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아마추어란 그 설익음을 피할 수 없는 법이죠』
2.『이 소설에 질문과 대답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3.『그럼에도 이 소설은 큰 거름이 될 수 있답니다』
<본 리뷰는 “세계관설계자”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리뷰이며, 연재된 회차를 전부 정독 후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아마추어란 그 설익음을 피할 수 없는 법이죠』
주관적인 판단을 전제로 서문을 열자면, 관습적으로 익숙한 ‘소설’이라는 매체는 적어도 기술적인 역량의 영역에서만큼은 타 분야에 비해 평가의 척도가 꽤 명징하게 작동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가령 ‘요리’라는 분야는 재료의 신선도나 익힘의 정도, 부위별 조리법에 따라 보편적 기준을 설정하고 설득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입니다. 반면, 오직 언어로만 조직되는 ‘글쓰기’와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인물·사건·배경이라는 서사의 3요소가 지닌 구체성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직관적 납득이 이루어지곤 합니다. 이 이상의 복잡한 미학적 고찰이 비평의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의 기본 완성도가 전제되어야 하며, 일반적으로 ‘아마추어’로 분류되는 습작 단계의 작품에서는 바로 이 세 가지 기술적 요소의 부실함이 최우선적인 비평적 화두로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감평문을 작성하며 작가님의 심경을 고려해 가능한 한 부드러운 어조를 취하려 노력해 왔으나, 이번에 읽은 <영왕일대기 [부제: 1권 – 류진혁]>(이하 ‘영왕일대기’)라는 작품에 한해서는 오히려 저 ‘아마추어’ 특유의 설익은 기술들을 다시 돌아보는 기초공사에 한 번 눈을 두는 것을 제안하고 싶은 것이 이 감평문을 쓰는 원동력이 될 듯합니다. 빠르게 단정하자면, 이 작품은 치밀한 고찰과 입체적 분석을 거듭할 만큼 구성적으로 완결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심도 있게 들여다볼수록 문장과 묘사, 인물의 조형, 사건의 배치, 나아가 서사의 토대가 된 발상 자체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기본을 이루는 기술적 요소들이 명확하게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즉, “소설을 처음 써보았다”라던 작가님의 사전문맥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인상이라 평할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허락하신다면 이 의뢰하신 감평문에서는 ‘소설’이라는 매체를 구성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작품 안에서 해체하고 그 형태에 대해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논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하지만 느닷없는 혹평에 실망하지 않으셔도 괜찮은 것이, 이 작품에서 관찰되는 대부분의 결점들은, 흔히 소설을 처음 쓰는 ‘아마추어’의 설익은 솜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이 작품이 특별한 단점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닌, 누구나 글쓰기를 시작하며 겪는 보편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가님께서 의뢰를 주시며 ‘칭찬 위주보다는 장점과 단점을 말해주길 바란다. 특히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직설적으로 말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던 만큼, 이 글은 작품에 대한 분석보다는 기초가 되는 피드백 위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앞으로 작가님께서 만날 수많은 독자들 중 단 한 명의 주관적인 의견에 불과하며, 그것이 만족스러운 오답노트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작가님의 판단에 맡길 예정입니다.
