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발의 순간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이계리 판타지아 (작가: 이시우, 작품정보)
리뷰어: 이나경, 17년 10월, 조회 528

미리 말씀드리자면 리뷰랍시고 올리는 이 글은 실제로는 리뷰가 아니고 프리뷰도 아니며 심지어 소설 ‘이계리 판타지아’와 별로 관련이 없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아무 관련이 없다는 느낌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리뷰 코너를 택한 이유는 이 소설을 구성하는 어떤 조각 하나가 확실히 제 안의 무언가를 촉발시켰고, 이는 향후 저의 창작에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촉발된 과정과 내용 및 향후 전망을 여러분과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결국 리뷰의 형식으로 남기는 이 글은 다소 섣부르고 서투른 헌사가 될 공산이 다분합니다. 하지만 최대한 안 그런 척 담담하게, 괜히 삐딱하게, 때로는 이건 좀 실례가 아닌가 하고 느껴지게끔, 어떤 면에서든 조금 과했다 싶으면 마지막에 사과할 각오로 써보려 합니다. (이 순간 이 글이 어떻게 끝나겠구나, 하는 예감을 받으셨는지요. 짹짹? 아닙니다. 미안! 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설 구성의 3요소라고 하는 인물, 사건, 배경에 대해서는 다룰 생각이 전혀 없으니 아직 소설 본편을 읽지 않으셨다고 하여 이 글을 감상하는 데 장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글을 먼저 읽고 본편을 읽으신다면… 그건 괜찮을 것 같군요. 다들 그렇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또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부득이하게 ‘이계리 판타지아’가 아닌 다른 작품의 내용을 살짝 누설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작품은 샘 레이미 감독의 2002년작 영화 ‘스파이더맨’이에요. 혹시라도 해당 영화를 아직 안 보셨다면 이어지는 글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감상하시기를 권합니다.

주의하세요. 샘 레이미 감독의 2002년작입니다. ‘스파이더맨’이 리부트를 밥 먹듯이 하는 바람에 족보가 좀 엉망이라 2000년대 이후로 무려 세 가지 버전으로 여섯 편이나 출시되어 있거든요. 헷갈리지 않으시려면 겉보기에 가장 늙은(…) ‘스파이더맨’을 고르시면 됩니다. 이런저런 군더더기 없이 ‘스파이더맨’이라고만 돼있는 제목을 고르시는 것도 하나의 요령이겠군요. 그냥 마음 편히 다 보셔도 되고요.

(그나저나 브릿G에서 ‘스파이더맨’을 언급하는 게 벌써 세 번째인데요, 저는 딱히 그 영화에 열광하는 팬은 아닙니다….)

 

*

 

제가 숙원으로 삼고 있는 프로젝트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춘생문 사건에 관한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춘생문 사건이란 지금으로부터 백 년쯤 전에 명성황후 시해 이후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던 고종을 궁 밖으로 빼내려고 시도했던 사건이에요. 계획은 허무하게 실패했지만 (훗날 아관파천으로 만회하긴 합니다) 서스펜스적인 요소가 다분해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이던 소재였지요. 마침 신년 초에 잠깐 시간 여유가 나길래 저는 마침내 춘생문 사건을 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춘생문’(가제)의 소설 집필에 착수했지요.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점에 달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집 <지옥변>을 구매한 것이었어요.

왜냐고요?

저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뜸 이렇게 말해봤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실 테니 조금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 회색 뇌세포는 춘생문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즉각 나생문과 연결 짓더군요. 애초에 춘생문 사건에 눈독을 들인 것도 춘생문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광화문이나 건춘문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았을 거예요. 오로지 춘생문이 음운학적으로 나생문, 즉 라쇼몬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소설을 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수많은 위대한 창작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하여간 그래서 저는 <지옥변>을 신속히 구매했습니다. 여기서 신속하다 함은 책을 주문하고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워 얼른 코트를 두르고 서점으로 달려가 구매했다는 의미입니다. 책을 구매하는 일련의 과정이 통째로 신속했다는 의미이지요. 그런 뒤에 저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9페이지에 게재된 ‘라쇼몬’을 읽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제가 최초에 떠올린 라쇼몬은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었습니다. 만약 춘생문 사건을 소설로 쓴다면 영화 ‘라쇼몽’의 구성을 본뜨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며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순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영화 ‘라쇼몽’이 소설 ‘라쇼몬’보다는 ‘덤불 속’의 내용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저는 이 사실을 대략 20년쯤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춘생문 사건을 구상하기는커녕 앞으로 제가 소설을 쓸 거라는 얘기를 농담으로라도 하지 않던 시절에 말이에요. 그러니 본래의 착안대로라면 ‘덤불 속’을 읽는 것이야 말로 집필로 이어지는 직진 코스라는 것을 구상 단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어이 ‘라쇼몬’이 있는 방향으로 핸들을 틀고 말았던 거예요.

왜냐고요?

제가 그런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라쇼몬’은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짧은 소설입니다. 그 짧은 소설을 다 읽은 뒤 곧바로 ‘덤불 속’을 읽어도 됐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그러는 대신에 책을 덮고 차창 밖으로 우수어린 시선을 떨구며 긴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동안 <지옥변>을 다시 펼치지 않았어요.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 때 저는 글을 한 편 썼습니다. 춘생문 사건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제가 쓴 것은 라쇼몬의 독후감이었습니다.

다음은 그 전문입니다.

 

유독 신경이 쓰이는 문장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말 내내 그 문장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 문장은 아래와 같다.

“그런데다 그날의 하늘 꼬락서니도 적잖이 이 헤이안조 사내의 센티멘털리즘에 영향을 끼쳤다.”

앞선 각주는 이 소설의 배경이 794년부터 1185년 사이임을 넌지시 드러낸다. 더구나 ‘라쇼몬’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5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완성된 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대략 그 즈음이겠지.

그런데 ‘센티멘털리즘’이라는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 있는 것이다. 작가 아쿠타가와가 파격을 노려 외래어를 사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 내에서 이와 같은 외래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사용되었어도 나는 곧바로 그의 힙스터적 야심을 읽었거나 아니면 외래어의 무분별한 남발이 당대의 사조였음을 짐작했을 것이고 그 결과 오히려 감흥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냥 딱 한 번 쓰고 말았다.

