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평생 막대사탕이나 빠는거다. 믿었던 모자 속에 발이 갇히는 것은 순식간. 기억하렴. 네가 먹은 건 딸기가 아니라 딸기 맛. 불게 물든 혓바닥은 결국 제 색깔로 돌아온다.
끈적거리는 손을 씻을 때 옆 사람에게 치통 때문에 찡그린 얼굴을 들켜 주는 배려.
변변한 충치 하나 없이 사는 일이 얼마나 지루한지.
물론 대개는 알고도 모른 척 하겠지만.
둥근 원의 생활계획표를 잘게 쪼개는 고사리 같은 손이여. 사탕을 빨다 말고 거울은 언제든지. 딸기 색 혓바닥을 요리 조리 뒤집어 살피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변기의 물을 내리고 무사히 뒤돌아섰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눈 깜빡할 때마다 마주치는 몸속의 암흑. 떨어진 숟가락을 줍느라 숙인 머리가 거실 바닥으로 풍덩 빠져들고 팬티 속으로 밀어 넣은 발이 달의 뒤편으로 미끄러 질 때.
평생 막대사탕이나 빠는 거다. 막대사탕을 팔아도 좋고 막대사탕을 추억해도 좋고 막대사탕만 고집해도 좋고 막대사탕을 아예 몰라도 좋고 막대사탕 대신 솜사탕이어도 좋다. 무슨 상관인가. 언젠가 눈 뜨면 여기는 분명 아닐텐데.
모아놓은 버찌 씨를 챙겨 등고 지금이라도 철길을 따라 달릴 수밖에. 사탕가게에는 점점 가까워지고 달리는 동안은 달리는 것을 믿을 수 있어라. 감사하게도.
1.
시종일관 이렇게 매끈한 차가움을 유지 할 수 있는 문장이 좋네요. 이 글에 대한 리뷰를 쓰기 위해 검색을 시도했고 기억과는 다르게 글의 제목이 “내 영원을 팝니다”인 것을 알았죠. 몇 번이나 읽은 글인데도 “나의 영원을 팝니다”인 줄로 알고 있었지 뭐예요. 그렇지만 “내”와 “나의”의 간극은 크게 느껴지네요. 줄일 수 있는 건 줄여서 조금 더 매끄럽게 줄인 문장이 차가움을 띌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객관적 현상을 설명할 때도 그렇지만 글의 후반부에도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부분은 많이 삭제되어 있어요. 아이에게 줄 것이 이것 뿐이라고 사과할 때도, 가족과 대화하면서 늙어버린 부모님을 알았을 때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끝이 났습니다. 분명 더 조명해서 감정을 자극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설명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줄이고 줄여서 간단하게 덧붙여 놨어요.
그게 제 입장에서는 감정에 치중하지 않고 실제로 일어날 수 도 있는 미래의 일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몰입에 방해를 받지 않았어요. 두 번 세 번 째 읽을 때는 찬찬히 뜯어보다가 미래를 알고 있으니 울컥하기도 했지만 과하게 주인공에게 이입되지 않아서 저는 ‘아직’ 안전한 곳에 있다는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고요. 그래서 좋았습니다. 내던져진 주인공만을 안타까워 할 수 있으니까요.
2.
문체보다 더 눈여겨 본 건 광고가 가진 일련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단문응원에도 남겨주신 것처럼 ‘광고’의 짤막한 역사를 설명해나가면서 그래도 작품 속 세계에서 연결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웠습니다. TV 방송의 주 수입원과 신문의 주 수입원이 광고였고, 그것에 PC통신과 케이블 채널로 이어지지요. 스마트 폰에는 무료앱에 광고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광고를 손 안으로 끌고 왔고요. 구글과 블로그 배너, 페이스북 포스팅과 댓글까지 광고의 영역은 넓혀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에 광고가 있습니다. ‘좋아요’의 갯수도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상품을 알리기 위한 수단에서 개인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개인적인 영역까지 내려오기도 했죠.
이렇게 별다른 충격없이 서서히 우리 삶에 밀고 들어 온 광고는 이제 더욱 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머릿 속으로 바로 들어가는 거였죠. 여기서부터가 작품 속의 세계인데 너무 그럴싸 합니다. 이제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광고회사가 아직 법이 제대로 확립되기 전에 개인의 뇌를 차지해버리는 거죠. 현실의 우리가 보기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태는 빈번히 일어나니까요. 작품 속에서도 뇌를 이미 다 지배해 버린 광고를 제재하기 위해 법을 손보려 하지만 광고에서는 돈으로 이를 막아가며 다음 수단을 강구합니다.
