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밀렉은 변론 중에 예상치 못한 통증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의뢰인은 물론이고, 상대하던 검사마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낼 정도로 디말렉은 표정을 구기고 아픔을 삼켰다.”
제국 유일의 오크 변호사인 주인공 ‘다밀렉’은 현재 국선 변호사로 살인 혐의의 의뢰인을 변론 중입니다. 무난하게 무죄로 승소하리라 예상 중이며 그의 옆에는 사무관인 엘프 ‘리아나’가 있고요. 이빨을 뽑자는 치과 의사의 조언을 뿌리치고 집에 왔더니 이빨 아파 죽갔구만 분리주의자 오크 둘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의뢰인이 오크 독립의 희망인 거물인사를 살해했대요. 무죄를 받았다간 난리날 것 같아요. 이번엔 꼭 승소할 수 있으리라 봤는데 말이죠. 그는 자신이 모르는 이면이 더 있나 싶어 사건을 파고들어보지만 그럴수록 계속 일이 터집니다. 그 와중에 다치고 입원하고 협박당하고 거절당하고….계속 등장인물은 늘어나고 어느새 그의 옆에 함께하는 숫자가 늘어납니다.
유권조 작가님의 [오크 변호사]는 소음이 많은 소설입니다. 치통으로 시작해서 소설 내내 소음이 많아요. 때로는 총소리였다가 때로는 폭탄 터지는 소리였다가….그럴 때마다 사무관인 엘프 리아나가 먼저 귀를 막고요. 다밀렉은 그 개인으로는 치통 때문에 고통받지만 외부적으로는 계속해서 이 소음이 그를 방해합니다. 초반 뭔가 터지는 식의 사물이 내던 소음에는 점점 여러 목소리들이 섞입니다. 욕설, 증오, 혐오….목소리와 함께 그에 포함된 감정도 강해지고요. 단순한 소음에서 여러 목소리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인공과 그와 엮인 캐릭터들은 이 소음 속에서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아야하고요. 이들은 자기 목소리를 찾아서 자기 의사를 말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성장담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성장담의 첫번째 파트란 느낌도 받았고요. 또 ‘말’이라는 수단으로 의뢰인을 변론하는 변호사 캐릭터가 주인공인 게 당연하다 싶기도 해요.
오크, 엘프, 인간, 고블린….설정 자체만 보면 판타지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변호사의 활극이란 말이죠. 속을 안 밝히는 의뢰인, 자꾸 찾아오는 이상한 사람들, 알고보니 사건 뒤에 누가 또 있고 근데 누가 또 있고 또 있고….계속 하나씩 드러나고 그 와중에도 계속 다밀렉은 이빨이 아픕니다.
더불어 여러가지가 얽혀있는 소설입니다. 오크로서 유일한 제국의 변호사인 다밀렉은 그 자체로 화합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배신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몰랐지만 알고 보니 모두가 그를 아는 나름 유명인사였고. 그렇다고 잘나가는 변호사는 아닙니다. 어찌 보면 이 제국에서 다밀렉은 하나의 상징 – 오크도 변호사가 될 수 있다 – 으로서의 이미지로만 존재해주면 충분한 걸지도 몰라요. 이 사회에서 그에게 부여한 역할은 상징이지 본인 목소리가 아닙니다. 타이밍 좋게 치통까지 터져줬으니 입 다물어 주면 좋았을지도요. 하지만 다밀렉은 어느새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요. 다른 캐릭터들도요.
재밌는 소설입니다. 저는 제목만 보고는 ‘오크가 주인공 이름인가?’ 생각할 정도로 기본 지식이 없는 인간이었으나 1화 시작하자마자 무척 재밌어서 계속 읽었어요. 이 과정이 매끄러우면서 아주 깔끔하기도 하고요. 재밌어요. 근래 읽은 것들이 사생활은 망가졌지만 업무 능력은 뛰어난 형사가 주인공인 소설 위주였기 때문인지 [오크 변호사]를 읽으면서 새삼, ‘아아 그래 이 재미이지, 변호사, 법정물….’했습니다. 저한테는 변호사 캐릭터가 주는 어떤 두근두근거림이 있어요. 형사가 주는 두근거림이랑은 또 달라요. [오크 변호사]는 재밌을 뿐 아니라 이 두근거림이 잘 살아있는 소설입니다.
