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읽었습니다. 먼저 저는 이것을 일종의 좀비물로 읽었는데, 상당히 노골적인 신호들 때문이었죠. 전염성 있는 질병과 그로 인해 변화하는 사람들. 이런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좀비물을 떠올리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좀비물 트랜드로 이 작품을 읽기에는 약간 부족하단 생각이 듭니다. 최근의 좀비물에 나오는 좀비들은 대단히 강력한 존재입니다. 연애를 하거나, 뇌를 먹고 기억을 읽어 추리를 하거나, 질병이 나아서 사회에 스며들거나. 무엇보다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좀비물의 ‘좀비’는 두렵지만 훨씬 느리고, 약점이 뚜렷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이들이 세뇌된, 주체를 잃어버린 군중의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작품을 읽는다면 하루살이 또한 군중의 은유로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군중일까요? 저는 읽으면서 YOLO족을 계속해서 떠올렸습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인데, 첫번째로는 화자의 입으로 설명하는 ‘나’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모에 대한 설명 때문입니다.
‘나’는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로 봐도 무난할 듯 싶습니다. 확률과 통계, 수행평가 이런 단어들을 통해서요. 예전에 중2병이라는 단어가 무분별하게 유행할때, 고2병, 그리고 대2병이라는 단어도 같이 유행했죠. 이 중 고2병은 중2병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철들지 못한 또래들, 중2병에 빠져있던 과거의 자신을 혐오하다시피 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 중 핵심은 자신은 이미 철이 들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의 객관적인 잣대에 맞춰 철들지 않은 사람들을 과하게 적대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보는 YOLO족은 어떤 이미지일까요? 오늘 하루를 불태우는 부나방. 하루살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두 번째는 이모에 대한 설명입니다. 작중 화자는 이모의 장례식장에 갑니다. 여기서 이모는 기존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도 안 한 노처녀. 명절 때 얼굴 한 번 안 들이밀었어. 이런 표현들이 그 예시죠.
이런 어긋난 삶 때문인지, 혹은 어긋난 삶을 살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모는 굉장히 강박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본인의 쾌락을 통제하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노래방의 서비스 타임조차 거부하는 삶. 아주 최소한의 분출구. 그렇다면 이모가 하루살이가 된 것은 일종의 해방으로 해석 가능하지 않을까요? 정밀한 시계 부품처럼 돌아가던 놀 줄도 모르는 워커홀릭이 어느 날 갑자기 YOLO족을 선언한다면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 때문에 하루살이입니다. 종에 따라 성충이 된 후 최고 3주까지도 살지만, 짧은 삶을 산다는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가 정말로 하루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충이 되기 전, 유충 단계에서 1~3년 정도를 산 다음에야 하루를 불태우고 가는 것이죠. 성충이 된 하루살이의 하루는 번식을 위한 하루입니다.
작중에서는 집요할 정도로 이모가 처녀로 죽었음을 강조하고, 나를 통해 하루살이가 된 이모가 짝짓기했을까에 대해 고찰합니다. 이는 이제 이모가 삶이 아니라 말초적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는 은유로 보입니다.
저는 이 리뷰의 제목으로 끝까지 ‘하루살이 아포칼립스’와 ‘고2병과 YOLO족’을 놓고 고민했습니다. 후자를 쓰지 못한 이유는 고2병에 해당하는 나의 이야기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끝에서 나는 하루살이들에게 물리고 아마도 변화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러나 이모가 하루살이가 되는 것을 일종의 해방이라고 해석 가능하다면 나는 왜 하루살이가 돼야 하는 걸까요? 나는 그저 계속해서 갖혀서 공권력, 즉 어른들의 구조를 기다릴 뿐이며 끝까지 주체가 되지 못하고 사회에 속아서 YOLO족이 되고 맙니다. 이런 해석으로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끝까지 남네요.
작중에 언급된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삶은 부조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 해줄 나의 이야기가 없기에 이 부조리가 그저 편리한, 작위적인 결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을 좀 더 전시해 대구를 맞출 수 있었다면, 그것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지 않앗을까요? 그것이 다시 돌아와 삶이 부조리하단 메시지 일지더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