2.『이 소설에 질문과 대답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문장과 단어가 창작의 완전한 출발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 편의 작품이 싹을 틔우는 데에는 가장 원시적인 ‘발상’이 씨앗의 역할을 하며, 언어적 글쓰기는 그 발상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욕구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왕일대기> 역시 저에게는 그 원시적인 발상의 흔적이 토대로 먼저 눈에 띄었으며, 인물·사건·배경으로 대표되는 서사의 3요소가 다소 성성하게나마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왜 이 3요소가 독자에게 구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작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가?’라는 원론적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이어질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작가님께서도 스스로 답을 탐색해보신다면 의미 있는 과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이 <영왕일대기>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소설적 발상’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언급하는 ‘발상’이란 앞서 말한 막연한 인지적 깨달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적 발상’이란 한 편의 텍스트를 직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시발점이자, 타 작품과의 차별성을 확보하는 ‘소재적 독창성’에서 기인된다고 설명하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영왕일대기>에서 관찰되는 ‘발상적 소재’는 지나치게 막연하거나 보편적이며, 혹은 소재로서 기능하기 힘들 만큼 진부하고 모호한 범주에 머물러 있습니다. 굳이 짚어내자면 이 작품의 유일한 발상적 소재는 주인공 ‘류진혁’이라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마치 위인전이 특정 인물의 생애를 축으로 집필되듯, 이 작품은 ‘류진혁’이라는 인물의 삶 전체를 서사로 옮기는 것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작품은 ‘류진혁’이라는 거대한 개인의 일생을 평면적으로 나열하게 됩니다. 철없던 학창 시절부터 초능력을 얻어 세상을 구하는 영웅적 모험기, 그리고 군주가 되어 한 국가를 통치하다 생을 마무리하기까지, 그야말로 ‘일대기’라는 부제에 부합하는 일련의 과정을 전부 담아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장대한 일대기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소설적으로 기능할 만한 ‘사건’이 극히 부재하거나, 사건 간의 개연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서사적 동력을 상실한다는 점입니다. 도입부에 배치된 또래들의 평범한 일상은 서사적 사건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단순한 일상에 머물며, 이후 이어지는 초능력의 발현, 악령과의 사투, 왕위 등극으로 이어지는 전개 역시 그 내막과 당위성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손쉽게 모면됩니다. 더욱이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군주로서의 삶 역시 왕정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일차원적인 상상력과 상투적인 인간관계 패턴으로 일관되어 문학적 감흥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요컨대, 본 작품에서 ‘환상(Fantasy)’으로 기능해야 할 소재와 발상, 그리고 한 인물의 일생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진부할 뿐만 아니라, 소설이라는 매체로 재현되어야 할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소설적 발상이 ‘입체적 사건’이 아닌 ‘류진혁이라는 인물’에만 과도하게 침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반지의 제왕’이 절대반지라는 통제 불능의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해리 포터’가 마법학교라는 독창적인 공간적 세계관을 중심축으로 작동한다면, 본 작품은 어떠한 소재가 서사적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군주가 된 류진혁의 삶’ 자체를 지탱하는 데 몰두하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일대기’라는 형식에는 충실할지언정, 그 내부를 채우는 내용물이 관습적인 일상과 근시안적 시선으로 그려진 군주의 생활에 불과하다면, 독자는 이 작품을 읽어야 할 미학적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작품 내부에서 제시되는 초능력의 등급이나 체계 역시 주인공의 왕위 등극과 업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그칠 뿐, 정교하게 구축된 세계관으로서의 비중은 상실되어 있습니다. 냉정히 말해, 이 작품의 배경을 초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21세기 군주제 국가로 바꾸어 놓는다 해도, 서사의 줄기에는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작가가 진정으로 무게를 둔 것은 세계관이나 제도가 아닌 ‘류진혁’이라는 인물 그 자체이며, 그 외의 모든 설정은 인물을 빛내기 위한 부차적인 장신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작가님은 이 작품에 충분히 공감하고 계신가요?
서사를 다루는 매체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척도는 흔히 ‘개연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이는 인물의 언행과 사건, 배경 설정이 보편적인 상식과 인간 심리의 법칙에 얼마나 부합하며 독자의 납득을 끌어내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적 특성상 이러한 사실성을 요구하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작품이 구축한 세계가 독자의 보편적 공감대와 상응하는가’에 대한 원론적인 물음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설정과 인물의 행위, 사회적 묘사는 보편적인 인간 행동 양식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평면화 되어 현실성을 감지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과연 현실의 인간과 사회가 저렇게 반응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의구심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왕일대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회는 실제 인간 사회의 다층적인 역학관계를 거의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부만 훑어보더라도, 당장 지구 전체에 초능력이 발현되는 범지구적 격변이 일어났음에도 그것이 지나치게 손쉽게 보편적인 인지로 정착되는 설정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악령’이라고 명명되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지구를 침략한다는 주장을 사회가 아무런 불신이나 검증 없이 수용하는 모습은, 의심과 불안을 기본 속성으로 갖는 인간 집단의 생리를 간과한 설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에 더해 한낱 학생에 불과했던 개인이 자타공인 ‘왕(王)’의 직위에 오르고, 집단 전체가 이에 즉각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묘사는 입체적인 인간 사회라기보다 단순한 자극에만 반응하는 일차원적인 피조물들의 집합처럼 다가옵니다.
