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맞이하는 고결한 방법 비평

대상작품: 눈물을 마시는 새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Bebackin, 3시간전, 조회 3

『눈물을 마시는 새』(이하 『눈마새』)는 무엇에 대한 소설인가? 대하소설이 으레 그렇듯이 이 물음에 답하기는 까다롭다. 답변을 찾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대답다운 대답이 여럿인 까닭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안전한 대답은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의 대립─혹은 ‘독약을 마시는 새’와 ‘물을 마시는 새’의 대립─에서 곧바로 간취되는 삶의 태도들 사이의 갈등과 그 극복이 『눈마새』의 주제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마새』는 흔히 ‘다름에 대한 긍정’, ‘사랑’, ‘사람들의 마음이 적어도 미움으로 가득하지는 않음’ 등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물론 일리 있는 해석이며, 이 글도 기왕의 해석들에 모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고는 위와 같은 독해가 『눈마새』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니체 철학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왕 = 눈물을 마시는 새’라는 『눈마새』의 대주제 역시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야 이러한 것들을 전부 하나의 틀 안에 통합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눈마새』에 대한 한 독해가 아니라 정론(正論)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정론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핑계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더욱 불성실한 일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런 작업을 겨냥한 효시로써 소비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모든 화살이 그렇듯 이 글은 어떤 활의 도움을 받아 발사되는 것인데, 조준점 설정을 도와주는 그 활에는 꽤 친숙한 이름이 붙어 있다. 그 이름은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이하 ‘유료도로당’)이다.

 


 

序. 유료도로당 어떻게 산맥을 넘어갈 것인가?

『눈마새』의 유료도로당은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지니고 있는 단체다. 첫째로, 이들은 시구리아트 산맥의 “오직 하나뿐”(『눈마새』 4권본, 2권 14쪽. 이하 본문 인용 시에는 ‘~권 ~쪽’만 표시함.)인 통행로를 관문으로 막고 있다. 이것은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료도로당의 관문을 통과해야 함을 뜻한다. 둘째로, 이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 자들”(2권 118쪽)에게 통행료를 요구한다. 이것은 무생물이나 야생동물이 아닌 모두에게 통행료가 부과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셋째로, 이들은 ‘대요금표’에 종족별로 규정된 금액을 통행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징수한다. 이것은 같은 종족이라면 누구나 동일한 금액을 통행료로 요구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견지에서 통행료는 “존경받는 성자에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에게까지”(2권 124쪽) 평등하다.

그러므로 유료도로당을 맞닥뜨린 통행자들에게는 크게 네 개의 선택지가 있다. 우선, 통행자들은 유료도로당의 방침에 순응하여 통행료를 지불할 수 있다. 이 경우 유료도로당은 그들에게 길을 제공할 것이며, 길을 걷는 데 방해가 되는 각종 요소도 억제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유료도로당은 통행자들을 단순화시켜 재정의하고─예컨대 권능왕은 “인간 성인 남자, 은편 열 닢”(2권 24쪽)으로 재정의되었다─, 이를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통행료를 납부하는 것은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고 유료도로당의 통제하에 들어가겠다는 승인인 셈이다. 물론 대다수의 통행자들은 이것이 크게 불합리한 거래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첫 번째 방법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료도로당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는 야심찬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유료도로당의 방침을 거부하고, 통행료 납부 없이 관문을 통과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바로 산맥을 넘는 두 번째 방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 유료도로당은 “통행료를 내지 않는 여행자에겐 무기를 준비”(3권 154쪽)하며, 유료도로당의 관문은 매우 견고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을 택했던 자들은, 250년 전의 주퀘도 사르마크 혹은 2차 대확장 전쟁기의 “오동나무 군단과 야자수 군단”(3권 140쪽)처럼 실패하기 일쑤이다. 다만 강행 돌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신의 힘을 동원해 관문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갈로텍의 사례가 이것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두 번째 방법은 유료도로당의 강제를 더 큰 의지로 깨뜨리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순응하거나 거부하는 것 외에, 통행료를 내지 않으면서 유료도로당을 파괴하지도 않는 선택지는 없을까? 물론 그런 길도 있다. 딱정벌레를 타고 “날아서 산맥을 넘”는 도깨비에게서는 통행료를 징수할 수 없다(2권 22쪽). 날아다니므로 “도로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 아스화리탈 역시 통행료를 면제받는다(2권 46쪽). 다시 말해, ‘날아다니는’ 여행자는 유료도로당에 통행료를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산맥을 넘는 세 번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날아다니는 여행자들은 유료도로가 아닌 공중의 길을 이용해 산맥을 넘는 것이며, 따라서 유료도로당은 원리상 여행자에게 개입할 명분이 없게 된다. 결국 세 번째 방법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함으로써 유료도로당과 무관해지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방법도 있다. 유료도로당의 규칙에 따르면, 두억시니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일지라도 “통행료를 내지 않으면” 유료도로를 통과할 수 없다(2권 118쪽). 그러나 “누군가”─작중에서는 사모─“가 그들을 대신하여 통행료를 지불”할 경우, 그것이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가 없더라도 유료도로당은 그들을 통과시킨다(2권 123쪽). 여기서 드러나듯 타인이 통행료를 대납해 준다면 무료로 유료도로를 통과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곧 산맥을 넘는 네 번째 방법이다. 이때 무료 통과자들은 유료도로당과 간접적으로만 관계되며, 유료도로당과 실제로 교섭하는 것은 “어진 마음”(2권 139쪽)을 가진 대납자이다. 다시 말해, 네 번째 방법은 유료도로당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우선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방법이 앞서 언급한 ‘『눈마새』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니체 철학’을 다분히 연상시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기존의 가치체계에 복종하는 것은 ‘낙타’의 정신이고, 기존의 가치체계를 거부하는 것은 ‘사자’의 정신이다. 그리고 기존의 가치체계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 유료도로당의 “요구를 수용”(3권 147쪽)하는 첫 번째 방법은 낙타에, 유료도로당에 저항하는 두 번째 방법은 사자에, 허공에 새로운 길을 창조하는 세 번째 방법은 어린아이에 해당한다. 이 세 가지 태도의 교차는 여러 창작물의 해석에 활용되는 분석틀인데, 본고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 틀에 입각해 『눈마새』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넷째 방법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것이 앞서 언급한 ‘왕 = 눈물을 마시는 새’라는 ‘『눈마새』의 대주제’와 연관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술했듯 네 번째 방법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산맥을 넘는 방법이며, 이때의 타인은 남을 “긍휼히 여기”(2권 139쪽)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곧바로 ‘눈물을 마시는 새’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어떤 집단이 단체로 유료도로를 이용할 때에도, 구성원 개개인의 통행료는 집단의 대표자에 의해 ‘대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누군가의 통행료를 대납하는 일은 그들의 지도자임을 자처하는 행위가 된다. ‘왕 = 눈물을 마시는 새’라는 대주제를 해석할 실마리가 곧 이것이며, 본고는 이 단서에 입각해 『눈마새』의 주제들을 통합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눈마새』의 주요한 주제들은 ‘산맥을 넘는 방법’이라는 화제 앞에서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그 뒤에야 한눈에 포착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의 조준점 설정에 유료도로당이 제공한 도움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본작을 독해할 관점을 세웠다면, 우리는 비로소 두 개의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눈마새』의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의 네 가지 방법을 드러내고 있는가? 둘째로, 궁극적으로 『눈마새』에서 지향하는 방법은 네 가지 중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곧 서장에서 도출되는 이 글의 실질적인 쟁점이며,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물론 본작의 내용을 되짚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본고는 이쯤에서 본론으로, 다시 말해 『눈마새』의 서사 속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산맥을 넘는 네 가지 방법’의 현란한 변용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1. 양해의 도덕 ‘사람을 먹어서는 안 된다’

『눈마새』는 살육한 나가를 끌고 걸어오는 케이건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케이건은 그 나가를 삶아서 먹어버린다. 사실 그는 나가를 사냥해 잡아먹는 일로 일상을 갈음한 인간이며, 이 사실을 마주한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상식’ 밖의 식성에 당황을 금치 못한다. 마지막 주막의 주인이 그러했고,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그러했고, 티나한과 비형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이 같은 경악은 단지 식문화의 차이에 대한 과민반응은 아니다. 구출대의 첫 설전에서 비형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나가도 당신과 같은 사람”(1권 103쪽)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케이건의 행동은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1권 105쪽)이며, ‘사람’을 먹는 것은─초목이나 짐승을 먹는 것과는 달리─심각한 윤리적 문제로 간주된다. 어째서 그런가?

사실 『눈마새』의 첫 갈등에 해당하는 이 문제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는, 의외로 즉석에서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케이건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을 당연히 지켜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나한은 “나가는 사람같이 굴지 않”(1권 121쪽)는다는 이유를 들어 케이건을 옹호하고, 비형은 나가가 사람인지 판단할 정보를 모으는 데에서 “여행에 동참해야 할 개인적인 이유”(1권 122쪽)를 찾는다. 그 뒤에야 케이건의 행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의 논점은 ‘사람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아니라 “나가를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1권 122쪽)로 손쉽게 옮겨간다. 구출대의 여정 내내 비형이 나가에 대한 케이건의 증오를 주시하는 것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구출대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하인샤 대사원에 도착한 비형은, 마침내 ‘나가를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륜에게 “당신은 사람이에요”(2권 227쪽)라고 속삭인다. 결국 비형의 결론은 케이건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2권 228쪽)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유예되었던 도덕률에 대한 정당화는 다시금 화두에 오르고, 마침내 오레놀에 의해 ‘사람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에 따르면 “권리라는 것은 결국 ‘양해’라는 말의 다른 표현”(2권 423쪽)이며, 서로 “의사 소통이 된다면”(2권 424쪽) 당연히 양해도 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의사 소통이 되는’ 상대에게 권리를 행사하려면, 우선 양해를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가들의 양해를 얻지 못한 채로 그들을 잡아먹는 케이건의 행위는 부도덕하다.

