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선 안된다는 건 누구나 알죠. 이건 시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의 시간 역시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죠.
카나엘 디아즈는 별일 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아마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고 있고, 내일도 그러겠죠. 하지만 이 별일 없어보이는 시간들이 사실은 치열한 셀프컨트롤의 시간이에요. 작가님 특유의 간결한 문장에 잘 다듬어진 담담한 묘사가 어울러지면서 사소한 일들을 이리저리 헤치며 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사실은 카나엘 디아즈의 시간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어떤 격력한 감정이 그 시간들 사이사이 깊숙한 곳에 숨어서 삐져나올 틈을 노리고 있어요.
그 격렬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읽어보시면 쉽게 아실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에만 언급되지만, 읽고 난 뒤에 남는 건 남는 건 그 감정의 여운 뿐이죠. 적어도 전 그랬습니다. 그외에 카나엘 디아즈가 하루동안 어디서 뭐했고 따위는 그냥 스쳐지나갔어요. 카나엘 디아즈 본인도 하루를 돌아볼 때 기억에 남는 건 아침의 튤립과 밤의 침대 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연인과의 이별, 가족과의 사별, 꿈의 좌절 같은 일을 겪고 난 뒤,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으면 쏟아지는 감정이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말겠죠. 어떤 사람은 쾌락에 몰입하고, 또 어떤이는 새로운 취미에 몰입하기도 할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쾌락과 취미가 사실은 텅빈 공허를 감싸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죠. 그리고 카나엘 디아즈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 몰입합니다. 어쩌면 가장 힘든 방법일지도 몰라요. 카나엘 디아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야기였어요.
이야기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 아래는 조금 외부적인 이야기입니다.
태그에 AWT가 있는 걸 보니, 그리고 마지막에 낯선 이름들이 여럿 등장한 걸 보니, 카나엘 디아즈의 이야기는 이게 시작도 끝도 아닌 거 같네요. 작가님이 오래전부터 그리고 계시는 큰 세계관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이 작품이 그냥 별개의 이야기이길 바랬어요.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말이죠. 카나엘 디아즈가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의 에필로그였다면 좀더 극적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전일담을 들려주기위한 프롤로그였더라도 흥미로웠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제가 원하는 종류의 것들은 아니었어요. 이 이야기는 이 한편에서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가지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에필로그이거나 프롤로그였다고 한다면, 독자에게 좀 불친절 한 거 같아요. 실제로는 전일담도 후일담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이런 외적인 요소가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발끝을 잡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 이야기와 문장은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아쉬운 점도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