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가 제1언어가 아닌 청인으로서 조심스러운 발언입니다만, 한국 수어는 한국어와 대조했을 때 상당한 차이와 제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세계 각국의 수어가 여러 이유로 그 나라의 문자언어 및 음성언어와 큰 차이를 가집니다. 이 대부분의 차이와 제약은 수어가 기본적으로 손동작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손동작이나 제스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쉽게 따라 하고 이해하며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거기다가 손동작과 제스처에는 필연적으로 시간 소요가 많이 발생합니다.
“말이 길면 옮기기가 벅찹니다.”
그리하여 수어는 시간적 제약, 어휘의 제약, 문법의 제약을 받습니다. 일례로 한국 수어는 한국어와 달리 조사나 어미 부분이 많이 생략되는 제약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아예 한국어와 한국 수어가 각각 교착어와 고립어라는 형태론적으로 서로 다른 언어라고 설명되기도 합니다. 한국 수어가 제1언어인 사람은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 이러한 문법적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무성영화 변사라는 직업이 끼게 되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변사는 단순히 상영되는 화면을 설명하는 역할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몰입감과 재미를 주기 위해 상당한 입담을 자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무성영화의 변사는 대본 자체도 길고, 대본 외에 없는 말도 상당히 많이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판소리로 대표 되는 우리나라 극 문화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반복되고 과장되며 장황한 표현들, 공연 상황에 따라 전개되는 관객과의 적극적인 교감 등이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에게는 상당한 제약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물론, 자막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도움은 됩니다. 배리어프리를 표방하여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단순히 배우의 대사만 자막으로 남기는 게 아니라 배경음악이나 세부적인 정보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요즘에도 적극적으로 상영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뮤지컬 무대 역시 배리어프리로 진행되는 작품이 소수나마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수어와 음성 및 문자언어는 다릅니다. 제약도 있습니다. 어휘와 문법,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시간과 방식에서 차이와 제약이 발생합니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에게 가장 좋은 것은 결국 상세한 자막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바를 수어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수어 통역을 작게라도 제공하며, 공공 서비스에서도 영상통화를 이용한 수어 통역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럼 좀 줄여야겠네.”
그리하여 아침은삼겹살 작가님의 <말 없는 영화는 하룻밤에 몇 리를 갈 수 있을까>에서 절제된 표현을 보여줍니다. 변사인 김한규는 훌륭한 입담보다, 간결하지만 분명하게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박동호가 자기 어머니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온 수많은 농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절제된 표현은 단순히 영화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작품 전반의 문장이 짧고 간결합니다. 웹소설의 작법을 따르고자 간결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관형사와 부사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문장들. 사용되더라도 화려하게 쓰이지 않는 문장들. 그리고 이러한 단순한 문장 구조만큼이나 단순하고 간결하게 절제된 감정. 이는 수어에서 필연적으로 생략되고 절제될 수밖에 없는 여러 어휘와 문법적 요소들을 문자언어에서도 함께 잘라낸 것처럼 읽게 됩니다.
강당 안은 여전히 말소리가 적었다. 그런데 김한규는 이상하게도 어젯밤보다 더 큰 소리 앞에 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간결하게 절제된 감정 사이에도 남 것은 있습니다. 사람은 즐거움과 아름다움, 감동과 예술에 대한 열망을 타고나는 법입니다. 그것이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같이 절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김한규가 맞이하는 것은 농인들의 침묵이 아니라, 농인들의 열망입니다.
한국에서 수어가 사용되고 교육된 것은 1909년, 수어 통역이 공식적으로 방송에 송출된 것은 1979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나온 일화처럼, 무성영화를 연기하는 변사 옆에 수어 통역이 붙은 일은 실제로 그사이 어딘가에 있을 법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역사적인 상상을 할 수 있도록 좋은 이야기를 써주신 아침은삼겹살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