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욕망과 체념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짐승 (작가: 붕붕, 작품정보)
리뷰어: 주렁주렁, 17년 10월, 조회 181

* 본 리뷰에는 미스터리 소설 [짐승]의 스포일러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해당 소설을 먼저 읽고 리뷰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그런 일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너는 강한 사람이라 그런 일을 봐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겠지. 그런 일은 너랑은 아무 상관없는 듯 갑옷을 입고 멀리서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고. 하지만 거리를 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철판이나 갑옷도 다 소용없어, 아무도 그렇게 강하지 못해. 죄책감이 악령처럼 따라다니면서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으면 절대 마음 편히 못 살아. 그 구역질나는 일들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때까진. 그런 게 바로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거든. 이번 일도 꼭 그래. 그런 것들이 고삐풀린 유령처럼 네 속을 휘젓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상처만 입히게 될 거야.”

에들렌두르는 크게 한숨을 지었다. “모든 게 아주 커다란 빌어먹을 늪이야.”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저주받은 피(영림카디널, 2007)] 中

 

여성으로서 이 장르의 팬이 된다는 것은 시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운명을 함께할 여성 캐릭터를 찾는 것은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운 한국 언론 기사를 읽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신원 미상의 시체 또는 언제 죽거나 구출될지 알 수 없는 감금된 여자 대신, 그저 남성 캐릭터의 연인이나 아내 역할에 감정이입을 해도 죽기는 매한가지다. 여성이 탐정(형사)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경우는 다를까? 그녀에게 다행히 죽음은 찾아오지 않더라도 납치되거나 강간당할 확률이 높아진다. 매력적인 연인이 알고 보니 범인이거나 범인의 사주를 받은 인물이라는 설정도 드물지 않다.

이다혜의 [어른이 되어 더 큰 욕망이 시작되었다(현암사, 2017)] 中

 

붕붕 작가의 [짐승]을 다 읽고 난 첫 번째 소감은, 좀 난감하네 였다. 이틀 정도 시간이 흘러 그 동안 곱씹은 [짐승]에 대한 느낌은, ‘많이 난감하네’ 였고. 첫 화를 읽기 시작해 마지막 화까지 다 읽을 때까지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가독성이 좋고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짐승]은 다섯 명의 캐릭터가 각 화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각 주인공들은 저다마 독자의 기대를 배신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화의 주인공인 ‘장근덕’이 술에서 깨 일어나 보니 방 안에 모르는 여자 시체가 있다. 그의 필름은 끊겼고 암만 생각해봐도 이 집에 출입 가능한 사람은 없고 영락없이 자신이 범인으로 몰릴 것 같다. 장근덕의 방은 밀실이고 여기까지 보면 밀실 추리같다. 그가 기억하지는 못하나 뭔가 음모에 휘말렸을 것이며 하나씩 단서를 모아가며 자신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을 것이다,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깨진다. 장근덕이 시체를 운반하기 좋도록 토막내는 방식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요 캐릭터인 ‘이진수’는 실직한 전직 경찰이다. 이진수는 실직과 함께 이혼했고 지금은 근근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고교 동창인 ‘도미애’의 연락을 받고 동생인 ‘미옥’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실의에 차 있는 실직한 전직 경찰, 갑자기 찾아온 갑부 여자, 너무 쉬워보이는 여자의 의뢰. 하드보일드 소설의 도입부 같다. 그는 단순한 의뢰인지 알고 받아들였다가 더 큰 음모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파헤치고…..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기대 역시도 바로 깨진다. 그는 알콜 중독자라거나 그냥 실의에 찬 전직 경찰이 아니라 페도필리아 성향으로 사고를 쳤다고 의심받았고 무혐의 처분됐지만 어쨌든 그 일로 잘렸기 때문이다. 왠만하면 주인공이 되기에는 어려운 캐릭터이다.