작가가 고심 끝에 대체어를 찾지 못해 패배감을 느끼며 사용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쿠타가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단어를 썼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헤이안조 사내가 꾸미는 단어로서 센티멘털리즘보다 덜 튀는 표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저것은 중요한 문장도 아니다. 없어도 되는 문장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일찍이 나는 ‘전신보’라는, 고전의 풍미를 발하는 연작 소설을 쓴 바 있다. 시대배경을 명확히 설정하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옛날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에 외래어는 물론이요 현대적인 어휘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꼭 쓰고 싶은 단어가 있더라도-예컨대 센티멘털리즘이라든지-다른 향토적인 단어로 바꾸어 썼다.

그런데 이제 막 한반도를 손에 넣은 시절의 옛사람인 아쿠타가와가 그보다 더 옛날 배경의 소설을 쓰면서 대통령이 탄핵되는 시절을 사는 나보다 더 파격적인 어휘를 구사한 것이다. 충격적이다. (보라, 나는 이 순간에도 ‘쇼킹하다’고 쓰기를 주저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그렇다기보다는 과제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 부여한-제약들을 이리저리 궁리하며 극복한 것이 내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믿는다. 처음 본격적으로 쓴 소설도 백일장의 형식이었으니 경험이 부족할 때는 어쩌면 미션을 수행하는 재미가 내 글쓰기의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생이 그렇다보니 제약이 없는 글쓰기는 아직도 어색하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제약에 얽매이는 것은 정말이지 쓸 데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가는 그저 독자를 홀리는 데에만 매진하면 그만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누가 뭐래도 나 스스로는 이제 꽤 자유로운 글쓰기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저 심상찮은 문장을 읽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여러 제약들이 여전히 나를 옥죄고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따라서 나는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것. 낙천가는 상황을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다. 터무니없이 유리한 쪽으로 말이다. 바로 이렇게 아쿠타가와 상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지.

 

마지막에 아쿠타가와 상 운운하는 대목이야 그냥 너스레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만 제가 큰 충격을 받았음과 함께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만족감이 너무도 충만한 나머지 춘생문 사건에 관한 소설을 쓰려는 의욕은 저만치 멀어졌지만요. 그래도 언젠가 의욕을 되찾는 때에는 ‘라쇼몬’에 뒤지지 않는 근사한 소설을 쓸 수 있겠지요.

덤으로, 이것이야 말로 아무 상관없지만 그래도 도의상 ‘덤불 속’을 읽은 감상을 덧붙이자면-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춘생문’(가제)은 ‘덤불 속’보다 더 정교하게 더 매끈하게 쓸 거예요.

 

*

 

자! 제가 이처럼 긴 서설을 쓴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브릿G 사상 최장의 리뷰를 쓰고 싶었다! 오래도록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우고 싶었다! 영원히 빛날 리뷰의 금자탑을 이룩하고 싶었다!”뿐만이 아닙니다. ‘라쇼몬’을 읽을 때와 거의 같은 충격을 ‘이계리 판타지아’를 읽으면서도 느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너무 무모한 비교 아니에요? 상대는 아쿠타가와라고요! 본인 이름을 딴 문학상이 있는 작가가 어디 흔하냐고요! 하긴 그렇게 따지면 본인 필명으로 된 술이 있는 작가가 더 귀하긴 하지요….

각설하고, 저는 지구상에서 ‘이계리 판타지아’를 제일 먼저 읽은 독자 중 한 명입니다. 제일 먼저 구독 버튼을 누른 독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힐 거예요. 그리고 단문응원만큼은 확실히 제가 제일 먼저 남겼습니다. 2017년 10월 12일 현재 427개의 단문응원이 달린, 앞으로 더 많은 응원이 달릴 작품의 1등이라고요. 아뇨,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자랑거리이긴 하지요. 아닌가요?

저는 1회를 처음 읽은 감상을 단문응원 창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바로 이걸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속마음이 너무 매력적이에요ㅋㅋㅋ”

이것이 이 소설의 기념할 만한 첫 번째 단문응원입니다. 이는 진심이었지만 돌이켜보면 100%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속마음을 따로 표현한 것이 너무 매력적이에요ㅋㅋㅋ’라고 해야 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ㅋ를 열두 개쯤 찍었어야 했을 테고요.

montesur 작가님은 이 소설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속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먼저, 주인공 강미호의 속마음이 있겠지요. 제가 매력적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속마음이었어요.

 

‘이제 9월인데 왜 이렇게 춥지? 보일러를 켜야 하나?’

‘아버지.. 한평생 저에게 뭐하나 도움 주신 게 없는 분이 돌아가시면서 그래도 큰 선물 하나 주고 가셨네요.’

‘귀녀래.. 어떡해.. 귀할 귀자에 여자 여자 쓰시나 봐!!’

 

그런데 사실 강미호의 속마음은 굳이 작은따옴표를 쓰지 않더라도 여기저기서 아무렇지 않게 등장합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망상의 타래를 이어 가는 것도 그 사례 중 하나임은 분명하고 말이지…

물론 오늘 당장 하겠다는 건 아니고…

 

저는 작가님이 어떠한 분류법에 의해 이 둘을 나누어 쓰는지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본인 말마따나 ‘퇴근해서 4시간 동안 술처먹으며 글쓴이의 로망이 반영된’ 소산으로 치부하기엔 모종의 전략적인 매력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다시 보세요. 위의 속마음들은 따옴표가 없이 들어가면 어색하긴 합니다. 반면 아래 속마음들은 따옴표를 넣어도 그럭저럭 위화감이 없지요. 그렇다면 속마음과 따옴표 사이에 위화감이 있을지 없을지 헤아린 뒤에 따옴표가 없어도 그럭저럭 문제없겠다는 확신이 선 것들-이를테면 아래 속마음들-의 따옴표를 지운 것일까요? 하지만 도대체 어떤 인간이 ‘퇴근해서 4시간 동안 술처먹으며’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한참 골몰하자니 불현듯 아래 속마음들에서 무지막지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게 왜 따옴표도 없이 저기 있는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잠깐, 화자는 누구야? 강미호 자신이라기보다는 강미호에 관한 것들만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전지적 작가인 것 같은데…. 따옴표가 없는 속마음이라면 결국 전지적 작가가 간파한 강미호의 속마음인가? 그럼 따옴표가 붙은 속마음은? 아니, 그것도 결국 전지적 작가가 간파한 거잖아?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둘이 나뉘어 있냐고!

