채 산책하듯 걷기 시작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걸 보니, 마담X의 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건 괴물이야. 대략 여섯 종의 이종생물 DNA를 조합한 키메라지.”
“생체병기를 만들고 있었나?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내 고용주에 대해서는 신경 꺼. 우린 그저 도망친 ‘곰’이 네 냄새를 맡고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중이니까.”
“대체 그 괴물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외눈박이 조가 장아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애송아. ‘곰’은 그냥 하드웨어일 뿐이야. 그 안에 탑재된 소프트웨어가 진짜 경쟁력이지. 놈의 두개골에는 유권조의 뇌가 들어있다고. 세계 최고의 분석가이자 지구 역사상 두 번째로 IQ가 높은 사나이 말이야.”
4.
외눈박이 조가 깔깔대며 웃는 순간, 장아미가 놈의 손목을 아래로 비틀어 꺾었다. 외눈박이 조의 상체가 구부정히 기울었다. 장아미가 무등을 타듯 놈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양 허벅지로 놈의 목을 감싸 조른 채 정면으로 몸을 굴렸다. 장아미의 체중을 견디지 못한 외눈박이 조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굉음과 함께 날아온 12.7mm 탄환이 허공을 갈랐다. 세계 최고의 저격수가 초탄을 빗맞히다니. 장아미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땅이 흔들리더니 마침내 ‘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땅 밑으로 굴을 파며 은밀하게 이동해왔던 것이다.
그것을 처음 본 순간 장아미는 왜 이 괴물을 ‘곰’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육체는 온통 수북한 하얀 털로 덮여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에는 두 뼘쯤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있었다.
외눈박이 조의 무전기에서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겟 확인. 곰은 아직 녹색이다. 적색경보 시 사격하겠다.]
장아미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담X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중을 위해 그 목소리를 기억해 두었다.
‘곰’이 하품하듯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무척추동물의 대가리 같은 살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진물이 흐르는 스무 개의 촉수와 잠자리 같은 겹눈을 가진 작은 머리. 각각의 겹눈은 마치 인간의 검은자위를 연상케 했다.
괴물의 목에는 1.5리터 생수병 크기의 기폭장치가 매달려 있었다. 그제야 장아미는 ‘곰’의 도주경로가 어째서 1km로 딱 떨어지는지를 알아차렸다.
‘기폭장치에 GPS가 달려있었던 거야. 정해진 반경을 벗어나면 경고음이 울리고, 폭발하겠지.’
지구역사상 두 번째로 IQ가 높은 유권조는 단숨에 그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경고음이 울리자 재빨리 방향을 바꿔 도망친 것이다. 남쪽으로 1km. 거기서 동쪽으로 1km, 다시 북쪽으로 1km. 그렇다면 기폭장치의 안전구역은 한 변이 2km인 정사각형이라고 보면 된다. 그 정사각형의 정중앙이 바로 유권조가 탈출한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 아마도 이 비열한 용병들을 고용한 생체실험 설비가 존재할 것이다.
5.
‘곰’의 털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곰’의 살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제 몸에 난 털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이제 괴물은 곰이 아니라 화상 입은 원숭이 볼기짝처럼 보였다.
괴물의 변신을 본 외눈박이 조가 무전기에 대고 다급하게 외쳤다.
“적색이다! 반복한다. 곰은 적색! 통제 불능 상황이다. 제압하겠다. 영국쥐, 놈을 쏴버려!”
외눈박이 조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적색’의 통제 불능 상황 때문인지, ‘곰’의 아가리가 주머니 까뒤집듯 활짝 열렸다. 소화기관으로 보이는 거대한 살색 주머니에는 인간의 어금니를 닮은 수백 개의 이빨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괴물의 포효가 사막을 뒤흔들었다.
대물저격총의 사격음이 괴물의 포효를 찢었다. 세계 최고의 저격수는 괴물의 눈알을 꿰뚫으며 마흔 다섯 번째 임무에 성공했다.
괴물의 눈에서 폭포처럼 피가 쏟아졌다. 피눈물을 흘리며, ‘곰’의 몸뚱이는 어느새 빨갛게 젖어들었다. 8미터에 달하는 장엄한 육체가 모래 위로 무너져 내렸다. 외눈박이 조가 낄낄대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 붉은 곰이 되어버렸군.”
“아니, 그렇지 않아.”
장아미는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푸시대거를 뽑으며 말했다.
“내가 그의 눈물을 닦아줄 테니까.”
장아미가 외눈박이 조의 울대에 푸시대거를 찔러 넣었다. 반시계 방향으로 있는 힘껏 칼날을 비틀었다. 기도가 찢어지며 쉭쉭대는 소리를 내더니, 놈의 목에서 피거품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외눈박이 조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천천히 죽었다.
멀리서 저격총의 탄환이 날아왔다. 장아미는 유권조의 시신을 방패삼아 몸을 숨겼다. 연거푸 탄환이 날아왔지만 육중한 유권조의 시신을 꿰뚫지는 못했다.
장아미는 괴물이 되어버린 유권조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뒤틀린 육체를 가진 괴물. 그러나 서글픈 눈빛만큼은 영락없는 유권조였다.
그녀는 유권조가, ‘곰’이 파놓은 굴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 굴이 어디까지 이어져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아미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놈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그녀가 지도상에서 영영 지워버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장아미는 전술배낭에서 위성전화기를 꺼냈다. 리체르카에게 궤도폭격을 요청하며 좌표를 전송했다. 반파된 산타클로스의 궤도 정거장에는 ‘신의 지팡이’라 불리는 질량폭격무기가 탑재되어있었다. 0.1톤에 달하는 텅스텐 막대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멀리 솟구치는 모래기둥을 바라보며, 장아미는 지난날 인류를 구했던 유권조의 마지막 비행을 회상했다.
-첫 번째 수수께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