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손지상 작가님과 모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의 이야기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저는 모에란 어떤 만만함이라고 이해했어요.
모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완벽함에 대해 생각해 봐요. 완벽은 어떤 상태인가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상태. 그렇다면 완벽한 것과 우리는 어떤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완벽한 것과 상호작용 하는 순간 완벽한 것이 아니게 되니까요. 상호작용 하는 나에 의해 뭔가가 더해진, 혹은 뭔가가 부족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완벽한 것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완벽한 것은 완벽한 것 만의 매력이 있지요. 그렇지만 그 매력은 숨막힐듯한 매력입니다. 일종의 스탈당 신드롬1. 단 한번의 붓터치조차 허락하지 않는 완성된 유화를 떠올려 보세요. 혹은 조각을요. 미술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경외감과 숨막힘을 불러오는 대작들을요. 이들은 완벽하고,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색해 지지요. 이것은 경외에 대상입니다. 매력과 공포가 섞여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완벽한 것에서 공포를 느낍니다.
다시 모에로 돌아갑시다. 일본 서브컬쳐에서 등장한 이 단어는 케릭터의 특정 속성에 과도하게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그렇다면 완벽한 케릭터에게 모에를 느낄 수 있을까요? 쿨데레를 생각해 봅시다. 이른바 쿨-뷰티. 조용하고 차분하고, 쿨한 케릭터. 하지만 나에게 데레, 즉 얼굴을 붉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내보입니다. 더 정확히는 완벽하게 작동하는 기계같은 케릭터가 내 앞에서는 실수를 저지르고 헛소리를 하고 고장난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그렇기에 드디어 사랑할수 있는 출발선에 서게 되죠.
약간은 삐뚤어진 이야기지만, 우리는 태생적으로 우리보다 잘난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는게 아닐까요?
100% 정확도를 보이는 인공지능이 있다고 상상해 봐요. 이 인공지능은 완벽하죠. 그렇다면 99% 적중률을 보이는 인공지능은요? 완벽에 가까운 것이지 완벽한건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99%나 파악하고 있나요? 아뇨 어쩌면 훨씬 더 낮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돌아가, 우리보다 더한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용납하지 못하고 질투심에 가득찬 눈동자로 실수를 잡아내려 노력할까요?
그렇기에 예외처리반, 더 정확히는 고의로 틀림을 만들어내는 직업이 미래에는 진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재밌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