사실 이것은 아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따옴표가 있든 없든 어차피 둘 다 속마음으로 읽히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요. 독자 제위께서 보시기에 제가 괜한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만도 합니다. 근사한 작품이 근사함을 뽐내는 것을 시기하는 속 좁은 인간이라고 지탄하셔도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여러분, 소설을 쓸 때 독자처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읽을 때 작가처럼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둘의 특성을 두루 갖춘 비운의 작가 겸 독자가 있다는 사실은요? 독자처럼 쓴다는 것은 방만하게도 소설을 쓰는 자신이 도리어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느릿느릿 마치 남의 소설을 읽듯이 행복하게 전진하는 양태를 일컬으며, 반대로 작가처럼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글을 본인의 역량 강화를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마치 자신이 글을 쓰는 듯한 기세로 양분을 섭취하며 읽는 악랄한 자세를 일컫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제 얘기예요. 위 두 가지 습성을 겸비한 인간은 아직 저 외에 본 적이 없습니다. 하여 저는 타고난 운명을 거스를 바에야 그냥 작가된 도리로서 저 매력의 정체를 낱낱이 해부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고 나름의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혹자는 제가 평소에 작가님과 교류가 없는 것도 아닌데 직접 물어서 확인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혹자여,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랍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도 있는 법이에요. 주문 많은 요리점에 찾아가 대뜸 이 집 요리의 맛의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면 따귀나 안 맞으면 다행이라고요.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로 다음 회차를 기다리는 나날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마침내 저 스스로를 고뇌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운명의 그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단 두 글자짜리 흔하디흔한 단어였으나 저는 이것을 석 달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어요.

 

*

 

문제의 단어는 11회에 등장했습니다. 11회의 소제목은 고양이와 회색의 방랑자와 작가 (5)예요.

여기서 마흔두 번째 문장을 보시죠. 후, 조금 긴장되네요.

 

운전석 옆으로 조풍의 깁스한 팔이 나오더니 좌우로 흔들렸다. 미안!

 

여느 때처럼 빠르게 텍스트를 훑던 제 눈이 마지막 단어에서 멈칫했습니다. 미안!

미안…?

미아안???

이를 처음 접했을 때 솟구친 감정은 카오스 그 자체였습니다. 제가 상식처럼 받아들였던 것들이 와르르 붕괴되고 있었어요. 일종의 의미 과포화 상태가 되어 네 살배기만큼도 어휘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이게 뭐지? 미안? 미안이라면… 미안하다고 할 때의 그 미안?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어…?

아직 무슨 상황인지 납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설명해드리자면 위 대사는 조풍이라는 인물이 한 거예요. 짐칸에 타고 있는 주인공 강미호에게 자신이 운전을 쾌적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한 것입니다. 깁스한 팔을 좌우로 흔든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그렇다면 제 상식으로는 이런 식으로 써야 마땅했겠지요.

 

[1]

운전석 옆으로 조풍의 깁스한 팔이 나오더니 좌우로 흔들렸다.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또는 이렇게.

 

[2]

운전석 옆으로 조풍의 깁스한 팔이 나오더니 좌우로 흔들렸다.

“미안!”

 

그런데 [1]을 다시 읽어보세요. 뭐랄까… 너무 태평하지 않습니까? 일촉즉발의 급박한 상황인데 변사 역할을 하던 화자가 갑자기 템포를 늦춰 “이것은~ 미안하다는~ 뜻이었던~ 것이었던~” 하고 질질 끄는 뉘앙스마저 느껴집니다.

[2]는 어떤가요? [1]보다는 한결 낫군요. 하지만 이 역시 거추장스럽습니다. 이미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여기다 또 “미안!”이라고 하는 건 동어 반복으로밖에 안 보이지요. 그렇다고 “미안!”을 빼버리면 독자들이 깁스한 팔을 좌우로 흔드는 행위의 의미를 얼른 파악하기 곤란하므로,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말보다는 행위를 지워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요.

 

[3]

운전석에서 조풍이 외쳤다.

“미안!”

 

흠…. 조금 깔끔해졌나요? 하지만 1회부터 차근차근 읽어 오신 분이라면 조풍이 (1회부터 등장하진 않지만) 어떤 인물인지 아실 테고 [3]보다는 [2]처럼 삶의 순간순간마다 멋과 흥이 넘쳐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동의합니다.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4]

조풍이 깁스한 팔을 운전석 옆으로 내밀어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하다고?’

 

작은따옴표는 언제나 강미호의 것이지요. 조풍은 조풍대로 멋스럽고 상황은 여전히 급박하며 의미는 무리 없이 전달되었습니다. 개중에 제일 낫지 않은가요? 그럼 최초의 문장을 이것과 비교해보지요.

 

운전석 옆으로 조풍의 깁스한 팔이 나오더니 좌우로 흔들렸다. 미안!

 

조풍이 깁스한 팔을 운전석 옆으로 내밀어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하다고?’

 

음, 원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네요.

네? 방금 제가 뭐라고 했죠? 아뇨, 원전 말고요.

손색이 없다?

손색이 없어…?

고친 것이 응당 더 나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애초에 제가 이 부분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선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고 그 때문에 길고 긴 고뇌와 번민의 나날을 보냈던 것인데 갈고 다듬고 덧붙인 결과가 원전과 비등비등하다고요?

아니죠. 솔직히 말하면 원전이 더 낫습니다. 새로 고친 문장은 보면 볼수록 괜히 구질구질해 보이기까지 하네요.

그러니까 이건 이상한 일입니다. 이게 왜 이상한지 경제학적 관점에서 설명해볼까 합니다. 아… 갑자기 너무 학술적이라고요?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별 얘기 아닙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경제학은 단순히 경제에 국한된 학문이 아니에요. 제니퍼 코넬리의 사랑을 쟁취하는…이 아니고, 제한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탐구하는 학문이지요. 그 왜 <세속의 철학자들>이라는 책도 있잖아요? 여기 나오는 이른바 ‘세속의 철학’이 바로 경제학이거든요. 이는 즉 경제학을 아무 데나 갖다 써도 아주 큰 잘못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경제학이 소설과 무슨 상관인지 좁쌀만 한 당위를 설명하려고 방향을 틀었다간 가뜩이나 긴 이야기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삼천포로 빠질 것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요원해질 테니 그것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 야심작인 <이나경 어쿠스틱>을 통해 다루기로 하고 당장은 딱 필요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그것도 꽤 길겠지만 쉽게 풀어 쓰느라 긴 거니까 마음 편히 읽으셔도 돼요. 아마도.

 

혼란을 틈타 잠시 광고…

 

흠흠!