이것은 오레놀 개인이 창안한 논리가 아니라, 『눈마새』의 세계에서는 거의 정설로 자리매김한 도덕원칙이다. 예컨대 쥬타기 대선사는 남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1권 458쪽) 일을 진행했다면 “죽음을 강요하든 삶을 강요하든”(1권 459쪽) 똑같이─즉, 의도나 결과와는 상관없이─‘죄’가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열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이는 것은 ‘죄’로써 “이고 가”야 하는 행위이다(2권 188쪽). 한 명을 죽이는 것은 죽음을 강요하는 일이고, 그것으로써 열 명을 살리는 것은 삶을 강요하는 일인 까닭이다. 하인샤 대사원을 필두로 한 종단이 북부에서 가지는 도덕적 권위를 감안할 때, 쥬타기 대선사의 입장은 북부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도덕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부에서도 다르지 않다. 일례로 비아스는 강제로 남자들을 집으로 끌고 오는 카린돌의 행동이 “남자의 선택권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이것이 “마케로우 가문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1권 335쪽). 이때 카린돌조차 ‘선택권을 무시해도 무방하다’고는 주장하지 못하고 대신 “그 ‘남자의 선택권’이라는 건 주사위나 마찬가지”(1권 336쪽)라고 항변하기를 택했다는 점은 나가 사회에서도 ‘양해를 얻어야 권리가 생긴다’는 도덕원칙(이하 ‘양해론’)이 통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사모 역시 수호자들의 여신 감금을 비판하기 위해 그것이 “여신을 경의로 대한 것”(2권 567쪽), 즉 여신의 양해를 구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으며, 수호자들은 이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따라서 쥬타기, 비아스, 카린돌, 사모 등의 사례로 볼 때, 오레놀이 언급한 예의 ‘양해론’은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도덕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케이건은 어떻게 ‘양해론’에 대항해 자신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을까? 사실 이에 대한 케이건의 태도는 꽤나 혼란스럽다. 그는 때때로 ‘양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너만 납득하는 관계를 빌미로 그걸 납득할 수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징벌”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륜에게 단언하기까지 한다(2권 64쪽). 또한 괄하이드에게 “나를 죽이고 바라기를 뺏어갈 권리”(2권 449쪽)를 주겠다고 말할 때에도 케이건은 분명 ‘양해론’에 입각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양해론’을 인정하면서도, 케이건은 나가들에게는 결코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비형이 한때 가졌던 의문을 똑같이 제기하게 된다.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왜 나가에게는 관대하지 못한 걸까?”(1권 216쪽) 케이건은 나가가 의사 소통이 되는’ 상대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아니며, 오히려 “나가 자신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나가를 잘 알고 있을”(1권 216쪽)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나가의 입장에 설 줄 아는”(1권 361쪽)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케이건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말해 “그들도 죽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1권 105쪽)기 때문에 나가들을 죽여 삶아먹는다. 분명 그것이 나가들이 원치 않는─그러므로 당연히 나가들의 양해를 구하지 않은─일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케이건은 대체 왜 이러한 부도덕을 의식적으로 자행하는 것일까?

케이건 드라카라는 인물이 유발하는 이 물음으로부터, 『눈마새』는 ‘양해론’에 파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2. 생존의 법칙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다’

한계선을 넘은 구출대가 첫 번째로 이별을 준비하던 때에 이르러, 케이건은 마침내 비형이 일찍이 제기했던 의문에 응답한다. 그의 답변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끼면 당신이 죽”(1권 361쪽)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냉엄함에 “한 잔 마시고 싶은 기분”(1권 363쪽)이 된 비형은 이어지는 대화에서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라고 물으며 케이건의 입장을 다시금 확인하고, 케이건은 이때도 “그렇소”라고 단호히 답한다(1권 366쪽). 비록 여기서 케이건이 덧붙인 사족─“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으로 비형의 얼굴이 환해지기는 하지만(1권 366쪽), 그럼에도 케이건이 ‘눈물을 마시는’ 행위를 곧바로 죽음과 연결짓는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그렇다면 ‘눈물을 마시는’ 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동정심을 말하는 거”냐는 사모의 물음에 케이건은 “동정심은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을 말”한다고 대답한 바 있다(2권 539쪽). 또 케이건이 “사람들의 눈물을 다 마셔버리”는 자로 언급한 ‘왕’은 사람들을 “눈물 없는 비정한 자들”로 만든다(1권 473쪽). 따라서 ‘눈물을 마시는’ 일은 남을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적극적인 행위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모가 시구리아트 산맥에서 두억시니들의 “무의미한 노동”(2권 113쪽)을 보며 “참기 힘든 고통”(2권 113쪽)을 느낀 것이 ‘동정심’의 예시라면, 이어지는 장면에서 사모가 직접 “돌맹이를 휘둘”(2권 50쪽)다리를 만들어주었”(2권 551쪽)던 것은 ‘눈물을 마시는’ 일의 예시이다.

그런데 예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눈물이란 대체로 현실이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 흐른다. 예컨대 륜은 “비늘이 떨어져나갈 정도의 공포” 때문에 “격한 울음”을 터뜨렸고(1권 112쪽), 왜 시우쇠를 “설득하고 싶은 것인지 설명할 수가 없”어졌을 때에도 문득 울음을 보였다(3권 216쪽). 한편 생물은 “세상이 자신을 침식하는 것을 바라보며 울어야 하는” 비애를 가졌으며(3권 91쪽), “패배에 서러워하며 우는”(3권 66쪽) 경우 역시 작중에 언급된다. 또 사모는 “남동생은 아이가 될 수 없”(1권 69쪽)다는 독설에 은루를 흘렸고, 군령들을 잃은 갈로텍은 “견디기 힘든 상실감”에 “소리 높이 울고 싶”어했다(4권 358쪽). 그리고 케이건은 나가들의 공세가 임박한 북부에 “눈물을 흘릴 일이 많겠”다고 예상한 바 있다(2권 508쪽).

따라서 위의 사항들을 감안할 때, 케이건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다’고 주장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해명된다. 눈물을 마심으로써 다른 사람의 눈물을 그쳐 주기 위해서는 눈물을 유발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주어야 하며, 이러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눈물을 마시는’ 자의 희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이건은 눈물이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느냐며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1권 366쪽). 이것은 그가 왕에게 눈물을 먹이는 사람들을 “비정한 자들”(1권 473쪽)이라고 부른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눈물을 마시는’ 일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힘을 소모하는 행위이며, 그렇기에 타인에게는 이익을 주지만 본인에게는 손해가 되는 행동인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케이건이 ‘눈물을 마시는’ 일을 ‘죽음’이라고까지 표현한 까닭을 이해하기는 아직 쉽지 않다. 남을 돕기 위해 스스로 감수하는 손해만으로 반드시 죽음이 야기된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이건도 단지 이러한 가능성만으로 예의 독특한 지론(이하 ‘생존론’)을 주창한 것은 아니다. 그의 ‘생존론’에는 한 가지 중요한 변수가 추가로 존재하는데, ‘네 마리의 형제 새’ 이야기에서 ‘눈물을 마시는 새’의 대척점으로 처음 언급되는 ‘피를 마시는 새’가 바로 그것이다. 이 새는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1권 368쪽)기에 가장 오래 사는 새이며, 다시 말하면 ‘남의’ 피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수명을 증가시키는 새이다. 그리고 이 ‘피를 마시는 새’의 존재가 ‘생존론’의 논지를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준다.

어째서 그런가? ‘피를 마시는 새’가 마시는 ‘피’는 “누구도 내놓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1368)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눈물을 마시는 새’조차 자신의 ‘피’까지 내놓는 것은 꺼린다는 말이며, 동시에 ‘피를 마시는 새’는 남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피를 마시는 새’는 ‘양해론’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자를 지칭하며, 그들의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1368)는다는 설명은 곧 도덕원칙을 위반한 자에게 가해지는 주변의 비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피를 마시는 새’에게 ‘피’를 빼앗기는 대상은 선의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될 공산이 크다. 이것이 바로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는”(1권 366쪽) 이유인 것이다.

실제로 나가들의 선의를 믿었던 “극연왕의 오라비”(4권 209쪽)는 “그의 모든 것이 나가에 의해 상실되”(4권 239쪽)는 고통을 겪었고, 두억시니들의 “슬픔”(1권 361쪽)을 느낀 탓에 “두 손을 떨구었”(1권 315쪽)던 비형은 두억시니들에 의해 죽을 뻔했으며, 키타타 자보로가 “원하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그 “요구대로 움직”인 륜은 키타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4권 212쪽). 이들은 곧 ‘눈물’을 마신 대가로 ‘피’를 빼앗긴 사례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케이건이 나가들에게 ‘양해론’을 적용하는 대신 그들을 잡아먹는지 알 수 있다. “나가를 신뢰”(2권 324쪽)했다가 지독한 배신을 당한 그에게 나가란 곧 ‘피를 마시는 새’이며, 따라서 그와 나가의 관계는 늘 “피를 흘리느냐 피를 묻히느냐 둘 중 하나”(2권 424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케이건이 “그것들이 약한 척, 아픈 척, 죽은 척 한다고 해서 칼을 칼집에 꽂아넣는 것은 미련한 짓”(2권 220쪽)이라고까지 여기는 대상은 물론 나가들뿐이지만, 이처럼 타인이 ‘양해론’을 준수할 가능성을 불신하는 태도 자체는 다른 종족을 상대할 때에도 반영된다. 그래서 상대가 나가가 아닌 경우에도 케이건은 상대의 ‘눈물을 마시는’ 일을 철저히 자제하곤 한다. 당연히 상대가 ‘양해론’을 준수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실제로 그럴지는 알 수 없으며, 만일 상대가 ‘피를 마시는 새’라면 ‘피’를 빼앗기기보다는 애초에 남의 ‘눈물을 마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케이건이 ‘양해론’을 규범으로 권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생존론’에 따라 행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케이건은 륜에게 닥친 비극을 이해하고도 “그래서 어쩔 테냐”(1권 436쪽)며 선택을 종용하고, 케이가 사과를 “원하는 것 같”다고 꿰뚫어보고도 결코 “사과하지 않”으며(3권 355쪽), “만인에 대해 원하는 것이 없”(3권 303쪽)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상대의 선의를 기대하지 않는다─그리고 상대를 선의로 대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케이건이 “당신은 철혈(鐵血)”(1권 523쪽)이라는 륜의 비판에 “나는 철혈이 맞”(1권 548쪽)다고 태연히 답한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두억시니들을 ‘죽이기’ 직전에 티나한과 나눈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잔인하고 추하고 악의에 찬”(2권 188쪽)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으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코 ‘눈물을 마시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까지 보았을 때, 우리는 케이건의 ‘생존론’이 기실 ‘양해론’이 지켜질 것을 기대하지 않는 불신의 발로이자 ‘피를 마시는 새’에 대한 경계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피를 마시는 새’로 인해 ‘눈물을 마시는 새’이기를 포기한 케이건의 모습은 곧 『눈마새』의 주요한 문제의식으로 포착되며, 서사의 초점은 ‘생존론’에서 다시금 확장되어 ‘피를 마시는 새’에게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음의 물음들이 따라 나온다. 어떻게 ‘피를 마시는 새’를 억제할 수 있을까? ‘피를 마시는 새’가 출현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들은 과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무엇이 ‘피를 마시는 새’가 ‘양해론’을 파기하도록 하고, 또 ‘피비린내’마저 감수하도록 만드는가?