바로 태어나자 마자 광고를 주입하는 건데요. 이 대목에서 서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광고에 지배된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주인공은 보육비를 댈 수 없는 부모님이 최후의 선택으로 도넛광고에 주인공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지배할 권한을 주었고, 그래서 주인공은 첫사정도 도넛을 끼고 하는 것으로 18세 이전의 삶을 도넛 광고에 송두리 째 빼앗겨 버립니다. 조금 더 구역질 나고, 진저리 나게 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정도로만 끝냈기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를 확장시키고 더 쓰고 싶은 욕심을 참으셨을 것 같아서 대단하단 말을 드리고 싶네요.
3.
이 세계에서 뇌는 이미 개인이기 때문에 육체에 대해서는 자유로워 보입니다. 이미 광고가 손을 통해 눈을 통해 들어가는 단계를 지났기 때문이겠죠. 뇌를 차지하면 눈을 자극하거나 손을 자극해서 광고를 클릭하게, 더 자세히 들여다 보게 만들 필요가 없으니 육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방해꾼일 뿐이겠죠.
뇌만 담보로 잡을 수 있으면 주인공이 유년기를 팔아버린 도넛에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것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일거예요. 게다가 뇌만이 남아서 서버에 업로드 될 수 있으면 개인에게는 천국, 광고 회사에게도 천국인 이세상과 저세상의 중간계 쯤 되는 곳이 있으니 아마 언급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육체를 아주 하찮게 여겼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육체로 옮겨가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뇌만 있어서는 도망 갈 수가 없는거죠. 결국은 행동 할 육체가 필요했습니다. 그 동안 뇌만 중요시한 광고회사의 폐해 중에 하나라고도 할 수 있고 광고회사의 큰그림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게다가 처음에 순직을 인정받을 때도 언론을 이용하고, 마지막에 업로드 된 사람들의 실태를 고발 할 때도 언론을 이용하죠. 언론은 광고가 주 수입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물고 물리며 원 안에서 뱅글뱅글 도는 것도 육체와 정신과 육체를 돌고 도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뻗어나가는 상상보다는 확장 된 원 안에 있는 상상력이라 아직은 안전지대에 있는 것이 안심되면서도 한 발만 더 나가면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결국 내딛어야 할 세계인 것 같아서 두렵기도 했습니다.
4.
이 세계에서는 뇌가 복사하기 – 붙여넣기를 거쳐 새로운 뇌가 생겨나면 아무리 똑같은 뇌라고 하더라도 다른 존재로 인식하죠. 결국엔 뇌가 하나의 개인을 이룬다는 건 마지막에 가서도 변하지 않네요.
하지만 살아있다는 건 뭘까요. 주인공은 뇌가 업로드 된 상태에서 가족과 매일 매일 통화를 한다고 해서 가족들은 그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단순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안에서 소비를 할 수도 행동하는 바깥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칠 수도 심지어 창조 활동을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고양이의 물을 줄 수는 없어요. 그건 살아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에서도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의 소비 성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표현 한 것으로 보아 뇌만 업로드 된 건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뇌 하나를 개인으로 인정하는 건 조금 모순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뇌의 복사하기 – 붙여넣기를 거친 새로운 뇌가 새로운 육체를 가진다면 그건 한 명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 그럼 한 명의 죽은 사람과 한 명의 산 사람이 있는건가요.
그렇다면 죽은 사람을 죽인 것이니 주인공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긴 하겠네요. 자살도 아니고 타살은 더더욱 아닌.
5.
호러는 제 두려움의 역치가 너무 낮기 때문에 어렵고, SF는 이해도가 낮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작품이네요. 광고라는 소재와 증강현실 다음 단계를 엮은 것도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요.
평생 막대사탕이나 빠는 거다. 막대사탕을 팔아도 좋고 막대사탕을 추억해도 좋고 막대사탕만 고집해도 좋고 막대사탕을 아예 몰라도 좋고 막대사탕 대신 솜사탕이어도 좋다. 무슨 상관인가. 언젠가 눈 뜨면 여기는 분명 아닐텐데.
뭘 소비하건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그 곳은 잠깐은 천국이었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소비하며 생산하며 이렇게 글을 주고 받는 세계가 좋네요. 이 곳에서도 별점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은 같지만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