이처럼 현실성의 간극이 무시되거나 생략된 결과, 독자는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적 전개에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일반인이 하룻밤 사이에 애민 정신을 품고 국가를 통치한다는 설정 역시 군주제라는 제도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접근한 결과이며, 그것이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의 시선에서 얼마나 이질감이 심한지에 대한 고찰이 소설 내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장 주인공은 21세기 한반도에서 사회적으로 납득되기 힘든 ‘왕(王)’의 지위를 표방합니다. 현실에서는 선출직 단체장조차 행정 경험의 부재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인데, 주인공은 어떠한 오점이나 유의미한 정치적 갈등 없이 지위를 누리며, 설령 고민이 등장하더라도 단편적인 결단 하나로 상황이 해결되곤 합니다. 고대 사회부터 군주는 어릴 적부터 제왕학을 이수하며 오랜 기간 통치 역량을 훈련받았음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사회 묘사는 지나치게 피상적이어서 기본적인 서사적 개연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인간사회를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생후 2년 된 길고양이 얼룩이가 하룻밤 사이에 사람 말을 배워서 입사시험을 보고 대기업 CEO가 된다.’ 수준의, 아무리 환상을 전제로 한 텍스트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인 소회를 덧붙이자면, 서사를 검토할 때 인물 간의 관계나 대사의 어색함을 지적하며 “과연 이 상황에서 이런 언행이 타당한가?”라고 되묻는 과정은 비평가에게도 가장 까다로운 지점입니다. 타인의 언행에 대한 판단에는 비평가 개인이 가진 주관적 기준이 개입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즉, 보편적인 사회 통념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특정 개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용의 영역일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개인의 취향을 다루는 지극히 사적인 논쟁처럼 비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계란프라이에 케첩을 뿌려먹는 사람과 마요네즈를 뿌려먹는 사람의 차이라고 느껴도 크게 다르지 않죠.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전제로 하는 ‘소설’이라는 서사 매체는, 해당 사회가 공유하는 보편적 상식과 인간 정서의 기저를 바탕으로 구축될 때 비로소 당위성을 가집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사회적 보편성이 간혹 무시되면서도, 그것이 왜 보편과는 거리가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작은 구절을 예시로 들자면, 불가피한 사정으로 친구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혹은 소멸시켰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걔도 참 힘들었을 테니 나중에 밥 한 번 사줘라”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편적인 사회에서 어떤 인식으로 받아들여질지를 한 번 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어색함과 설정적 이질감은 작가 개인의 경험적, 고찰적 깊이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이 작품의 묘사들은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단편적인 사회 문제들을 각색 없이 인용하거나, 특정 상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이고 일차원적인 발상을 그대로 차용해 만든 인상을 줍니다. 학창 시절의 배경이 빈번히 차용되는 것 역시 작가 본인에게 가장 익숙한 경험적 영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족의 자녀가 서민 학교에 차별 없이 재학하거나, 군주가 민간인 밀집 지역에 나들이를 나가는 등 현실 개연성이 결여된 장면들이 태연하게 제시되는 이유도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그것이 작가 본인이 가장 상상하기 쉬운 무언가이기 때문이죠. 반면에 초능력으로 발전된 사회상을 묘사하면서도 북한과 같은 괴뢰 사회가 멀쩡히 운영되고 있거나,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처럼 초능력이라는 격변이 당도한 세상치고는 그 사회적 변화가 정체되어 있거나, 훈련소에 들어간 1주차 신병이 야간행군을 하고 표창장을 받는, 아직 작가 본인이 경험하지 않거나 겪어보지 못 했을 법한 배경들은 부실한 설정직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자신이 쓰려는 모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텍스트 뒤에는 반드시 치밀한 취재와 학술적이며 현실적인 고찰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21세기에 재현된 왕정이라는 제도의 메커니즘을 다각도로 이해해보고, 이 과정에서 초능력이 개입될 때 해당 제도가 어떻게 변용되고 기능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찰이 선행되는 것으로, 비로소 이 작품은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3.『그럼에도 이 소설은 큰 거름이 될 수 있답니다』