지금은 아니지만, 저희 숙모님 말씀에 따르면 예전 초등학생(aka. 국민학생)들은 길쭉한 책상 하나를 짝꿍과 나누어 썼다고 합니다. 어떤 풍경이었을지 저는 감히 상상도 못 하겠네요. 아무튼 1책상 2학생 체제 하에서 우리는, 핫 아니 그들은! 영역 다툼을 했다고 해요. 책상에 금을 긋는 식으로요. 그렇게 점잖게 영역을 확보한 뒤 아니꼬운 녀석의 코 묻은 소맷자락이라도 넘어올라치면 고함을 빽 지르며 오만 신경을 긁어놓느라 너도 나도 공부는 뒷전이고 학교가 파할 때까지 파수병 노릇이나 하다가 썰물처럼 교문을 빠져나가는 일상을 보냈다지요.

책상을 가르는 분단선은 짝꿍이 누구냐에 따라 위치가 조금씩 달랐지만 그래도 얼추 중간쯤에서 균형을 유지했을 겁니다. 아무리 모진 양아치를 만났어도 상대가 교과서 펼칠 공간은 남겨주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합의 하에 서로 만족스러운 균형이 도출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분단선을 ‘효용가능경계’라 합니다.

우리가 재화를 소비하면서 얻는 만족을 경제학에서는 효용(utility)이라고 하므로 ‘효용가능경계’란 책상 하나를 남김없이 쓴다고 할 때 짝꿍 둘이 최대한으로 만족할 수 있는 분단선이겠지요.

너무 쉽죠?

그럼 이번엔 불량배와 샌님의 조합을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불량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분단선이 조성되었겠지요. 그런데 이 녀석이 책상에서 하는 일이라곤 엎어져 자는 것뿐입니다. 엎어져 자도 자기 영역이 한 뼘쯤 남는다고요. 반면 옆자리 샌님은 교과서도 펼치고 공책도 펼치고 필기하느라 필통도 올려놓고 그러다보면 자리가 한참 부족한 상황이지요.

샌님은 삼칠일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자기 영역을 조금 넓혀 보았습니다. 불량배는 자느라 몰랐지요. 다음날 샌님이 조금 더 넓혔어요. 여전히 불량배는 알지 못했고요.

이것을 ‘파레토 개선’이라 합니다.

‘파레토 개선’이란 하나의 자원배분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가지 않게 하면서 최소한 한 사람 이상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샌님이 더 만족했고 불량배는 손해를 보지 않았지요. 책상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경계가 불량배의 팔꿈치에 이르렀습니다. 샌님 입장에서는 자기 자리가 조금 더 넓었으면 좋겠지만 불량배의 수면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이처럼 ‘파레토개선’이 불가능한 상태, 즉, 정말 할 만큼 해서 이제부터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가도록 하지 않고는 어떤 한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을 ‘파레토 최적’이라고 해요.

자, 이것으로 필요한 얘기는 다 했습니다.

 

*

 

부끄럽지만 저는 한때 궁극의 소설을 쓰겠다고 꿈꾼 적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소설 말이에요. 그러나 굳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무언가를 본 적 있으십니까? 여러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저건 완벽하다고 칭송받을 무언가를 말이에요. 네? 고양이? 심지어 고양이조차도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답니다.

군 복무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쩌다 무슨 롤링페이퍼 같은 걸 중대 인원들끼리 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라고 별반 다를 것도 없이 80명 정도의 인원이 익명으로 서로에 대해 바라는 점이나 덕담 등 하고 싶은 말을 선택적으로 남기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저는 제 얘기가 삐뚤빼뚤 적힌 A4용지를 받아보게 되었지요.

예상하셨겠지만 대개 호평이었습니다. 그러나 쫓기듯 휘갈긴 필체로 쓰인 메시지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어요.

“나는 별로임. 다들 좋아하니까.”

이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솔직하고 배배 꼬인 녀석 덕분에 처음 깨달았거든요. (그렇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저를 사랑해주기를 바랐어요.)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면 할수록 바로 그 이유로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뜻이니까요.

결국 완벽은 허상인 셈이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완벽한 소설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임을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자고요.) 그렇다고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어리석고 한심한 일은 아니겠지요.

특히 제가 매달린 건 문장 강화였습니다. 가공할 만한 시간을 문장을 다듬는 데 소비했어요.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지키고 비문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적확한 단어를 골라 의미 전달에 혼동을 빚지 않도록 배열해 누가 고치더라도 더 이상은 개선되지 않을 문장을 쓰고 싶었거든요. 누군들 안 그러고 싶겠냐만…. 하여간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저는 매 문장을 최적으로 쓰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퇴고’의 말뜻을 아시나요? 당나라 시인 한유가 시 짓기에 골몰할 때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가 나을지 ‘문을 미네’가 나을지를 두고 고민에 잠겼다고 해요. 문장을 가다듬는다는 표현인 ‘퇴고’가 여기서 유래했지요. 결국 제3자가 나타나 ‘두드리네’가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결정되긴 했다지만 둘 중에 뭐가 더 낫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떤 경지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그냥 취향의 문제라는 거예요.

아까 제가 작가처럼 읽는다고 했었지요? 흡사 자신이 글을 쓰는 듯한 기세로 악랄하게 읽는다고요. 이것은 제가 소설을 읽을 때마다 무의식중에 글쓴이의 문장을-주로 어순을-제 취향대로 바꿔가며 읽는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소설이 머릿속에서 한결 친숙한 문체로 형상화되는 거예요. 이것은 제 나름의 ‘파레토 개선’ 과정입니다.

물론 소설의 모든 문장을 제 식대로 바꿀 수야 없지요. 어? 나라면 이렇게 썼을 텐데, 하는 문장들이 한 페이지에 네댓 개쯤 그냥 툭툭 눈에 밟히는 거예요. 사실 그것들은 아무 문제도 없는, 다시 말해 그 작가 기준에 파레토 최적이 되도록 조성된 문장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걸 보면 저는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글쓴이가 왜 이렇게 썼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제 관심이 이야기에 빠지기도 전에 다른 데로 먼저 빠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네, 바로 지금처럼요. 저는 장편소설의 리뷰에서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걸까요.

자! 분위기를 쇄신할 겸 다시 초등학교 교실을 떠올려 보시지요!

이 예시가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어떤 아름다운 균형점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책상마다 최적의 분단선이 다르듯이 각자의 선호도 다르기에, 제게 만족스러운 문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저는 저를 믿었던 것만큼이나 다른 작가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시켜줬고….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이 없다 하지만 물론 여전히 못 쓴 문장과 틀린 문장은 존재합니다. 반대로 잘 쓴 문장과 정확한 문장도 존재하지요. 또 여전히 존재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도끼눈을 뜨고 소설을 읽는 제 습관입니다. 그게 지금의 이 외롭고 슬픈 사태를 초래한 주범이에요.