저는 1화부터 천천히 연재 과정을 같이 따라온 독자가 아니라 완결된 걸 알고 하루이틀에 몰아서 본 경우입니다. 이어질 두 가지 내용은 그래서 느낀 걸지도 몰라요.
이 소설은 계속해서 ‘그/그녀’가 아니라 ‘그’만 사용합니다. 17화 작가의 말을 보면 인칭대명사 ‘그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이 덕(?)을 제일 크게 보는 캐릭터는 사무관인 리아나 입니다. 엘프 리아나는 성별이 여성 같았는데 계속해서 ‘그’라고 지칭하기에 성별 구분이 모호해진달까, 아닌가 더 정확히 말하면 구분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때문에 남자 상관(메인 캐릭터)/여자 조수(서브 캐릭터) 라는 뻔한 도식이 줄 수 있는 지루함을 덜 느끼게 해줍니다. 이런 분명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너무 많습니다. 9화까지 읽으면서 느꼈고 이후부터는 적응이 된건지 덜 느꼈고요. 제가 몰아서 읽어 그런건가, 모르겠어요. 가령 이런 문장들이요.
다밀렉은 계산대 너머에 있던 의자를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그는 이를 꽉 물고 허릿심을 담아 오크들에게 의자를 던졌다.
그때에 다밀렉이 눈을 떴다. 그는 총을 걷어차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의 ‘그는’은 앞에 다밀렉이라고 나왔기 때문에 없어도 읽는데 누가 하는 행동인지 파악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저는 그랬어요. 그런데 이런 ‘그’가 많습니다. 단문을 선호하셔서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건가 싶기도 했습니다만, 이렇게 많이 나올 필요가 있나, 혹시 독자가 이 정도도 이해를 못하고 헷갈려 하리라고 생각하시나 뭐랄까 음….이 소설을 읽는 독자를 못 믿는건가, 우릴 좀 믿어주시지요, 생각도 잠깐 했어요. 모르겠어요, 제가 몰아 읽어서 그런건지도요.
다른 하나는 23화에서 호룬토가 다밀렉한테 왜 높임말을 쓰냐며 자기는 아저씨라고 할테니 아저씨도 편하게 말 하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무척이나 한국적인 상황이라고 느꼈어요. 다밀렉이 높임말 쓰는 진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들어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와중에 나보다 어린 애가, 눈치 빠르고 요령 좋게 말을 놓으라고 알아서 깔아집니다. 한국식 호칭 정리를 나서서 해준단 말이죠.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기묘했습니다. 물론 그만큼 호룬토가 다밀렉한테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겠지요. 호룬토는 32화에 가면 리아나한테까지 말을 편하게 하라 해요.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호룬토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은 아마도 다밀렉과 리아나이겠지요.
이 순간 [오크 변호사]의 제국 세계관은 한국의 장유유서 세계로 급속하게 돌변합니다. 이들은 소설 속 제국사람이라기 보다는 실존하는 한반도의 남한 사람이란 인상을 줍니다. 어쩌면 이게 한국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올 장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나이가 몇이든 평생을 차별 한복판에서 살면서 각종 무시와 혐오를 주요 캐릭터 중 가장 많이 겪었을 호룬토가 말을 편하게 하라는 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이렇게 자발적으로 ‘너희들에게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주겠다’고 움직이는게요. 너무나 쉽게 한국 사회의 막내가 되어버립니다. 유사가족 내의 지켜줘야 할 막내딸이 되어버립니다. 호룬토의 매력이 확 떨어져요. 또 바로 말을 놓는 다밀렉 역시도요.
* 덧
1. 저는 얼마전 치과에서 2주간 신경치료를 받았어요. 처음 받는 치료라 그런지 굉장히 괴롭더만요. 밥도 잘 못먹고요. 그래서 읽는 내내 ‘얼른 치과부터 가…..’ 정말 남 일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치통은? 계속 치통 치통 치통 하면서 읽었어요.
2. 제목 “독수의 과실”을 처음에는 毒手로 짐작했습니다. 읽다보니 아니란 걸 알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