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승려가 있다. 40여년의 수행을 거쳐 어느덧 나이 80을 바라보는 그는 스스로 도고마성-도가 높으면 마가 극성을 부린다-을 조심할 정도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듯 보인다. 그는 물욕도, 명예욕도 없으며 심지어는 깨달음에 대한 집착도 없다. 무염(無念)이라, 아무런 고뇌와 욕망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법명이다.
병원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푼 탓에 무염은 ‘고통의 인연’이 될 줄 알면서도 그와의 연을 맺는다. 공양간 보살 형태로 무염의 근처에 기거하게 된 이는 이름도 없이 ‘아가’라고 불리는, 똬리를 튼 뱀 같이 매끄러운 곡선을 지닌 여인이다.
그리고, 일련의 일들로 무염은 뒤늦게 자기 안에 무성한(茂) 욕망의 열기(炎)를 느낀다.
그 오랜 시간을 수행에 힘써왔건만 이제 와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염의 당혹감은 힘으로 방출된다. 그는 목탁을 세게, 더 세게 두드린다. 호시탐탐 그의 수행을 방해했던 마(마라 파피야스)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 거세게 그를 조롱하고 비웃는다.
결국 무염은 이 모든게 마라 파피야스(마, 마구니)와 그의 딸 ‘라가’의 계략 임을 깨닫는다. 그는 석가모니가 그러했듯이 지신(땅의 신)을 불러내그 자신을 증명하고자 손바닥을 땅으로 향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석가모니가 느꼈듯 지신이 올라오기 위해 땅이 진동함을 느낀다.
그러나 실상은 여인을 ‘라가’라고 믿은 그가 목탁으로 그녀의 머리를 거세게-피가 날 때까지- 내려치는 살생을 저질렀을 뿐이며, 아마도 마지막에 느낀 진동은 그녀가 쓰러지면서 난 것이리라.
아! 수행은 무엇이고 도(道)는 다 무엇인가?!
무염이 평생을 바처 온 마음으로 정진, 수행한 결과는 살생이다. 깨달음에의 집착이나 조바심마저 꺼려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아 노력하던 그에게 일생의 결과가 이거라니!
무염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할 수 없는 고집 때문이리라. 모든 것이 마음에 있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색이 공과 다르지 않은 헛된 것이므로(색불이공色不異空)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음을, 삿된 욕망이 일었음을, 까짓것 쿨하게 인정하면 안된단 말인가? 인정하되, 그것이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며 감각은 영원치 않을 것이니 스스로에게 가라앉을 시간을 좀 주면 안되었던 것일까? 그는 어째서 그토록 거칠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무염이 느낀 열기는, 그 스스로가 다스릴 수 없을만큼 강렬했던 것일까? 저절로 잦아들 수 없는 거센 불길이었던 것일까?
줄거리와 별개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여인의 이름이었다. ‘아가’. 흔치않은 이 이름은 그녀가 의지할 곳 없는 고아 출신이며 누구에게도 돌봄받지 못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라가’와 단 한 자음(ㅇ과 ㄹ)만 다름으로써 글 속에서 그녀의 역할과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녀에 대한 몇 없는 묘사 중
곡선의 몸매로 그런 몸짓을 하니 매끄러운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트는 것 같았다.
역시 마라 파피야스가 뱀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으며, 라가가 그의 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끝으로, 결말에 대한 개인적 의견이다.
무염이 치매라는 설정은 좀 속상(?)했다. 무염이 본 팔뚝의 비늘, 무염이 듣는 조롱과 놀림의 목소리 등은 마지막 의사의 설명 탓에 모두 ‘치매로 인한 환각, 환청’으로 간단하게 치환되어 버린다. 그렇게 ‘빠르고 정확한’ 진단과 처방은, 끝없이 삿된 유혹에 노출되어 시달리면서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무염의 40년 노력을 무척이나 가볍게 만드는 것 같다.(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매우 개인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개인 취향으로는, 무염이 40년간 내내 마라 파피야스와 끝없이 싸웠고 그의 성공이 코앞에 있었으나, 마침내 패배하고 마는 느낌이- 더욱 절절하고 안타깝고 여운이 남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할까, 이 글에 대해서는 브릿G에 있는 덕에 읽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 오직 만족할 뿐(오유지족吾唯知足)이다. 매번 불경 표지만 실컷 구경하는 엉터리 불자에겐 너무나 반갑고, 재밌고, 안타깝고, 인상깊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