이제야 본론입니다.

 

*

 

앞서 시시콜콜 말씀드린 제 독서법(이라지만 사실은 음흉한 편집증적 취미 생활)을 충실히 이행했을 때, 지금까지의 패턴은 이러했습니다.

 

1. 문득 (내가 보기에) 묘한 점을 포착함.

2. 내 입맛에 맞게 고쳐봄.

3. 한결 관대해진 눈으로 원래 문장을 훑으며 중얼거림 “이렇게도 쓸 수 있군.”

4. 뒷부분의 독서를 이어나감.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번엔 달랐지요.

“이렇게도 쓸 수 있군”(흡족)이었어야 했을 3단계가 글쎄, “이렇게도 쓸 수 있어?”(경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후 4단계를 거의 기계적으로 답습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11회의 미안! 에 머무르게 되었지요.

미안!

오직 이 두 글자(와 느낌표 하나)만을 생각한 밤이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왜 이러는 건지. 풋사랑은 아닐 테고.

미안!

어쩐지 요사이 매사에 부쩍 의기소침해지고 심심찮게 주눅이 든다 했더니….

미안! 미안!

어째서 미안! 입니까? “미안!”만 됐어도 지금처럼 괴롭진 않았을 텐데요.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다 큰 어른이 징징대는 것도 보기 흉하겠죠. 좋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미안! 이라면 진력이 나는 정도를 넘어 그 생김새조차 수상하게 여겨지는 도착적 단계에 이르렀기를 기대하며,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시 봅시다.

 

운전석 옆으로 조풍의 깁스한 팔이 나오더니 좌우로 흔들렸다. 미안!

 

조풍이 깁스한 팔을 운전석 옆으로 내밀어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하다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저라면 아래 문장처럼 썼을 겁니다. 위 문장처럼은 생각조차 못 했겠고요. 그런데 보세요,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위의 문장이 더 간명하지 않습니까? 긴박한 순간에, 휙휙 읽어오던 속도 그대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스리슬쩍 넘어가도 위화감을 못 느낄, 그야말로 천의무봉의 솜씨였어요. 적절하다 못해 절묘할 지경입니다.

칭찬이 너무 과해 도리어 믿음이 안 간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마음 같아선 한국 현대문학사 일백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명명하고 싶다고요. 그렇게 해버리면 그때부터는 정말 아무도 안 믿어줄 것 같아서 꾹 참고 있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부들부들….

하, 좋습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부터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째서 이 대목이 그렇게나 파격적이고 위대한지를.

 

*

 

이 소설에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여럿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강미호입니다. 단순히 강미호가 시골에 내려와 이런저런 사건을 보거나 듣고 때로는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화자가 강미호를 주인공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강미호는 이계리라는 기이한 장소를 소개하는 인물로 소모될 수도 있었습니다. 몇몇 소설이나 영화가 그런 식으로 도입부를 구성하지요. 그런 구성이었다면 강미호는 괴물에게 혼쭐이 나서 이계리를 떠나거나 떠나기도 전에 무참히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그러나 1회가 시작되고 몇 문단을 채 읽기도 전에 독자들은 이것이 강미호의 이야기임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바로 속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montesur 작가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속마음을 표현했어요.

가장 먼저 나오는 속마음은 이것입니다.

 

‘이제 9월인데 왜 이렇게 춥지? 보일러를 켜야 하나?’

 

뭐, 여기서는 별다른 인상을 못 받으셨겠죠? 작은따옴표로 둘러싸인 속마음에서는 화자와의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내 비록 네 속마음을 알지만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냐, 라는 듯한 거리감이요. 즉 아직까지는 ‘죽이기에는 조금 껄끄러워지긴 했지만 마음먹고 죽이려 들면 못 죽일 것도 없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니 독자들도 긴가민가하는 눈초리로 독서를 이어나가겠지요.

그러다 마침내 아래의 구절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안심합니다. 아, 강미호가 주인공이구나!

 

무절제한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는 것도 훌륭한 작가다운 행동 양식임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망상의 타래를 이어 가는 것도 그 사례 중 하나임은 분명하고 말이지…

 

(아, 강미호가 주인공이구나!)

화자가 인물과의 거리감을 확 좁혀 그 인물의 속마음을 대변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강미호가 작품 내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권리를 획득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녀는 언제든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니까요. (반면 이계리에서 줄행랑침으로써 퇴장할 가능성은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다만 속마음을 통해 이미 주요 배역 확정 플래그가 세워졌으니 장편 초입부터 제거되지는 않겠지요. 당분간 안심하고 강미호에게 이입해도 될 테고요.

한편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다른 인물의 속마음이 화자에 의해 서술되기도 합니다. 그런 장면들에 강미호는 없겠지요. 이 속마음들은 인물들에게로 이입을 유도하기보다는 강미호가 곧 직면할 사건에 대한 이해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기능하는 편입니다.

대신 강미호가 등장하는 순간부터는 따옴표가 씌워져 있든 그렇지 않든 모든 속마음을 강미호가 전유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화자는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으로도 모자라 속마음까지 묘사해요.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미안! 이 툭 등장하는 것입니다.

미안! 의 정체가 대체 뭘까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 조풍의 속마음이다.

2. 미호의 속마음이다.

3. 조풍의 대사이다.

4. 미호의 대사이다.

 

그밖에 서너 가지 가능성을 더 꼽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실수다, 별 생각 없었다, 이렇게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인간이 있다니 등등은 발전적이지 않잖아요.

 

1. 조풍의 속마음일 경우:

속마음은 강미호의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유독 이 순간에만 화자가 조풍의 속마음을 대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사과의 제스처는 취했고 상황은 급박하니 미호가 듣든 말든 속으로만 외쳤다고 보면 얼추 설명은 됩니다. 그러나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럴 이유는요?

 

2. 미호의 속마음일 경우:

속마음은 늘 강미호의 것이었지요. 이 경우에도 조풍이 손짓하는 걸 보고 미호가 멋대로 의중을 간파해 (저건) 미안(이구나)! 이라고 속으로 외쳤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미호의 목소리로는 읽히지 않네요. 미안? 이었다면 모를까.