그 해답은 아마도 『눈마새』가 들려주는 ‘피를 마시는 새’의 목소리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3. 제행의 긍정 ‘삶을 유죄판결하지 말라’

일찍이 영웅왕은 “나가가 눈물을 흘린다”는 생각이 “비가 오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1권 54쪽). 그리고 이러한 영웅왕의 냉소처럼, 승려들 앞에서 “양심적인 수호자”(2권 178쪽)처럼 행세하던 세리스마는 목표를 이루자마자 본색을 드러내어 “세계가 그들이 일으킨 열독 속에 신음하도록”(2권 400쪽) 만든다. 이것은 케이건의 입장에서는 “나가가 그를 세 번째로 속”(2권 433쪽)인 것에 해당하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나가들은 『눈마새』에서 대체로 ‘피를 마시는 새’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잦다. 그렇다면 나가들은 무엇 때문에 타인의 ‘피를 마시는’ 일을 자행한 것일까? 우리는 ‘피를 마시는 새’의 동기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건을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작중에서 나가들이 행한 ‘피를 마시는’ 일 중에서 가장 면밀히 묘사되어 있는 사건은 역시 ‘2차 대확장 전쟁’일 것이다. 예컨대 이 전쟁으로 인해 “슈라도스의 아름다움은 이제 옛노래 속에서나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 “판사이의 육형제 탑은 영원히 수면 아래로 잠겨버렸”다(3권 11쪽). 북부는 “경제 구조라 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3권 149쪽)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으며, 그렇기에 라수는 “북부에서 사라진 도시를 서른 개라도 댈 수 있”(4권 371쪽)다고 단언한다. 한계선이라는 제한을 넘어 북부 전체를 휩쓴 이 전쟁에서 나가들은 그야말로 “충분한 피를 마”(3권 287쪽)신 셈이다. 그리고 나가들이─북부인들의 양해도 없이─이러한 대침공을 일으킨 원인으로 유력하게 제시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로, 수호자들은 “여자들을 위한 세상에 태어나 실질적, 물질적, 현실적 권력은 가지지 못한 채 가식적인 존경만을 받”(4권 78쪽)았다는 점에 대한 불만으로 “권력에 미쳐서”(2권 396쪽)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전쟁을 획책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둘째로, “여신께서 불신자들에게 유괴당했”(2권 458쪽)다는 수호자들의 설명만을 들은 대다수의 나가들은 “두억시니의 운명”(2권 461쪽)이 찾아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이를 유발한 “불신자들을 혼내”(4권 352쪽)주어야 한다는 열망, 즉 “긴장과 분노”(2권 597쪽) 때문에 “성전을 니르”(2권 598쪽)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셋째로, 쥬어 센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나가들은 “사업”(3권 195쪽)과 “부작용 없는 깨끗한 부”(3권 186쪽)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2차 대확장 전쟁의 사례로 볼 때, ‘피를 마시는 새’가 나타나는 이유는 사회적 위상의 강화/위기의식에 기반한 적개심/경제적 이익의 획득 등으로 정리된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홉스(Thomas Hobbes)가 ‘전쟁 상태’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제시한 세 가지, 즉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명예심’/자기보존욕구를 선제공격으로 비화시키는 ‘상호 불신’/한정된 재화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각각 대응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홉스는 이러한 요소를 사실상 ‘사람의 본성’으로 파악하며, 실제로 누구든지 전혀 명예심이 없거나, 아무도 불신하지 않거나, 경제적 이득에 초연하기란 매우 어렵다. 결국 ‘피를 마시는’ 일을 추동하는 기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을 전제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시도”되며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는 키베인의 진단(4권 79쪽)은 현실적인 설득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실제로 억제하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며(4권 78쪽), ‘가능한’ 일이라면 결국 언젠가는 자기 나름의 이유로 그 일을 시도하는 자가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베인은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어서”(4권 79쪽) 전쟁을 획책한 것이며 “다른 이유는 없”(4권 78쪽)다고까지 주장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춤꾼이 춤을 추는 이유는 그곳에 춤채가 있기 때문”(4권 79쪽)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예술적 고취감을 표현하기 위해서”(4권 78쪽)라는 설명들은 사후적으로 발명된 동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생의 필연성’은 ‘피를 마시는 새’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키베인이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4권 79쪽)인 탓에 단지 현상을 관조할 뿐 가치판단을 하지는 않은 반면에, 시우쇠는 이 논의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명확한 주관을 표출하고 있다. 예컨대 시우쇠에 따르면, 남을 불태우기 위해 “불 탈 만한 짓을 했”다는 등의 이유를 대는 것은 “너절”한 일이다(3권 210쪽). “이빨 달린 놈이 물어뜯고 발톱 달린 놈이 할퀴듯이”, 불을 가진 자는 “속시원하게 ‘이유 따위 묻지 마라, 불을 가진 것은 나다.’라고 외치며” 남을 불태워도 무방하기 때문이다(3권 210쪽). 이것은 단지 남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에 남을 불태워도 ‘된다’는 주장으로, 능력을 근거로 실행을 정당화하는 논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시우쇠의 입장에서 어떤 일을 실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뿐이며, 설령 타인에게 관계되는 일일지라도 타인의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시우쇠는 ‘양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로써 ‘피를 마시는’ 일 전체를 도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지론(이하 ‘무방론’)을 주창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은 “먹어야 하는 존재”(3권 211쪽)이며, “먹는다는 것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외의 것을 파괴한다는 것”(3권 211쪽)인 까닭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남을 파괴하는 존재이므로, 만일 남을 파괴하는 것이 죄라면 모든 생명이 태생적으로 범죄자인 셈이다. 따라서 범죄에서 자유로운 상태란 원리상 불가능하기에 범죄를 문제시할 수 없고, 결국 “범죄 같은 것은 없”(3권 212쪽)게 된다.

이때 ‘무방론’은 생명의 본성을 정의한 뒤 이 원리를 당위로 변환시킴으로써 의사소통 능력에 따르는 책임’이라는 ‘양해론’의 핵심 논거를 우회하고 있으나, 이러한 비약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눈마새』 속 여러 인물들에 의해 지지를 획득한다. 예를 들어 세리스마는 “자기 자신이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에게 제한과 족쇄를 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죄”라는 이유로 자신의 전쟁 획책을 정당화하며(4권 316쪽), 주퀘도는 삶이 “목적”이고 도덕은 “도구”에 불과하므로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고 말한다(4권 33쪽). 또 “살인의 허락을 요구하는 자는 살아가는 것의 허락도 요구해야 할 것”(3권 361쪽)이라는 괄하이드의 사유 역시 ‘무방론’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세리스마의 주장에서 드러나듯이, 예의 인물들이 ‘무방론’을 옹호하는 이유는 그것이─설령 논리적으로 엄정하지 않을지라도─삶을 긍정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무방론’의 지지자들은 “이 멋지고 신성한 생이 원칙적으로 죄를 가진 것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는”(4권 397쪽) 것을 경계하며, “자신을 부정의 대상이 아닌 긍정의 대상으로 바”(4권 315쪽)꿔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삶을 유죄판결하는’ 도덕은 무가치한 노예 도덕’이며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도덕이 ‘주인 도덕’이라고 주장한 니체의 철학과도 조응한다. 그리하여 “죄인의 고통스러운 삶 따위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에게 짓는 죄”라는 입장(2권 264쪽)에서는 ‘피를 마시는’ 행동도 죄’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방론’은 ‘피를 마시는 새’를 옹호하는 논리가 되고, ‘피를 마시는 새’에게 제기되는 여러 물음들은 이를 통해 방어된다. ‘무방론’에 따르면 ‘피를 마시는’ 일은 생명의 속성에서 기인하므로 기실 죄라고 보기 어렵고, 또 사람의 본성에 의해 추동되므로 마땅한 억제 방법도 없으며, 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삶의 긍정’에 어긋나므로 ‘피비린내’ 역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반감을 느끼며, 예컨대 티나한은 “그렇다면 능력만 되면 누구든 다른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도 된다는 거냐”(4권 316쪽)고 일갈한 바 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다행히 ‘무방론’은 이를 한계로 방치한 채 끝나지는 않는다. 이 입장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그러면서도 ‘무방론’의 완결성에 필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4. 수용의 책임 ‘실패조차도 나의 실패다’

세리스마가 “제 계획 때문에 죽어간 북부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티나한은 “네 말은 헛소리”라고 소리친다(4권 316쪽).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티나한이 “나는 케이건이 나가를 삶아먹든 튀겨먹든 신경쓰지 않겠”(1권 121쪽)다고도 선언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티나한은 왜 이처럼 서로 상충되는 발언을 했던 것일까? 일차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나와 상관 없다면 신경쓰지 않”(1권 121쪽)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티나한의 관점에서 세계의 절반을 독차지하고서 저희들끼리 살겠다는” 나가들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기에 “사람”보다는 “두억시니”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반면, 북부의 여타 선민 종족들은 자신과 큰 관련이 있으므로 확연히 ‘사람’이다(1권 121쪽).

