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본 작품의 치명적인 스포일러, 그리고 야마자키 코레(ヤマザキコレ)의 만화 <마법사의 신부(魔法使いの嫁)>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은연못 작가님의 <굶주린 도시>는 좀비가 창궐하여 멸망해 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이 죽으며 생기는 공허함, 내지는 공복감은 좀비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해소되지 않는 굶주림을 안겨줄 것이고요. 그 때문에, 인간 역시 좀비처럼 인육을 먹기에 이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후일 ‘준’이라고 이름 불리게 되는 작품의 주인공도 어딘가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준’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면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 행동 묘사, 결여된 상식, 모호한 설명, 사실은 쌍방향의 의사소통이 아니었던 대화, 군데군데 대놓고 드러낸 결정적인 대사나 지문 등. 정답을 가리키는 꽤 많은 단서가 곳곳에 심겨 있었는데도, 독자가 정답인 듯 오답인 결론을 내리게끔 추론을 유도한 것이죠.
꽤 좋은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처음 읽었을 때는 저 역시 당했고요. 다시 읽어나가면서는 좀 더 치밀하게 숨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오히려 너무 깔끔해도 수상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미스리딩의 핵심은 이야기의 배경과 초반의 독백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에 있기 때문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발생하고 인간마저 인간을 사냥하여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생존자들은 ‘사냥꾼’처럼 폭력적인 광기에 휩싸이거나, ‘그녀’처럼 낙관적인 척 자신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준’처럼 극심한 충격으로 인해 심리상태가 거칠고 피폐해지거나, 기본적인 상식도 결여된 것처럼 인지기능이나 기억의 일부가 손실될 수도 있습니다. ‘준’의 독백에서 이상함을 느끼더라도, 곧장 작품 내 상황과 연결 지어서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넘겨짚게 됩니다. 나름대로 성공적인 트릭인 셈이죠.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만화인 야마자키 코레의 <마법사의 신부>에는 묘지나 교회를 수호하는 요정, 처치 그림(Church Grim)이 나옵니다.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의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묘지를 더럽히는 사악한 존재들로부터 묘지를 수호함과 동시에 죽음의 전조로 나타나 교회의 종을 울리는 존재라고도 합니다. 처치 그림은 다른 짐승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검은 개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마법사의 신부>에서 나타난 처치 그림, ‘룻'(Ruth, 히브리어 רוּת’)이 그러하죠.
그리고 ‘준’ 역시 수캐입니다. 둘은 자신이 사실은 개라는 진실을 잊고 있었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덧붙여서, 본래의 이름(‘룻’은 생전에 ‘율리스’였습니다.) 대신 새로운 이름을 받음으로써 누군가와 강하게 결속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그 상대를 지키려 하고, 위로해 주려고 하지요. <마법사의 신부>에서는 ‘룻’이라는 이름을 ‘동정심이 많은 친구’라고 풀이합니다.
‘룻’은 성경의 룻기의 주인공인 이방인 여인 룻에게서 따온 것으로, 룻기의 배경은 마치 <굶주린 도시>의 상황처럼 도덕과 율법이 무너졌던 시기였습니다. 이 외에도 룻기의 여러 부분이 <굶주린 도시>와 닮아있습니다. 특히 ‘준’과 ‘그녀’의 관계를 중심으로 되짚어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유대인 나오미는 기근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남편과 아들들을 잃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녀’는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이 벌어지자,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채 인간을 사냥했고 가족들을 잃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과 가족들이 있었던 지역으로 돌아옵니다.
룻은 (본인 의지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고향 모압을 떠나온 이방인 과부로, 당대에는 차별과 천대의 대상이었습니다. ‘준’은 (일반적인 개들보다 조금 똑똑할 뿐인) 짐승으로, 태어날 때부터 버려졌고 거둬진 뒤에도 도구로 쓰였습니다. 당시에 과부는 몸을 파는 것이 아니면 이삭을 줍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룻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준’은 다른 짐승처럼 고기를 먹는 것을 거부하고, 굶주림 속에서 겨우 연명하다가 ‘그녀’가 주는 옥수수를 받아먹습니다.
나오미는 이스라엘로 돌아갈 때 룻을 놓아주려 했지만, 룻은 오히려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며 따라갑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들에 대해 ‘준’에게 용서를 구하고 죽으려 하지만, 오히려 ‘준’은 ‘그녀’에게 살아감으로써 속죄하라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마법사의 신부>에 등장하는 ‘룻’을 연상시키는 장면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요정 처치 그림으로서 마법사인 치세(<마법사의 신부>의 주인공)에게 먼저 사역마 계약을 걸자고 권합니다. 이 계약은 서로의 수명을 공유하는 것으로, 치세가 죽는다면 자신도 마찬가지로 죽게 되는 형태의 계약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약을 먼저 내건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은 키메라를 만드는 실험 재료로 끌려갈 예정이었고, 이미 생전의 주인이자 여동생인 이자벨이 성불도 못 한 채 키메라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세와 처치 그림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말이죠. 결국 둘은 계약을 맺고 ‘율리스’는 ‘룻’이라는 이름을 얻어, 키메라를 해치워서 생전의 주인인 이자벨을 성불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여동생인 치세와의 시간이 끝날 때 만나러 가겠다고 이자벨에게 약속합니다.
‘준’과 ‘그녀’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준’이라는 이름을 ‘그녀’에게서 받았습니다. 이야기의 막바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옛 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사냥꾼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었습니다. ‘준’은 ‘그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평안에 이르는 길임을 알지만 고통을 두려워하여 속죄를 명분 삼아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준’은 사냥꾼들을 해치움으로써 ‘그녀’를 해방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합니다.
<마법사의 신부>에서 ‘룻’을 ‘동정심 많은 친구’라고 풀이했다고 설명했는데, ‘준’ 역시 사실은 정이 많고 사람에게 잘 의지하는 성격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를 해방하고, 다시 만나기 위한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이겠죠. 기회가 된다면, 둘이 다시 만나서 끝까지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너무 제가 아는 이야기를 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서 그럴 겁니다. 원래 좋은 이야기는 독자가 경험한 것이나 이전에 접한 작품을 연결 짓고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니까요. 좀비 영화를 개인적으로 그 특유의 비주얼 때문에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작품들에 연결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해석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게는 이 이야기가 충분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적어주신 작은연못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