 

3. 조풍의 대사일 경우:

사실 저는 읽으면서 이것이 조풍의 대사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미안! 이라고 할 때 조풍의 목소리가 확실히 강미호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큰따옴표도 없이 어떻게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까요? 미스터리입니다.

 

4. 미호의 대사일 경우:

이건 가장 말이 안 되는 경우입니다. 미안한 사람은 미호가 아니라 조풍이니까요. 미호가 외칠 리 없는 대사입니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려 해도 이것만큼은 못 고르겠어요. 그러니 이건 빼겠습니다.

 

억지스러운 가능성을 제하면 결국 미안! 은 조풍의 속마음이거나 조풍의 대사일 가능성만 남습니다. 둘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지요. 하나는 속마음에 관한 소설의 내재적 원칙을 무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일반에 통용되는 문법을 무시한 것이니까요.

 

*

 

이제야 2002년도 영화 ‘스파이더맨’ 얘기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어때요, 지금쯤 다들 보셨겠지요!

명배우 윌렘 데포는 이 영화에서 딱히 분장이 필요 없었던 악당 ‘그린 고블린’으로 분해 최적의 생활연기를 펼쳤는데요, 능력만 놓고 보면 이후 등장하는 다른 악당들에 비해 썩 대단한 편은 아니었지만 얼굴로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그런 무시무시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기회에 모처럼 스파이더맨을 궁지에 몰아넣게 됩니다. 생면부지의 아이들이 탄 케이블카를 구하든지 스파이더맨 자신이 연모하는 메리 제인을 구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못 할 상황을 세팅한 것이지요.

물론 스파이더맨은 양쪽 다 구합니다.

하지만 당시 극장에서 손에 땀을 쥐고 보던 저는 스파이더맨이 직면한 딜레마 앞에서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졌답니다. 영사기 문제가 아니라 절망감 때문이었어요. 하나를 구하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그 암담한 상황에 누가 양쪽 모두를 구하겠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멧돌 잡으러 갔다가 집돌 잃는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어쭙잖은 공명심에 둘 다 구하려다가 하나도 못 구하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라도 구하는 게 어디냐고요. 그린 고블린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니 저렇듯 의기양양하게 웃을 수 있었겠지요.

물론 양쪽 다 보란 듯이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만….

그런 뒤에 치졸한 악당 그린 고블린은 주인공에게 처절하고도 철저하게 응징을 당하며 급기야 (면피 목적의) 불의의 사태로 하나뿐인 목숨마저 잃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손에서 거미줄이 나오지도 않고 쫄쫄이를 입고 돌아다니지도 않지요.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평범의 범주에 속할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면서 그린 고블린이 제시한 양자택일의 시련과 유사한 상황을 왕왕 겪곤 해요.

이를테면 위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하나는 속마음에 관한 소설의 내재적 원칙을 무시했고, 다른 하나는 사회 일반에 통용되는 문법을 무시했어요. 미안! 을 그대로 살린다는 전제 하에 반드시 어느 한 가지 원칙은 어기는 셈이 됩니다. 절충안은 없어요.

제가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이 시점에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냥 미안! 을 버리면 되잖아?’

글쎄, 앞에서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봤지만 다들 신통치 않아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요…. 몰랐다면 모를까, 제가 이미 미안! 의 파괴력을 알게 되었으니 다운그레이드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완벽을 추구하고 있으니 파레토 개선에 힘써야지요. 만약 여러분 중에 누구라도 미안! 보다 나은 대안을 알고 계시다면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깜냥으로는 이보다 나은 문장을 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그러니 새로운 제보가 있기 전까지 미안! 은 살리기로 하겠습니다. 그 대가로 저는 원칙 하나를 죽여야 해요. 합리적 인간을 표방하는 저는 이제 과연 어떤 원칙을 묵살하는 것이 덜 손해일지를 연구해볼 생각입니다.

 

*

 

운전석 옆으로 조풍의 깁스한 팔이 나오더니 좌우로 흔들렸다. 미안!

 

우선, 미안! 이 조풍의 속마음이라고 해봅시다.

조풍은 팔을 흔들었고 강미호는 팔을 흔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이 제스처가 무슨 의미였는지 확실히 아는 건 조풍과 독자들뿐이에요. 결국 미안! 은 앞선 제스처에 관하여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미호가 조풍의 제스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의미 있는 장면은 아니었으니 강미호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요. 솔직히 저는 강미호가 조풍의 제스처를 보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 대목이 과연 독자와의 약속-‘속마음은 강미호의 것’이라는-을 파기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앞으로 저를 비롯한 1천만 독자들(추정)은 강미호의 따옴표 없는 속마음이 나올 때마다 멈칫할 텐데요. ‘어디 보자, 이번엔 누구의 속마음이지?’라면서 말이지요. 결국 한 차례의 날렵하고 매끄러운 독서 경험을 위해 앞으로 있을 수많은 헛된 멈칫거림을 야기한 셈입니다. 되로 받고 말로 내주는 결과네요. 썩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미안! 이 조풍의 실제 대사라고 해볼까요?

조풍은 팔을 흔들었고 독자는 그것을 목격했습니다. 강미호가 보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안! 이라고 외치는 조풍의 목소리는 확실히 들었을 것입니다. 독자들도 들었고요. 커뮤니케이션이 무난하게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미안! 을 아무리 뜯어봐도 실제 대사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겠지요. 사실 이것을 조풍의 입이든 아니면 다른 누구의 입이든 실제로 발화된 대사라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큰따옴표가 없는데 어떻게 대사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을 대사로 봐야 한다면 아마도 그 유일한 이유는 이것이 너무나 대사처럼 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백하건대 저에게 미안! 은 처음부터 대사였습니다. 속마음이 아니었어요. 지금껏 힘겹게 이어온 지난한 글들, 그러니까 라쇼몬에 관한 독후감과 얼치기 경제학 강의와 자랑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군대 이야기와 뜬금없는 슈퍼히어로 영화 줄거리 유출 등등은 제가 미안! 을 대사로 인식해버린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해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어요. 그러나 장렬히 실패했습니다.