다만 티나한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한다(1권 121쪽). 그리고 그가 케이건을 용납하게 된 추가적인 이유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티나한이 직접 언급한 바에 따르면, “케이건의 태도는 공평”(1권 121쪽)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케이건은─나가와 북부인을 일관된 태도로 평가하지 못한 티나한과는 달리─“머리 나쁜 비겁자처럼 말하진 않았”다(1권 121쪽). 그래서 티나한은 케이건의 논리와 ‘양해론’ 중 무엇이 더 옳은지 결정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양해론’에 의거한 도덕률이 다른 도덕률에 의해 상쇄된다면, 나가 살육에 반대해야 할 확고한 이유는 사라진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티나한은 케이건의 기행에 “신경쓰지 않겠”(1권 121쪽)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케이건의 태도는 왜 공평하다고 여겨졌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그가 언제나 ‘자신이 패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티나한이 말했듯이, “나는 너를 욕하고 괴롭히고 때리고 죽여도 되지만 너는 내게 그렇게 할 수 없”(1권 121쪽)다는 것은 공평한 주장이 아니다. 그리고 케이건은 이처럼 비겁하게 말하는 대신에 “모든 나가들”이 “나를 죽이려 시도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1권 105쪽). 그는 또한 “언젠가 저 자신이 그 놈들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바라기를 휘두르지 못하게 될 때 저는 죽”을 것이라는 점도 이미 각오하고 있다(1권 48쪽). 그렇기에 케이건이 나가들에 대해 견지한 태도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수용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실제로 ‘공평’했다.

케이건의 태도가 ‘양해론’에 필적하는 도덕률을 담지한 것으로 인식된 까닭은 바로 이러한 내적 논리의 일관성이 충분히 강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유사한 입장들, 예컨대 세리스마가 보여준 태도보다 더 발전된 것으로 읽힌다. 왜냐하면 세리스마는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두지 않”(4권 3165쪽)는 것이 곧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자신을 선택”(4권 315쪽)하는 일이라며 2차 대확장 전쟁을 정당화했으면서도, 똑같은 논리로 케이건의 나가 멸절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세리스마는 나가를 멸종시키려는 케이건에게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4권 316쪽)을 발휘하라고 호소했는데, 이것은 “나를 죽이려 시도할 권리”(1권 105쪽)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케이건에 비하면 ‘공평함’이 다소 부족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음의 천칭은 언제나 천칭 주인을 향해 기울게 마련”(4권 371쪽)이므로, 예의 ‘선택적 무방론’으로 빠져드는 것은 유독 티나한이나 세리스마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이 타인에게 행하는 대로 타인 또한 자신에게 행할 수 있다는 “당연한 말”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하긴 어려운” 탓이다(1권 121쪽). 다시 말해 자신의 기쁨을 정당화하는 것은 쉽지만, 자신의 고통까지 그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그렇기에 ‘무방론’을 제대로 견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만 취사 선택하여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4권 169쪽)며, ‘무방론’은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대가로 어떤 고통이든 감내하고 긍정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을 고려할 때 ‘무방론’은 ‘피를 마시는 새’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변이 아니라, 오히려 ‘피를 마시는 새’에게 무거운 책임을 부여하는 논변이 된다.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 자체는 모든 삶의 태도에 요구되는 것이지만, ‘무방론’을 택할 경우에는 이 원칙을 준수하기가 특히 힘들어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힘든 책임’은 기실 화신들이 일찍이 주목했던 ‘무방론’의 숨겨진 핵심이기도 하다. 시우쇠가 “태우고 찌르고 들이받으라는 식으로”(3권 212쪽) 말하면서도 “급작스러운 사고와 황당한 죽음도 모두 인정”(4권 169쪽)할 것을 강조하고, 아기가 “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4권 157쪽)라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실패도 네 실패고 좌절도 네 좌절이라는 것을 인정”(4권 168쪽)하라고 촉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우쇠를 위시한 화신들이 ‘무방론’을 권장한 것은 ‘피를 마시는 새’를 양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고통을 기쁨만큼이나 기꺼이 긍정하는 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삶을 무서워하는 나약한 것들”(4권 157쪽)과 “살 줄 모르는 놈”(4권 169쪽)들을 변화시켜 “완전에 이르게”(4권 278쪽)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신들의 지향점은 삶을 선택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긍정해야 하고 운명애(amor fati)를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의 사상과도 상통하며, 『눈마새』에서는 “내 존재의 모든 시간”이 곧 “내 최고의 순간”이었다는 주퀘도의 깨달음(4권 32쪽)을 통해 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것이─제대로 견지되었을 경우에 한해서─무방론’이 지닌 가치인 것이다.

그리하여 ‘공평함’이 반영된 ‘무방론’은 마침내 그럴듯한 이론의 모습을 갖춘다. 내키는 대로 행하고 일어나는 대로 긍정하기만 하면, 그리고 그 긍정의 범위가 삶 전체이기만 하면 내적 논리의 일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러나 매끄러운 원환과 같은 이러한 논리구조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방론’에 대한 반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비형은 위의 주장이 “얼핏 듣기에 멋지지만 결국 우리 함께 서로를 표적 삼아 근사한 살육광이 되자는 말일 뿐”(1권 122쪽)이라고 비판했으며, 이처럼 ‘양해론’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무방론’의 입장을 용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간극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상이한 가치를 추구하는 두 태도를 무엇으로 화해시킬 수 있을까?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과연 존재하는가?

여기까지 도달했을 때 우리는 결국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다시 말해 카시다 암각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5. 모순의 중첩 ‘사람들의 마음은 ······으로 가득하다’

『눈마새』가 남긴 여러 수수께끼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축에 드는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권 402쪽) 그리고 이 대목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호기심과 안타까움을 자극”(4권 202쪽)해 왔다고 이야기되는 이 암각문 중에서도 가장 “상상력을 자극”(3권 8쪽)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에 들어갈 알맞은 단어에 대한 논쟁이 실제로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왔음에도, ‘미움은 아닌 것 같다’는 것 이외에 뚜렷한 합의가 도출된 적은 없다. 일찍이 지적되었듯이 카시다 암각문은 줄곧 용인의 특성을 서술하다가 마지막에야 돌연 ‘사람들의 마음’에 관해 규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앞의 내용들만으로는 마지막 빈칸을 유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 ‘바람’, ‘둔감함’, ‘이기심’ 등 그동안 제기된 다양한 추측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의견을 하나 꼽자면, 그것은 단연 ‘모순’일 것이다. 작중에서 ‘모순’이라는 개념 자체는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2권 523쪽)와 관련하여 조금 다루어졌을 뿐이지만, 모순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관계는 그 외의 상황에서도 종종 언급된 바 있다. 예컨대 괄하이드는 “왕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왕의 백성이 될 자들을 때려죽여야 한다는 모순”(2권 445쪽)을, 아라짓 왕국은 “왕이 사과하기 전에는 왕은 돌아오지 않는다”(2권 523쪽)는 모순을, 용은 “식물로 태어나 식물의 가장 큰 적이 되는”(4권 206쪽) 모순을 가졌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대상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경우이며, 그래서 모순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모순’을 위와 같이 인식할 경우, 우리는 작중에서 모순적인 관계들이 유독 많이 지적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예컨대 “꿈”은 “가장 밤다운 것이지만 동시에 밤과는 정반대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1권 41쪽), “두려움”은 “주위의 모든 곳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감정”이다(3권 66쪽). 또 하텐그라쥬는 “침묵”으로 가득한 동시에 “소란스러”우며(1권 125쪽), 심장 적출은 나가들과 죽음의 “거리를 그토록 벌려놓”는 동시에 매우 좁혀놓는다(2권 43쪽). 아울러 두억시니들은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1권 579쪽)기에 “두억시니를 닮”(4권 376쪽)았으며, 괄하이드는 “전쟁에 얽매어 있”는 동시에 “전쟁에서 자유롭”다(4권 50쪽). 이들은 상반되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는 점에서 모두 ‘모순’을 체현한 관계들인 셈이다.

그리고 『눈마새』에서 이러한 관계들은 형이하학적으로는 바라기의 형태를 통해, 형이상학적으로는 남매 관계의 지속적인 환기를 통해 더욱 명료하게 강조되고 있다. 바라기의 형태는 해바라기와 달바라기의 “합일”인 동시에 “바로 옆에 있는, 자신과 평행하게 서 있는 칼날은 만날 수 없”는 “절대적인 별리”이기도 하다(4권 441쪽). 마찬가지로 “사모와 륜, 세페린과 갈로텍, 극연왕과 케이건”과 같은 남매들은 혈연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남보다 훨씬 밀접한 남녀이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 결합될 수 없는 남녀”이기도 하다(4권 442쪽). 결국 바라기의 두 칼날과 남매는 결코 결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까운 사이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며, 작중에서 빈번히 언급된 ‘모순 관계’들의 공통점을 형상화해 주는 장치인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이 서로 대립적인 요소들이 하나로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모순’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분명 그 양태로 거론될 만하다. 예컨대 우리는 “사모에게 감사하며 동시에 그녀를 원망”(1권 112쪽)하는 륜이나 “반가워해야 할지 측은심을 느껴야 될지 혼란스러”(2권 78쪽)워 하는 사모에게서 이러한 양가감정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모두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2권 525쪽)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함을 지르고 싶다’는 의지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뜨릴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을 때(4권 203쪽), 비형의 마음속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다’는 의지와 ‘웃을 수 없다’는 의지가 서로 대립하면서도 공존했다고 여겨진다.