두 사람이 주인공인 화가 끝나면 약간 숨 고르기로 ‘미옥’이 주인공으로 나오다가 시체 처리를 부탁받아 길을 나선 두 남자 ‘오동구’와 ‘최준’이 등장한다. 언뜻 보면 두 친구의 로드 무비 같기도 하다. 목적이 시체 처리일 뿐. 그렇다고 이 둘이 시체 전문가인 것은 아니고, 좋아하는 여자의 부탁을 받은 것 뿐이다. 장근덕은 자신의 방 안에서, 오동구와 최준은 동승한 승용차에서, 이진수는 사회적으로 매장된 상황에서, 네 남자 캐릭터는 각각의 폐쇄된 밀실이라는 공간에 처해있다. 더불어 네 남자의 공통점은 채워지지 않은 성적 욕구이다.

[짐승]은 시작부터 여러 가지 문제를 독자에게 건네는데

1) 죽은 여자는 누구인가?

2) 누가 죽였는가?

3) 어떤 방법으로 밀실에 들어왔는가?

4) 살해 동기는?

5)  시체와 캐릭터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체도 신원미상이고 범인도 미상이고 살해동기도 짐작가지 않고 심지어 누가 탐정 역할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캐릭터 몇몇과 여자 시체 하나가 제시되었을 뿐이다. 때문에 여러 겹으로 쌓여있는 미스터리는 시작부터 강력하고 이를 풀기 위해서는 번갈아가며 주인공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의 속도감은 빠르고 중간중간 묘사, 특히 대사가 좋다. 짜임새 있으면서 부지런하고 그러면서도 과잉이 적다. 매끈한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뒤로 갈수록 묘한 부분을 두 가지 느꼈는데 하나는 앞서 말했던 네 남자의 공통점인 성욕이다.

[짐승]은 시작부터 누구는 숫총각이고 누구는 페도필리아이고 누구는 모쏠이고 식으로 이들의 성욕은 채워지지 않았고 채워질 가능성이 별로 없으며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초반 승용차에 동승한 두 사람 부분에서는 성욕이 좀 적어보였지만 뒤로 갈수록 중요해진다. 이 넷에게 성욕은 중요한 동기이고 중요한 결핍이며 또한 당연히 채워져야 할 것인데 못 채워졌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지금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도미애와 도미옥의 성적인 욕구는 왜 없냐는 것이다.  [짐승]의 중요한 캐릭터이자 사건의 중심인 미애와 미옥 자매에게 부여된 건 짜증, 열등감, 질투, 분노 이런 감정들이다. 이들은 소설에서 마치 ‘감정’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세탁소에서 드라이클리닝 하고 나온 캐릭터처럼 말끔하고 깨끗하다. 네 남자에 비교하면 그렇다. 이 빈자리가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커지면서 팜프파탈이나 시체로서의 기능적인 역할이 빈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하나는 [짐승]에 담긴 일종의 ‘체념’이다. 이 소설에서는 총 세 명의 캐릭터가 살해당한다. 우선 제일 부자인 캐릭터는 죽지 않는다. 가장 가난한 캐릭터도 죽지 않는다. 부자가 맡긴 일을 해낸 사람도 죽지 않는다. 그럼 누가 죽느냐. 부자를 질투한, 부자의 것을 욕망한, 주제파악 못하고 부자의 것을 감히 넘본 캐릭터가 죽는다. 게다가 그냥 죽는 것도 아니다. 누구는 죽음이 조작되고 누구는 암매장된다.

[짐승]이 초반에 던진 문제 중 4번까지는 다 해결되지만 5번은 남는다. 요즘 세상에 권선징악을 말하는 건 촌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이 시궁창인데 말끔한 선악 구분 따위 있을쏘냐 싶다. 현실이 다층적이니 소설도 다층적인게 당연한 듯 싶다. [짐승]은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갖고 와 꼬인 매듭을 푼다. 하지만 달리 보면 어느 것도 해결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짐승]에서 피해자의 시체는 여전히 암매장되어 있다. 특히 살해당하고 조각내어지고 암매장 되어 있는 여자 시체는. 그녀는 독자에게 누구인지 밝혀졌을 뿐 여전히 신원미상인 상태로, 골방에서 땅 속으로 있는 장소만 바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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