처음 11회를 읽었을 때, 문장의 내용보다 구조를 선제적으로 살피는 데 단련이 된 저조차도 별다른 흠결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미안! 을 아주 자연스럽게 조풍의 대사로 읽고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어요.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로부터 몇 줄 더 읽은 뒤였습니다. 어딘지 께름칙하고 심란한 기분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뭔가 있다는 직감에 의거해 앞 문장을 탐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큰따옴표가 없더군요. 작은따옴표도 없었고요. 대사도 아니고 속마음도 아닌, 예사롭기 그지없는 두 글자가 찬란한 후광을 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라쇼몬’의 독후감에서 소개했듯이 저는 스스로 부여한 제약들을 하나씩 둘씩 극복하며 실력을 키워왔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힌 이야기인데, 저는 직장 2년차인 2008년 6월부터 소설을 써보겠다고 진지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걸로 뭘 해보려던 건 아니었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요새 재미있는 책 좀 추천해달라고 청하여 읽은 책이 단순히 실망스러운 수준을 초월해 “이럴 거면 내가 쓰겠다.” 하고 분개하며 달려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대학 내내 문학 동아리에 몸담았으면서도 그러나 막상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몰랐던 저는 백일장의 형식으로 신중히 물꼬를 텄습니다. ‘보조개에 관한 글을 쓰세요.’라고 스스로 주문한 것입니다. 다른 참가자를 모집하긴 했지만 별로 열의가 없어 보여서 그랬는지 리워드가 없어서 그랬는지(헉, 왠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저 혼자만의 백일장이 되었지요. 아뇨, 저는 외롭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완성한 소설은 ‘귀향’이라는 제목의 SF였습니다. 내용은 히스토리 채널 ‘고대의 외계인들’에서 흔히 볼 법한 것이었어요. 결국 보조개에 관한 이야기였지만요. 지금 생각하면 썩 잘 쓴 글은 아니므로 사후에도 그 소설이 공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후 저의 글쓰기는 쭉 그런 식이었습니다. 제2회 백일장은 ‘어느 폐쇄적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쓰세요. 회상 불허, 상상 불허, 들어오고 나가는 인원 없음.’이라고 또 스스로 조건을 걸었습니다. 마침 그 무렵에 소설 모임에 들어 다른 소설을 쓰게 되는 바람에 제2회는 저조차도 외면하게 되었고, 제3회는 영영 개최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소설 모임에서도 저는 매번 개인적인 과제에 도전했습니다. 2인칭으로 쓰다가 시점을 바꿔보자! 엽편을 연재해서 장편을 쓰자! 잡지 형식으로 장편을 쓰자!

제약을 넘었다는 성취감이 다음 글쓰기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더군요. 분명히 순기능도 있었지만 역기능 또한 뚜렷했습니다. 그게 말이죠… 제약이 점점 핑계가 되더라고요. 저 자신조차 이야기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안주하더라는 말입니다. “야,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냐?” 라고요.

분량도 장르도 소재도 사실은 전부 핑계였습니다. 그런 것들만 아니면 언제든 전대미문의 걸작을 써낼 수 있을 것처럼 주절댔지만 그냥 그런 것들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었어요.

그러다 4년 전에 슬럼프를 겪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도 이만하면’이라는 암덩어리를 적출해, 앞으로는 오직 이야기 본연의 재미만을 추구하리라 다짐했어요. 여전히 전대미문이나 걸작 같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멀었지만-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지만-그래도 스스로는 형편이 나아졌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는 어디서 백일장이 열린다는 소리가 들리면 만사 팽개치고 참여하고, 원고지 40매짜리 원고 청탁을 받았다고 에누리 없이 40매에 딱 떨어지도록 송고하는 것으로 은밀한 쾌감을 누리며, 심지어 이번에는 ‘어반 판타지’ ‘공모전’ ‘200매 이하’의 제약 3종 경기에도 기웃거리는 실정입니다. 크, 부끄럽군요. 그래도 그걸 부족한 완성도의 알리바이로 삼을 생각은 없으니 뭐 괜찮겠죠. (코쓱)

결국 저를 키운 것의 5할가량이 (길잡이 역할을 한) 제약이었다면 나머지 5할은 (고정관념으로 작용하는) 제약들을 덜어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허덕이고 있었는지는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만, 일례로 ‘센티멘털리즘’만 보셔도 제가 편협한 글쓰기에 갇혀 있었다는 걸 아시겠지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고정관념이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어떤 것을 놓고 볼 때, 그것이 타파해야 마땅한 고정관념인지 그래도 놓지 말아야 할 기본 소양인지 여러분은 분간할 수 있으십니까?

‘센티멘털리즘’ 같은 어휘를 예컨대 위촉오 삼국이 대립하는 배경의 소설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고정관념 때문입니까, 아니면 기본 소양 때문입니까? 왠지 그렇게 쓰면 어색할 줄 알고 안 썼는데 사실은 써도 생각만큼 어색하지 않고 도리어 참신해 보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잘 모르겠다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센티멘털리즘’을 쓴 사람이 아쿠타가와가 아니고 동아리 후배였더라도 이렇게까지 납짝 엎드려 제 능력 부족을 한탄했겠냐고요. 어쩌면 그 후배를 조롱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21세기의 아쿠타가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후배는 수치심에 짓눌려 절필을 선언한 뒤 수의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바꾸었을지도 모르지요.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운 결말이긴 하네요….

어쨌든 아쿠타가와는 제 후배가 아닐 뿐더러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닙니다. 이래저래 본받을 부분이 많은 글을 쓴 작가이지요. 그래서 저는 아쿠타가와의 기본 소양을 논하기보다는 제 고정관념에 문제가 있다는 방향으로 사고를 선회했습니다. 그러자 (아직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음에도) 시야가 트인 듯한 기분을 느낀 것입니다. ‘앞으로 나는 더 잘 쓸 수도 있겠다.’ 하고요.

 

*

 

이번에는 미안! 을 놓고 보지요.

휴, 이 문제는 정말이지 만만치가 않습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montesur 작가님은 작가로서 참 배울 점이 많습니다. (다시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인간적으로 배울 점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떠오르는 내용을 막힘 없이 술술 쓰는 것도 그렇고, 그게 또 술술 읽히는 것도 그렇고… 하여간 술술이지요.

그러나 미안! 에 대해 작가님에게 묻는다면 별로 귀감이 될 대답은 해주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아, 이때 술처마시느라 정신 없어서 이렇게 썼네요.”, 내지 “술 마시면서 고쳐볼랍니다.”라고요. 에… 하여간 술술이에요.

즉 미안! 은 별다른 작가적 야심을 드러낸 부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런 장면도 아니었고요. 아예 고민한 흔적조차 없어요. 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쓰였다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 대로 쓰고 즉각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고요. 그런데 제가 아쿠타가와의 ‘센티멘털리즘’에서 받은 인상이 이와 꼭 같았습니다. 그냥 쓰고 싶어서 썼는데 왜 썼냐고 물으면 쓰고 싶어서 썼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게 바로 아무 제약도 없는 글쓰기가 아닙니까!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그렇게 하지 않는, 한편으로는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경지! 무림의 고수!