이때 이러한 공존이 가능한 것은 예의 의지들이 하나의 물음에 대한 여러 대답들이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서로 상충하는 대답들도 물음의 층위에서는 공히 함축될 수 있게 된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개념은 그 대척점에 대한 부정으로서 규정되며 이 둘이 대립적인 것,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양자를 모두 담지하는 상위 개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지적되었듯 이것이 바로 키탈저 사냥꾼들이 신봉했던 모순의 “특별한 힘”(1권 480쪽)이며, “셋이 하나를 상대”(1권 10쪽)하고 “하나는 셋을 부른다”(3권 272쪽)는 금언 역시 모순에 내포된 지양의 필연성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대상이든 길잡이가 대적자를 설정하기만 하면 요술쟁이가 “질서를 어지럽”(1권 90쪽)혀 적절한 유개념 하에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정식화한 ‘양해론’과 ‘무방론’이라는 두 태도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면, 이 둘은 실은 ‘마음’이라는 상위 차원에서 합일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양해론’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무방론’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모두 존재하며, 이 두 의지 중에 우세한 쪽이 실제의 행동으로 발현되는 셈이다. 이것은 니체 철학에서 힘에의 의지들이 스스로의 관점과 도덕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복종시키려고 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명령과 지배를 추구할 뿐 무화나 멸절을 의도하지는 않는 것과 같으며, 작중에서는 “폭력을 구사하는 것이 불가능”(4423)한 도깨비들이 “우열이 구분될 때까지, 즉 서로의 위치가 결정될 때까지”(4442)만 즐기는 힘싸움인 ‘씨름’을 통해 이것이 암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카시다 암각문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권 8쪽) 물론 마음이 특정한 경향으로만 통일될 수 있다면 ‘······’은 ‘사랑’, ‘바람’, ‘둔감함’, ‘이기심’ 등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고, 마음 안의 모든 부분이 ‘모순 상태’에 놓여 있다면 ‘······’은 ‘모순’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의지들이 있고, 서로 모순적인 의지들조차 지양되어 합일해 있으며, 그중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위치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 위상은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다. 마음이란 이처럼 수없이 명멸하는 의지들의 합이기에 그 무엇도 아닌 부정형(不定形)의 빈칸─‘······’─으로 서술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마음은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케이건은 그 누구보다 나가를 증오하는 인물이었음에도 요스비와는 “우정이라는 하나의 칼자루 위에 모”였고(4권 135쪽), 나가들은 이성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였음에도 수호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성전”을 닐렀으며(2권 597쪽), 시우쇠는 죄책감 없이 남을 불태우라고 설파했으면서도 륜에게 자신을 저지하고자 하는 이유를 “잘 떠올려보라고 부드럽게 권유”(3권 216쪽)했다. 또 사모는 수목을 애호하는 나가였음에도 “두억시니를 위해 나무를 죽”(2권 551쪽)였으며, 키타타는 “잠시 멈출 계획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암살 도중 사모의 “비명”에 얼어붙었고(4권 211쪽), 티나한은 공수증을 가진 레콘임에도 “물로 비형의 몸에 묻은 피를 정신없이 닦아내었”(4권 344쪽)다. 이러한 반전들은 기실 어디에서든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눈마새』의 초점은 이제 하나로 좁혀진다. 결국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양해론’이나 ‘무방론’ 같은 태도를 취하도록 만드는가? 그야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양해론’이 전 세계에 보편적인 도덕원리로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양해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마치 유료도로당의 관문처럼 굳건히 자리잡은 태도일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료도로당의 통제를 거부하고 관문울 파괴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양해론’의 통제를 벗어나 ‘무방론’을 따르리라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애시당초 ‘양해론’이 도덕원리로 격상된 이유는 무엇이고, 또 ‘양해론’을 부정하려는 욕구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왕’─‘= 눈물을 마시는 새’─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6. 제왕의 사명 ‘눈물은 새와 함께 날아오른다’

스스로를 무적왕이라고 칭한 제왕병자 토디 시노크를 만났을 때, 케이건은 선지자에게 “왕이 무엇이오?”(1권 421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선지자의 대답은 매우 휘황찬란하다. 왕이란 “만물의 하나뿐인 주인”이며 “법칙의 절대적 수호자”이고 “이 땅의 모든 영광이 모여”드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만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1권 421쪽). 하지만 이 답변이 “틀렸”(1권 422쪽)다고 준엄히 선고한 케이건은 이 때문에 선지자가 “알면서 저지르는 종류의 실수”(1권 423쪽)를 했다고 말한다. 즉 케이건은 선지자가 “왕을 알지 못”(1권 421쪽)했기에 토디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1권 422쪽)면서도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진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지자가 알지 못했다는 ‘왕’과 토디가 아니라는 ‘왕’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전자를 해명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케이건의 제왕론에서 왕은 “이 땅의 모든 영광이 모여”(1권 421쪽)드는 존재라기보다는, 집단 구성원들의 모든 증오가 모여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케이건에 따르면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의 집단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며(2권 558쪽), 이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 집단 구성원들 간의 “공포와 증오”가 해소되면 “집단은 그런 희생양에게 특별한 숭배를 바치고 다른 자들과는 다른 이름”─‘왕’─“으로 부르”게 된다(2권 559쪽). 이 “거대한 규칙”(2권 557쪽)은 타자(打者)가 스스로 밝혔듯이 지라르(René Girard)‘희생양 메커니즘’을 참고한 것으로, 희생양의 죽음과 사후적인 신성화를 통해 사회의 균형이 회복된다는 점이나 왕에게 희생양의 징후를 부여한 점이 특히 그러하다.

한편 후자를 해명하기는 상대적으로 어렵다. 물론 케이건의 제왕론에 따라 “죽기 위해 북부로 온 자는 북부의 왕”이며 “북부의 왕은 북부로 와서 죽어야 한다”는 것(2권 554쪽)을 전제한다면, 사모에게 전 재산을 바치며 “제발 목숨만은 살려”(1권 439쪽)달라고 애원할 만큼 죽음을 두려워하는 토디는 분명 왕의 재목은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선지자의 제왕론은 케이건의 제왕론과는 다르므로, 케이건뿐 아니라 선지자까지 토디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1권 422쪽)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제왕론에서 공히 인정되는 ‘왕의 자질’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과연 무엇인가? 케이건이 왕의 희생을 강조하는 반면 선지자는 왕의 위대함을 강조하므로 이들의 접점은 일견 모호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작중에는 참고가 될 만한 제왕론이 하나 더 등장한다.

스스로를 위엄왕이라고 칭한 제왕병자 지그림 자보로를 만났을 때에도, 케이건은 키타타에게 “왕이 무엇이오?”(1권 571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키타타의 대답은 매우 휘황찬란하다. 왕이란 “사금을 모아 황금을 빚는 불”이고 “사토를 모아 첨탑을 쌓는 물”이며 “모이면 가장 위대한 일조차 쉽게 성취해 낼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자”라는 것이다(1권 572쪽). 하지만 이 답변이 “틀렸”(1권 572쪽)다고 준엄히 선고한 케이건은 키타타가 “왕에 대해 알지 못”(1권 572쪽)한다고 말한다. 즉 케이건은 키타타가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제왕론을 신봉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키타타의 제왕론은 왕의 위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함의를 가지며, 선지자의 제왕론과 잘 조응하면서도 이를 보완해 주고 있다.

선지자의 제왕론에서 가장 이색적인 부분은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만 영광에 이를 수 있”(1권 421쪽)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그리고 일견 미사여구처럼 보이는 이 주장은 키타타의 제왕론에서 왕을 “인간의 의지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자”(1권 572쪽)라고 규정한 부분과 만났을 때 실질적인 의미를 되찾는다. 명료하게 서술하자면 왕은 “제멋대로 흩어지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이면 가장 위대한 일조차 쉽게 성취해 낼 수 있는”(1권 572쪽) 사람들의 의지가 모이기 위한 구심점이며, 그 ‘위대한 일’의 성취를 선지자는 “영광”(1권 421쪽)이라고 표현한 셈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선지자와 케이건의 제왕론은 왕을 사람들의 의지가 집중되는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겹쳐지며, 단지 그 의지의 성격에 대해서만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선지자와 케이건은 공히 ‘왕의 자질’로 ‘비범성’을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왕이 사람들의 의지─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를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하는 존재라면, 그만한 지명도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돋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라르가 희생양이 신체적/사회적으로 소수파에 속해 있으며 항상 유표적(有標的)이라고 지적한 것과도 통한다. 그런데 토디는 “평범한 장사치”(1권 393쪽) 출신으로, 제왕병에 빠졌다는 점 이외에는 아무런 비정상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이 때문에 케이건은 그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1권 422쪽) 선지자도 알았으리라 본 것이다. 이것은 훗날 승려들의 논의에서 사모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은 분명”(2권 533쪽)하다고 인정한 발언이 그녀의 즉위를 지지하는 견해로 여겨진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토디가 ‘비범성’이 없어서 왕이 아니라면, 지그림이 왕이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지그림은 자보로의 지배 씨족이 “새로운 수장으로 선출”(1권 481쪽)한 인물이므로 신분적으로는 분명 비범하며, 실제로 자보로 사람들은 그가 칭왕한 후에도 “지그림의 비위를 맞”(1권 482쪽)춰준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복종이 “결국엔 지그림 자보로가 수백 년 동안 지켜져온 전통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반성할 거”(1권 482쪽)라는 확신에 근거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지그림이 가진 신분적 비범성은 “유구한 전통”에서 나왔고, 그 전통은 그에게 “자보로의 차기 마립간” 자리만을 허락했던 것이다(1권 481쪽). 간단히 말해, 지그림이 신분적 비범성으로 “진짜 왕”(1권 475쪽)이 되고자 했다면 그는 자보로 씨족이 아니라 아라짓 왕가의 후계자였어야 했다.

