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보기’라는 독특한 합성어 제목 아래, 작품은 이 낯선 단어의 기원과 역사부터 밝힙니다. 곳곳에서 정확한 연도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나 건물, 지역이 등장해서 저는 실제 역사와 대체 역사의 비율이 반반 정도겠지 짐작하면서 읽었는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 정도는 사실일 줄 알았던 것도 아니라는 검색 결과가 나와서 재밌었습니다. 작품에서는 가장 초반인 형광등의 최초 유입 시기나 시를 남긴 사람도 다르더라고요.
그렇지만 이 작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조선의 독특한 전통문화를 소개하고자 하니 고증을 맞출 필요는 없겠죠. 연도와 유입 경로는 다를지언정 형광등은 조선에 들어왔고, 형광등보기 역시 시작됩니다.
문화의 수행자가 여성이고,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멸시와 비판이 가상이어도 조선이고 한국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를 반박하거나 재해석하는 과정 역시 근현대 역사에서 볼 법해서 이게 정말 대체 역사인지, 실존하는 문화에서 대상만 살짝 바꾼 게 아닌지 싶었습니다. 거기서 파생된 형광등보기 점은 전통적인 점술에 비해 소재가 특이하긴 하긴 해도 원체 사람은 별이든 거북이 등껍질이든 찻잎이든 보면서 점을 치니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죠. 흥미로운 전통문화로 부흥했다가 수수함에 질려 금세 다시 쇠락하고 말았다는 점도 이렇게까지 현실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만큼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사실은 점성술보다는 영적 수련에 더 가까운 행위라는 인터뷰 내용도, 그저 방향성을 바꿔서 살아남으려는 시도로만 여겼을 때였습니다.
기원과 역사 앞에 1이 붙었는지도 가물가물하던 차에 2가 붙은 소제목과 함께 다른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니 환기가 되고 좋더라고요. 광막자는 현대의 기술이 거짓으로 뒤덮은 빛을 분해하여 다시 오롯한 진리로 드러내는 빛의 막자라는 뜻일까요? 있는 단어인 줄 알고 넘겼던 게 사전에 없으니 더 궁금해지네요! 어쨌든 시작은 이게 형광등보기와 대체 무슨 관련인가 싶었는데, 공포스러운 경험의 다음에 느껴지는 환희, 고대 그리스의 철학까지 가져오는 설명이 마치 오류로 인해 순수해진 빛처럼 앞선 분량을 다시 비추는 듯했습니다. 읽을 때는 복선인 줄도 몰랐던 게 밝혀질 때의 즐거움도 빛에 비견될 만하죠!
그렇지만 이 또한 향락스런 궁전의 모사였을 줄이야…. 한창 고조됐던 터라 환각에서 깨어난 기분이 드는 게 아쉬웠지만, 공포 소설의 말미에서 종종 보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했다는 설명문 같기도 해서 의미심장했습니다. 이렇게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홀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다루는 게 정말 공포 소설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일까요? 작성자는 지극한 선이라고 했지만, 그게 정말 선한 건지, 그보다 위험하진 않은 건지 단언할 수 없는 은근한 미지가 인상 깊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갔다간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에서 딱 멈춘 것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