그런데 말입니다. 그 제약에 맞춤법도 포함시켜야 할까요?

맞춤법은 말하자면 최후의 보루가 아닌지요? 기본 소양 중의 기본 소양 아닌지요? 이야기가 자유롭게 뻗어나가기 위해서라면 맞춤법이라는 중력마저도 거추장스럽게 여겨져야 할까요? 이로부터 벗어나 무중력의 자유를 만끽하려다가 자칫 우주 저편으로 멀어져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어디엔가는 매여 있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어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이토록 긴 리뷰를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한글맞춤법>은 문자체계로서의 한글 자모를 확립하고 그것으로써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으로, 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공포함으로써 1933년 10월 29일에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이후 수차례 개정안이 나왔으며 현행 <한글맞춤법>은 <표준어규정>과 함께 1989년 3월 1일부로 시행되었습니다. 특히 따옴표는… ‘부록’에 규정되어 있네요.

그런데 맞춤법을 꼭 지켜야 하나요?

오래 전에 동아리의 누군가가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소설을 쓰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고 대부분 시를 썼으며 그 후배도 마찬가지로 시를 썼습니다. 그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자기 마음대로 쓴 시를 선보였어요. 지성의 전당에서 수학하는 대학생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철자며 띄어쓰기며 모든 게 엉망진창이더군요. 언어영역 시험을 어떻게 치렀는지 궁금해질, 당최 어쩌다 시심에 눈을 떴는지도 궁금해질 그런 종류의 엉망진창이요. 시에 대해서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마는 저조차도 그 후배의 시가 아주 질이 낮다고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선후배들이 아무리 타이르고 다독여도 그는 맞춤법을 익힐 뜻이 없어 보였지요. 결국 그 후배는 동아리를 탈퇴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고고한 문학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심기를 내비치고 뛰쳐나간 것이라 우리는 서운함보다는 후련함이 컸어요. 그리고 그 후배는 현재 수의사가 되어…. (농담입니다. 회계학 전공이었어요.)

그때 저는 그 후배가 어리석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딱히 그 생각이 극적으로 변한 건 아닙니다만 상황이 조금 묘하게 되었네요. ‘맞춤법을 꼭 지켜야 하나요?’에 관한 문답을 찾아 지식iN을 뒤적거리고 있는 걸 보면요.

역시나 내가 궁금한 건 남도 이미 궁금했다는 지식iN의 법칙에 따라 그에 관한 문답을 어렵지 않게 찾았습니다. ‘제가 뭐 국어를 싫어해서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건 아니고요’ 운운하는 질문 내용은 됐고, 서둘러 답이나 확인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법규와 현실이 서로 맞지 않은 경우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노조와 기업주가 갈등을 벌일 때 준법투쟁을 한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법을 지키며 투쟁을 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업체의 서비스를 받는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게 됩니다.

이런 일을 치르고 나면,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법규를 지키지 않고 지냈던 것이 오히려 편리하고 현실에 맞는 일이었구나, 라고…. 그러면, 법규를 따르는 것과 현실을 따르는 것,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합니까? 아니면 현실에 맞게 법규를 다듬어야 하나요?

맞춤법에 관해서도 늘 이와 같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맞춤법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말의 변화 가능성을 가로막기 때문에 국어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고 정해진 체계가 없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국어를 사용하는 의사소통에 큰 혼란이 오겠지요?

학교 교육을 통해서 맞춤법을 배우고 그 질서를 유지시켜 나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대간, 집단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글 맞춤법과 같은 동일한 언어 체계를 가져야만 보다 원만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맞춤법의 필요성도 여기서부터 비롯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은 채택답변수 51회에 빛나는 지식iN 중수의 답변입니다. 요약하자면 동일한 언어 체계를 가져야 원만한 의사소통을 이룩할 수 있으며, 정확히 그러한 목적을 위해 맞춤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이겠군요.

아, 네, 원만한 의사소통이라고요….

거꾸로 말해, 이어지는 맥락을 통해 이미 원만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구태여 맞춤법을 지키느라 애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일까요? (의사소통 면에서 파레토 최적인 상황이니까요.)

맞춤법 순응자인 제가 보더라도 이것은 맞춤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되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문장이 있다면 맞춤법을 꼭 지켜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제가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될지, 또한 그렇게 해석한 것을 실제 문장을 쓸 때 적용해도 될지, 그렇게 적용된 문장을 읽은 독자들이 소모적인 시비를 걸지나 않을지, 그럴까봐 미리부터 괜한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좋을지, 새롭고도 개인적인 의문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그러나 정해진 답이 있다기보다는 각자의 취향이나 성향 및 가치관과 포부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내릴 수 있는 종류의 답일 듯싶기에 여기서 선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신에 제 마음이 기울어진 쪽이 어디인지 함구하려 합니다. 아무렴 제 생각보다는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 더욱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어느 한가한 주말에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는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흔들 찬찬히 생각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최후까지 아끼고 가꿀 덕목이 있을지, 있다면 그게 무엇일지, 비단 소설에 국한할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삶에 있어서도 과연 그런 게 있을지, 법과 질서와 사랑과 평화, 빛과 소금, 또는 꿈과 희망…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 얼마나 얽매여야 할지를 말입니다.

자, 어떠셨는지요? 저는 아직도 ‘이계리 판타지아’가 단 두 글자만으로 촉발한 이 사태를 한국 현대문학사 일백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명명하고 싶은데 지금이라면 여러분도 마음이 조금은 동하지 않습니까? 조금은 말이에요. 조금은.

음….

침묵이 감도는 바로 지금이야 말로 ‘그것이 알고 싶다’ 분위기를 풍기는 엔딩 시그널이 깔리고 타이틀 롤이 올라가기에 적당한 타이밍이겠지요.

지금까지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우려한 만큼 지루하게 읽히지 않았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

 

p.s.

그래도 리뷰인데 소설에 관해 어느 정도는 다루었겠지, 하고 내심 기대하셨을 montesur 작가님께는 무엇을 기대하셨든 그에 못 미치는 엉뚱한 글을 쓴 데 대해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다른 분들이 중간에 포기하셨더라도 작가님만큼은 끝까지 읽으셨을 거라고 굳게 믿으므로 저는 이곳 그늘진 제 방에 다소곳이 정좌한 채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그 말을 하렵니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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