그러므로 『눈마새』에서 왕이 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옛 아라짓의 왕족으로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웅왕이나 대호왕─그리고 전성기의 주퀘도─처럼 개인적 비범성을 토대로 만인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케이건은 전자를 “사과의 왕”, 후자를 “귀환의 왕”으로 구별한 바 있으며(2권 525쪽), 사모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흑사자 모피를 가지고 있”고 “대호가 따른다”는 점을 부각한 것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자들”을 위해 사모의 비범성을 강조한 수사로 해석할 수 있다(2권 538쪽). 이때 ‘사과의 왕’은 전통에 의해 즉위하므로 영웅왕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우게 되는 반면, ‘귀환의 왕’은 추대에 의해 즉위하므로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는 사람”(1권 430쪽)으로서의 필요성을 내세우게 된다.

작중에서 권능왕의 실종 이후 “팔백여 년 동안”(1권 421쪽) 왕이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라짓의 왕족들은 모두 죽거나 실종되어 버렸고, 그럼에도 세계는 “엄청난 정체(停滯)”(4권 202쪽)로 고착되어 “많은 눈물이 흐르”(2권 538쪽)는 일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과의 왕’은 왕통이 끊겼기에 등장하지 못했고, ‘귀환의 왕’은 눈물을 마실 일이 없었기에 요청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주퀘도가 “그 영용함”(2권 452쪽)으로 “거의 국가 비슷한 것까지”(2권 144쪽) 건설했음에도 그가 사라지자 세력이 “사분오열”(2권 144쪽)했던 것은 당시의 북부인들이 왕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탓이라고 여겨진다. 라수의 말대로, 제왕병자들은 “왕의 귀환을 기다릴 수 없어서 스스로 왕이 되어버”(4권 168쪽)렸던 셈이다.

그렇기에 “엉터리 윷가락”으로 말미암아 다시 “이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사실은 새로운 왕의 출현과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4권 203쪽). “편안한 나날”이 다 가고 “피와 눈물의 시대”가 온다면 정치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전면적인 변혁이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2권 544쪽). 이것은 “나가와의 전투를 평생 숙원으로 천명”(3권 26쪽)한 레콘들의 출현에서도 드러나며,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대호왕은 실제로 “여왕 폐하의 군대”(3권 74쪽)를 조직하고 북부의 자원들을 전쟁에 알맞게 재편하여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인 조치와 함께 왕은 도덕의 측면에서도 변혁을 일으킨다. 단적인 예로, 2차 대확장 전쟁기에는 심지어 도깨비들조차 ‘양해론’을 근거로 나가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못했다.

이것은 “법칙의 절대적 수호자”(1권 421쪽)로서의 대호왕이 법령을 통해 도덕의 한도를 조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티나한이 나가들이 “쳐들어온다면, 나는 내게 놈들을 죽일 권리가 있는지 따위를 고민하지는 않을 거”(2권 424쪽)라고 선언하고 오레놀이 이 말을 반박하지 않은 시점부터 ‘양해론’의 동요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북부인들은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범죄 같은 것은 없”(3권 212쪽)다는 식의 ‘무방론’을 채택하지는 않았으며, 지코마 펠독스의 처형에서 알 수 있듯이 북부군의 ‘살육’은 분명 때에 따라서는 “범죄”로 규정되어 “처벌”된다(4권 18쪽). 왕국은 ‘양해론’의 예외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부분에는 이를 계속 적용함으로써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무질서와 혼란”(2권 559쪽)은 방지해낸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까지 논의했을 때, 우리는 케이건의 제왕론에서 교묘하게 혼동한 바를 바로잡을 수 있다. 케이건은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1권 430쪽)여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1권 366쪽)는다고도 믿었기에 왕이 “가장 빨리 죽”(1권 430쪽)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왕은 죽음을 통해서 눈물을 마시는 것이라는 특유의 제왕론을 발명해야 했다. 그러나 ‘생존론’의 논리는 개인에게만 일리가 있을 뿐 왕에게까지 유효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왕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가 아니라 국가 체계를 운용함으로써 백성들의 눈물을 마시며, 따라서 ‘피를 마시는 새’조차 왕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인과는 별개의 차원에 위치하는 왕은 눈물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케이건이 “희생양이 되어야 했”(2권 561쪽)다고 제시한 권능왕이 정작 눈물을 마시지 않았고, 실제로 눈물을 마셨다고 생각되는 대호왕은 요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결국 죽음으로써 눈물을 마시는 일은 ‘눈물 마시기’에 실패한 왕에게만 요청되는 “마지막 희망”(2권 561쪽)이며, 정석적인 왕의 사명은 백성들의 눈물에 부응하여 시대에 알맞은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한히 생성 변화하는 세계에서는 시공간에 따라 유용한 관점이 달라지며 관점의 파괴와 재창조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 니체의 철학과 조응하며, “산양 인질극”(2권 75쪽)을 벌이고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대납하며 관문에 숨어 추적자를 따돌림으로써 세 번이나 유료도로당에 편법을 관철한 사모의 행적 역시 이를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눈마새』에서 ‘양해론’이 기본적인 도덕원리로 자리매김해 있던 이유는 작중의 시점이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1권 7쪽)였기 때문이고, ‘양해론’을 폐기하려는 자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변화의 생성”(4권 202쪽)으로 인해 “생존 자체가 최우선의 목적이 되”(3권 394쪽)는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이며, 대호왕은 이러한 혼란기에 기존의 도덕이 해체되어 사회 질서가 붕괴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법령으로 도덕의 일부를 수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서장에서 언급한 ‘산맥을 넘는 네 번째 방법’으로, 통행료를 낼 수 없고─즉, 현실적으로 기존의 도덕을 준수할 수 없고─관문을 파괴할 결심도 서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대안에 해당한다. 서장의 질문에 비추어 말한다면 현실적으로 가장 지향할 만한 것은 바로 이 ‘왕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종반부까지 공평히 고려한다면, 『눈마새』의 입장으로 지목할 만한 것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다.

 


 

7. 화합의 기적 ‘신은 인간에게 나늬를 주었다’

“하텐그라쥬의 심장탑, 혹은 심장탑의 잔해 위에 우뚝 선”(4권 208쪽) 케이건이 나가를 멸종시키려다 회심하기까지의 과정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에 해당한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우쇠는 케이건에게 “발자국 없는 여신”의 “은혜”를 상기시켰고(4권 243쪽), 아기는 “너의 인간”과 “네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라고 요청했으며(4권 279쪽), 사모는 “나를 희생하여 네 눈물을 지우고 다시 나가들을 사랑해”(4권 306쪽)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각 장면에서 이어지는 케이건의 반박을 고려한다면, 이들이 설득에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또 “다르다는 것을 긍정과 기쁨의 대상으로 여”(4권 317쪽)기라는 세리스마의 당부는 기실 케이건의 반응조차 끌어내지 못했으므로 더욱 미약한 영향력만을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케이건의 회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이 시간의 나늬”(4권 348쪽)라고 지칭된 인물인 데오늬 달비였다고 여겨진다. 발자국 없는 여신에 대한 동료로서의 존중도, 인간들을 완전에 이르게 해야 한다는 신으로서의 소임도, 왕명에 따라야 한다는 아라짓 전사로서의 의무도 거부한 채 나가를 멸절시키려던 케이건이 데오늬와 조우한 뒤에는 돌연 그 의지를 거두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륜은 “케이건은 모두 뺏겼지만, 어디에도 없는 신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단서로 짚었고(4권 237쪽), 오레놀은 “그의 모든 것이 나가에 의해 상실되었다는 것에 기반”한 케이건의 “증오심”이 그에게 “어디에도 없는 신의 선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의해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전망한 바 있다(4권 239쪽).

륜의 설명이 소략하고 이에 대한 오레놀의 주해도 다소 모호한 탓에, 예의 원리는 흔히 ‘인간으로서는 모두 잃었지만, 신으로서는 나늬가 남아 있다’는 논리로 요약되곤 한다. 그러나 더욱 엄밀히 말한다면, “나의 인간이라는 것은 없”(4권 280쪽)다는 케이건의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신으로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케이건의 증오를 감소시키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나가에게 “모든 것을 파괴”(4권 244쪽)당한 것은 인간 케이건이지 어디에도 없는 신이 아니며, 어디에도 없는 신이 “오랫동안 갇혀 있”(4권 199쪽)었던 이유도 모든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닌 까닭이다. 따라서 케이건이 급격한 태도 변화를 보인 것은 데오늬가 ‘다름 아닌’ 나늬였고, 그래서 나늬와 연동되어 있는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핵심적인 역할을 한 ‘나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이것은 『눈마새』의 결말과 직결되는 중요한 물음이며, 나늬의 정체는 다양하게 언급된 바 있다. 우선 작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나늬’는 “모든 종족에게 아름답게 보”(4권 420쪽)였다는 전설상의 미녀이다. 그러나 “광선의 세계”(4권 350쪽)에서 그리미 마케로우의 모습으로 나타난 륜은 “나늬들이 특별한 거야 전통”이며 데오늬는 “미모가 아니라 달리기로 모든 종족들을 따라오게 만들었”다고 말한다(4권 348쪽). 그리고 케이건은 데오늬가 “과거 그의 아내였던 여인”(4권 347쪽), 즉 “여름”(4권 351쪽)을 빼닮았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보자면 작중에서 나늬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비형의 딱정벌레 ‘나늬’를 제외한다면─“신비한 미녀”(2권 126쪽)와 데오늬, 여름으로 최대 세 명까지이다.

이때 륜의 전언에 따르면 나늬의 특징은 ‘모든 종족들을 따라오게 만든다’는 점이며, 이것은 미모나 달리기 같은 특별한 요소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여름이 나늬였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여름은 데오늬를 닮기는 했으나 나가들을 ‘따라오게’ 만들지 못하고 살해당했으므로, 나늬의 자매인 보늬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찍이 지적되었듯이 케이건이 “아내의 유해를 돌려받”(2권 237쪽)기 위해 “서른 명”(2권 238쪽)의 나가를 물리치는 데는 화신으로서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며, 여름의 죽음이 화신화를 촉발시켰다면 이는 어디에도 없는 신이 처참한 비극에 충격을 받아 “춤이 멈췄”(4권 201쪽)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그리고 “춤추는 자”(4권 201쪽)가 춤을 잊게 할 만한 사건은 역시 나늬의 죽음이었다고 보아야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을 인정할 수 있다면, 『눈마새』의 서사는 신체의 불행에 몰입한 나머지 “복수심에 미친 케이건 드라카”(4권 244)에게 동화되었던 어디에도 없는 신이 자아를 되찾고 “변화를 재생산”(4권 200쪽)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바람의 신은 압도적인 비극을 겪은 “극연왕의 오라비”(4권 209쪽)에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한 끝에 기억과 의지를 잊어버렸으며, 그래서 다시 “기억을 떠올려”(4권 204쪽)야 하는 상태가 되었던 셈이다. 그가 신으로서의 소임을 방치한 것은 이 망각의 탓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케이건이 자신이 화신임을 깨닫고도 “나는 최후의 아라짓 전사이며 마지막 키탈저 사냥꾼”(4권 243쪽)이라고 느꼈던 것은 신으로서의 감정과 기억이 아직 “무의식 중에”(4권 202쪽)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전제했을 때, 데오늬와의 조우로 케이건의 증오가 퇴조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된다. 우선 여름의 얼굴을 한 나늬를 또 실패시킬 수는 없다는 점에서 복수자로서의 열정은 약해지는 반면, 나늬의 정체를 깨달음으로써 촉발되는 “갑작스러운 기억의 요동”(4권 278쪽)은 신으로서의 감정이 “그의 정신 속에서 부상”(4권 279쪽)하도록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케이건의 “나가에 대한 증오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4권 239쪽)면서 “나가 살육신”(4권 207쪽)은 다시 어디에도 없는 신으로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케이건이 “처참한 여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4권 351쪽)린 것이 학살 중지의 징후라면, “나는 그들에게 나늬를 주었”(4권 352쪽)다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그의 몸을 뒤흔들었”(4권 351쪽)던 것은 신으로서의 자아가 복귀하는 징후이다.

따라서 위 같은 나늬의 중차대한 의의를 고려한다면, 작중에서 나늬는 인간들을 향한 어디에도 없는 신의 애정과 책임의식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발현을 대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늬를 통해 표출되는 어디에도 없는 신의 의지는 곧 새로운 변화와 생성에 대한 옹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변화는 항상 기쁜 것만은 아”니며 “때론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점(4권 398쪽)을 충분히 체감했음에도 케이건이 결국 “다시 윷가락을 던지”(4권 378쪽)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나늬”라는 사실이 “부정”해도 “계속 그에게 되돌아”오는 진실이기 때문이다(4권 348쪽). 이렇게 본다면 나늬는 긍정적 변화를 기대해도 좋은 근거이자 그러한 변화를 유도하는 주체이며, 그 성공에는 실패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부여되어 있는 셈이다.

이때 나늬가 성공했을 경우에 펼쳐지는 “우리의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4권 293쪽)은 종반부에 나오는 시모그라쥬의 모습에서 간취된다. “한계선 이남과 이북의 유일한 소통 장소”(4권 370쪽)가 된 이 도시는 “건설과 파괴, 환호와 욕설, 고귀함과 비루함”이 “뒤섞여 끓어오르”는 곳이다(4권 364쪽). 이러한 시모그라쥬의 변화는 “동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매혹적인 튀기”라는 표현으로 요약되며(4권 363쪽), “이곳에서 금편 10만 닢짜리 부자는 부자 축에도 못 들어간다”는 세미쿼의 언급은 평화적인 교류를 통한 “번영의 합창”이 어느 정도로 폭발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4권 363쪽). 비록 이것이 “시모그라쥬를 약올리기 위”(4권 372쪽)한 또다른 전쟁의 단초가 되기는 하지만, 공존을 통한 상호 발전의 유익성은 널리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늬는 바로 이러한 긍정적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갈등을 불식시킨다는 점에서 왕과는 구분되는 해결사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왕이 현실적인 타협에 치중하는 중재자인 반면 나늬는 “모든 종족을 따라오게 만”(4권 348쪽)드는 특별함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의지를 뒤바꾸도록 하며, 이로써 사람들은 손해를 보았다는 인식 없이 갈등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오늬는 “누가 저를 해친다면, 제가 죽”고 “그를 먼저 해친다면, 그가 죽”지만 “그러지 말라고 설득하면, 그러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이상적인 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3권 445쪽). 그리고 키베인이 “꽤 물들”(4권 56쪽)어버리게 하고 갈로텍을 “뭔가에 말려들”(4권 106쪽)게 했던 데오늬의 “특이한 점”(4권 107쪽)은 이를 가능케 하는 무의식적인 힘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사람들의 대립에는 화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3권 446쪽)으며, 이것은 나늬의 성공이 매우 드물게만 이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장에서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나늬의 방법’은 곧 ‘산맥을 넘는 세 번째 방법’인데, 하늘길로 산맥을 넘기 위해 필요한 “딱정벌레에는 두 사람까지만 탈 수 있”(1권 365쪽)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상에서는 ‘왕의 방법’으로 두억시니들을 통과시킨 사모조차 넓게는 “나늬 같”(2권 142쪽)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유료도로당 측이 “가장 귀중한 것을 잃은 자들에게 더 이상의 돈을 지불하라고 요구할 수 없”(2권 123쪽)다는 명목으로 손해를 보기는 하지만 이는 두억시니들을 “긍휼히 여기”(2권 139쪽)기에 자청한 것이므로, 양측 모두 만족했다는 점에서는 ‘나늬의 방법’과 동질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장에서 제기한 두 번째 질문에 비추어 말한다면, 『눈마새』의 입장은 가슴으로는 ‘나늬의 방법’에 끌리면서 머리로는 ‘왕의 방법’을 지지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어떻게 산맥을 넘어갈 것인지만을 생각한다면 ‘왕의 방법’만으로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나늬의 방법’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이 방법이 ‘왜 산맥을 넘어야 하는가’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축하는 까닭이다. 예컨대 “변화의 대가”로 “증오와 반목이 영원”해질지 모른다는 사모의 우려(4권 395쪽)에 대해 라수는 “다른 세 종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족도 완전성을 획득할 수 없”기에 “네 종족은 모두 동시에 완전성을 얻어야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4권 396쪽). 결국 나늬가 추구하는 범종족적 화합의 가치는 세계의 법칙 차원에서 요청되는 이상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이제 본작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終. 유해의 폭포 완전성은 불완전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타자(打者)의 환상세계를 관통해 존재하는 인물인 가이너 카쉬냅은 『눈마새』에도 인상적인 자취를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나가 사회에서조차 “악몽 같은 책”(3권 331쪽)으로 이름이 높은 〈생각하는 동물들〉의 저술일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4권 216쪽)에 대한 역설을 언급한다. 생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지만,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할 경우 “그 자는 그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4권 216쪽). 이에 따르자면 생의 심오한 의문을 푸는 일은 전제와 목표가 상충하는 모순적인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중의 많은 모순이 그렇듯, 이 이야기는 사실 소설의 다른 부분과 연결해서 보아야 해명되는 일종의 복선이기도 하다.

이때 짧지만 중추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유해의 폭포가 “지복에 찬 소멸”의 와중에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자를 조심”하라는 니름을 남겼다는 점이다(3권 451쪽). 훗날 라수는 이 조언이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의 인생은 완성되지 못한 것, 부족한 것, 불결한 것, 경멸할 만한 것으로 전락”(4권 397쪽)한다는 사실을 경계한 말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생은 원래 무죄이기에 완성하려, 속죄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선민 종족들이 얻어야 하는 완전성은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4권 398쪽). 왜냐하면 생에 완전’이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순간 현재의 삶은 불완전한 것으로 전락하며, 현재의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완전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전성은 “고정이고 정체”이기보다는 “무수한, 끝없는 변화”이고(4권 398쪽), 〈생각하는 동물들〉의 서문에서 지적된 역설도 이 견지에서는 해결될 수 있다. “생의 심오한 의문”(4권 216쪽)은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생 내내 부단히 파악되고 또 답변되는 동태적인 성격의 의문인 것이다. 이것은 더 큰 완성을 향한 자기극복이 살아 있는 한 끝없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의 견해와 맞물리며, “그 모든 부분은 불안하며 애써 형성된 균형은 다음 순간 언제나 무너”지지만 그 덕분에 “어떤 순혈보다 동적인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 종반부의 시모그라쥬에 대한 묘사(4권 363쪽)와도 조응하고 있다. 즉 “변화하는 완전성”(4권 398쪽)이란 끊임없는 극복을 통해 새로운 균형을 형성하는 과정의 반복으로써 유지되는 어떤 활기찬 경지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서사의 귀결점을 고려하여 앞에서 제시되었던 여러 초점들을 재정렬해 본다면, 그 배치는 ‘무방론’-‘생존론’-‘암각문’-‘왕’-‘나늬’의 순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중 ‘공평함’이 포함된 ‘무방론’이 삶을 긍정하는 논리라면, ‘피를 마시는 새’에 대한 반작용인 ‘생존론’은 “목가적인 살육의 나날”(1권 84쪽)을 이어가는 것에 특화된 삭막한 기예이다. 또 이러한 입장들이 언제든 유동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장치는 바로 ‘암각문’이고, 이에 근거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자로 지목되는 존재가 ‘왕’과 ‘나늬’이다. 여기서 ‘무방론’과 ‘나늬’는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4권 316쪽)에 대한 입장 차이에 의해 서로 구분되는 것이며, 둘 사이에 정렬된 세 초점들은 차례대로 연계되어 이러한 차이를 도출해내는 역할을 맡는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무방론’은 작중에서 시우쇠와 아기가 공통적으로 요청한 태도이므로, 사람들이 완전성을 얻는 방법은 이와 유관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무방론’에 따라 삶의 고통을 기쁨만큼 기꺼이 긍정하기 위해서는 극연왕이 선언한 대로 “내가 가진 순간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강자”(4권 24쪽)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생애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발톱을 곤두세운 야수였”(2권 456쪽)다는 케이건의 인식에서 드러나듯 압도적인 비극을 겪은 사람이 삶의 고통을 긍정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어디에도 없는 신조차 케이건의 비극에 경도되어 자아를 잃어버렸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가 개인의 의지만으로 극복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각광받는 존재가 바로 “눈물을 마시는 새”(4권 398쪽), 즉 왕이라고 생각된다.

왕은 기존의 도덕을 세계의 변화에 맞게 변용하여 법령으로 수호하는 자이며, 이를 통해 집단의 “질서와 평화”(2권 559쪽)를 유지하고 ‘피를 마시는 새’의 활동을 규제하는 자이다. 그렇기에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1권 430쪽)이고, “위대한 왕”(1권 572쪽)은 통치로써 눈물을 마시며, 무능한 왕은 “희생양이 되어”(2권 551쪽)서라도 눈물을 마셔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의 사명이 성취되어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공격”(2권 558쪽)하지 않고 “공포와 증오”(2권 559쪽)도 사라진다면, 긍정하기 버거운 불행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라수가 “변화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이유로 “우리에겐 왕이 있”다고 언급한 까닭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4권 398쪽). 다시 말해 왕은 완전성의 획득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암각문에서 보이듯 사람들의 마음이 상황에 따라 어디로든 유동하는 것이라면, 선민 종족들 전체의 완전성은 왕에 의해 ‘피를 마시는 새’가 억제되어 삶을 비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때 극대화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완전성의 증대를 위해 더 효과적인 것은 ‘무방론’보다는 나늬의 방법이 된다. 왜냐하면 ‘무방론’은 제대로 견지되는 경우에도 ‘피를 마시는’ 일을 사실상 허용하는 반면에, 나늬는 타인에 대한 긍정을 유도함으로써 ‘피를 마시는’ 일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하자면 본작의 전체적인 주제는 ‘무방론’의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생존론’으로 그 한계를 지적하고, ‘암각문’을 단서로 삼아 ‘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며, 이를 통해 ‘나늬’의 지향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구성으로 직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서장의 비유에 맞추어 표현하면 ‘정체보다 변화가 나은 까닭’은 곧 ‘산맥을 넘어야 하는 까닭’이고, ‘변화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방법’은 곧 ‘산맥을 넘는 방법’이며, ‘생존론’이 정지라면 ‘양해론’은 통행료 납부이고 ‘무방론’은 관문 파괴이며 ‘나늬의 방법’은 하늘길 개척이고 ‘왕의 방법’은 대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존론’은 “내일을 계속 오늘로 만”(4권 332쪽)들 뿐 전진의 방법이 아니고, ‘양해론’은 “위기 상황”(2권 557쪽)으로 통행료를 낼 여유가 사라지면 무용하며, ‘무방론’은 유료도로당을 분쇄해 안전한 도로를 없애버린다는 점에서 모두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에 최대 다수가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대납자를 내세워 유료도로당과 타협하거나, 혹은 드물게나마 하늘치가 나타나 사람들을 실어날라 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가 변화해야 하는 이유는 완전성이불완전성을 전제하지 않기 위해─변화해야 하기 때문이고, 변화에 따르는 고통에도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와 함께 ‘피를 마시는 새’의 억제 또한 요청되며, 그렇기에 현실적으로는 ‘왕 = 눈물을 마시는 새’가 필요하고 이상적으로는 나늬를 통한 화합이 지향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눈마새』가 여러 주제들의 연결을 통해 최종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사유는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내일이 오늘의 단순한 확장에 불과할 뿐이라면 삶은 의미를 잃”기에 “정체보다는 전쟁이 낫”지만 그럼에도 “더 좋은 변화들을 고”르는 것이 “고결”하다는 키베인의 말(4권 379쪽)에는 이러한 입장이 집약되어 있으며, 결말까지 두 장면을 남기고 등장하는 이 발언으로 본작의 의도는 사실상 갈무리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눈마새』의 주제를 일관된 관점에 따라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보자면 결국 본작은 서사적으로 완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제적으로도 완결되어 있으며, 서사와 주제 또한 서로 조화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서장에서 언급했듯이 작중의 여러 화두들을 통합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며 하나일 수도 없다. 하지만 본고가 유료도로당을 활[弓]로 삼아 유해의 폭포까지 쏘아짐으로써 보여준 독해의 줄기는 분명 정론(正論)의 변천이 거쳐갈 균형점 중 하나일 것이고, 소설의 해석 역시 완전성처럼 동태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위치만으로도 의미가 생성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결론적으로 본작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궁극적으로 주장하려는 바는 사실상 이것이 전부이다.

『눈마새』는 변화를 긍정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소설이다.”

본고는 어디까지나 효시이므로, 나머지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跋. 하늘치 등정 하나를 상대하려면 셋은 필요하다

발표 이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눈마새』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관련 전공의 학위논문 중 원문이 제공되는 것은 강소향(2011)과 김혜영(2011)이 있을 뿐이고, 송혜성(2013)은 학사학위 논문이며 문일식(2014)은 열람이 제한되어 있다. 또한 학술논문으로서 본작을 조금이라도 다룬 것은 엄숙희(2024)가 사실상 유일하며, 그나마도 왜 2024년인지를 생각한다면 2023년에 이르러 『눈마새』가 해외에 출간된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는 점이 주효했을 것이다. 기실 타자(打者)의 소설에 장르 연구로서가 아니라 문학 연구로서 접근하는 조류는 2024년에야 그 기미가 보일 뿐이며, 그마저도 온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조차도 비평계의 무관심에 비하면 차라리 풍족한 편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위 같은 현실에서 『눈마새』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 인터넷과 팬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동안 본작을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일관된 관점으로 재서술하는 작업이 제약되어 온 것 역시 이해할 만하다. 그렇기에 선구적인 비평을 남긴 하 모(某)는 소설의 주제를 섣불리 추단한 뒤 이에 근거해 비판을 수행하는 본말전도를 범했고, 보다 주제의식에 다가간 글을 산출한 한 모(某)도 상세한 근거를 들어 논지를 강화하지는 못했으며, 빼어난 철학적 분석을 보여준 데 모(某)조차 본작의 주제들을 명료하게 통합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않았고, 독창적인 해석을 선보인 ‘110.46’에 이르러서는 서사구조의 해명에 몰두한 나머지 주제적인 분석을 무시하는 경우도 등장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가운데 슥 모(某)와 ‘Kaldwin’으로 대표되는 상당수의 논자들은 본작을 관통하는 주제가 ‘사랑’이라는 해석을 다수설에 위치시켰고, 다른 한편에서는 케 모(某)와 마 모(某)를 위시한 일군의 논자들이 ‘다름에 대한 긍정’을 본작의 결론으로 제시하는 흐름을 일반화하는 데 거의 성공하였다. 그러나 빛나는 통찰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논의 공간의 특성이 유발하는 작품 분석의 소략함으로 인해 이러한 관점들은 대개 폭넓은 근거와 연결되지 못하고 개인의 감상을 공유하는 선에서 머무르곤 했다. 물론 이 같은 미비점은 소설의 주요한 화두들을 대부분 파악하고도 정작 주제 통합은 자의적으로 단행한 강소향(2011)에서도 일부 발견되며, 나아가 김혜영(2011)에서는 독서의 성실성이 의심될 정도로 많이 간취되는 것이기도 하다.

본고가 그동안 『눈마새』에 관한 논의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검토하고도 굳이 ‘효시’를 자처한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극적으로 광오하며 논박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하지만, 실은 오히려 그 이유에서 적시된 것이다. 왜냐하면 근거가 상세하지 못한 비평은 이처럼 폭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내포하며, 기왕의 해석들에 비추어 본고가 지니는 특성은 서사 속에 산재한 주제의 편린들을 폭넓게 찾고 초점별로 분류하여 최초로 정렬해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고의 관점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전체로서 독해하고 통합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이 요청되며, 분량으로든 밀도로든 이에 필적하는 저술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래서 효시이고, 이제야 효시이며, 효시이기를 목표로 선택한 글인 셈이다.

실제로 『눈마새』에는 아직 본고에서 포괄하지 못한 화두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중에는 새로운 정론(正論)의 벼리가 될 만한 것들도 존재한다. 예컨대 ‘독약을 마시는 새’와 ‘물을 마시는 새’는 변화에 대한 태도라는 점에서 『폴라리스 랩소디』의 ‘복수’와 ‘자유’를 연상시키는 매우 흥미로운 상징이다. 또 소설의 전반부에 걸쳐 륜이 꾸는 꿈들은 인물 해석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수련자에서 용인이 되었다가 세계와 합일되는 륜의 생애 역시 하나의 주제를 형성할 만한 초점임이 확실하다. 여기에 선민 종족들과 그들의 사회에 관해서는 각각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과 ‘피를 마시는 새’를 억제하는 기능만이 초탐되었을 뿐이며, 용이나 군령자가 주제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 논하려면 또 장대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본작의 거대한 편폭과 심오한 상징들을 주해하고 소화하는 일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소설로서의 『눈마새』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 한,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서의 『눈마새』는 언제나 새로운 담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일이 오랫동안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만일 김보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계기로 2019년 6월경 하퍼 콜린스에 단편집 판권을 수출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면, 2023년에 하퍼 콜린스는 물론 펭귄 랜덤하우스, 그루포 플라네타, 아셰트에까지 판권이 수출된 본작을 두고 유사한 반향을 기대하기에도 2024년이 너무 늦지는 않았을 터이다. 게다가 꼭 부차적인 권위를 빌리지 않더라도 『눈마새』가 그런 작업을 요청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기도 하다.

그리하여 본고는 감히 빛을 탄로내려는 등정자가 모이기를 소망하며, 셋을 부르는 하나가 되고, 또 셋으로도 상대하기 버거운 하나가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지금의 관점이 충분히 여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리려는 것은 단지 이 때문이다. 혹 이것이 성공해 요술쟁이와 대적자를 불러낼 수 있다면, 그때에 이르러서야 효시가 길잡이로서 가없는 여정에 합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기다림은 고통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본고는 되도록 그것이 즐거움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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