떠올려보면 내적 완성도는 부실할지라도 외적인 양식이나 시각적 기교로 높은 평가를 취득하는 작품들이 제법 존재합니다. 최근 개봉해서 화제를 몰고 있는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역시 ‘오디세이아’라는 진부한 신화적 구조를 복잡한 서사적 각색 없이 영상미로 환원해 내 호평을 받은 사례입니다. 다만 이러한 호평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부실한 내실을 가릴 만큼 매혹적인 외적 장치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마련입니다. 영화의 경우 압도적인 영상미나 액션 연출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방식이 될 것이며, 소설에서는 기성 작가에 육박하는 필력이나 정교한 문장 묘사만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아쉬운 감상을 전하자면, 작가님의 역작인 <영왕일대기>는 진부한 소재를 압도적인 필력으로 돌파해 내는 부류의 텍스트는 아니었습니다. 독자가 일차적으로 접하게 되는 문장의 완성도나 인물의 대사 수준은 보편적인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으며, 잦은 비문과 오타는 작품이 아직 미학적으로 정제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물론 반드시 숙련된 기성 작가의 문장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설적 뼈대가 다소 엉성한 데다, 그 구조적 약점을 당장 보완할 수 있다는 신뢰를 확보하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습작 단계의 작품들이 비평의 상위에 오를 때, 간혹 “서사는 사라지고 오직 줄거리만 남았다”라는 지적을 받곤 합니다. 이는 인물·사건·배경이라는 서사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작가가 구상한 줄거리만을 표면적으로 나열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는 아마추어의 범주에 있는 글쓴이들에게 흔히 관찰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몰두하다 보면 서사적 구체성을 재현하는 기술이 미숙하여, 머릿속의 줄거리를 서둘러 옮겨 적는 데 급급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과연 이 <영왕일대기>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이 감평문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저 역시 본작을 “줄거리만 남아 있는 미숙한 텍스트”로 단정하려 했으나, 이 구절에 다다라서 그 생각이 변화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왕일대기>에 남아 있는 것은 줄거리가 아닌 ‘설정’ 그 자체입니다.
일반적으로 ‘줄거리만 남아 있다’는 지적을 받기 위해서는, 그 완성도와 별개로 표면적인 사건의 궤적이 명징하게 들어맞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류진혁’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일대기 형식으로 옮겨놓는 과정에서, 시간의 축이 지나치게 늘어져 사건의 구체성이 오려나간 듯한 인상을 줍니다. 반면 그 일대기를 채우는 설정들은 지극히 설명적인 방식으로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무척 명확한 편입니다. 초능력의 등급 체계, 군주제의 성립 과정, 인물의 혈연관계와 배경 설정 등…. 실제로 작품 내에서 독해되지 않은 정보에 대해 질의했을 때 작가님께서 제시해 주신 답변은 매우 구체적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텍스트라는 형상으로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작가 본인의 관념 속에는 ‘설정’의 형태로 체계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결과적으로 독자인 저는 몇 가지 배경 설정만을 머릿속에 담았을 뿐, 왕으로서의 생을 마무리하고 인간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소회에는 정서적으로 동의하거나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이 작품을 정독한 독자로서 조심스럽게 첨언하자면, 이 <영왕일대기>는 앞으로 꾸준한 퇴고를 통해 완성도를 높여야 할 소설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작가님께서 손끝으로 빚어내고 흘려보내야 할 수많은 습작 중 하나라는 인상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작품의 가치와 노력을 폄훼하며 폐기해야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장이 완벽한 곡선을 지닌 도자기 하나를 얻기 위해 이전에 빚은 수백 개의 도자기를 제 손으로 깨뜨리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00매가 넘는 거대한 분량을 제 손으로 완고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향후 도달하게 될 2,000매, 3,000매의 차기작은 비할 바 없이 압도적인 형태로 완성될 것임을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단단한 집필 노동을 거쳤으며 후속작을 도모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작가님이 가진 글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글을 쓰는 창작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적이란 ‘손에서 펜을 쉽게 놓게 되는 순간’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님은 이미 매우 훌륭하고 단단한 시발점에 서 계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훗날 작가님의 손에서 탄생할 수백 번째의 명작을 위해서라도, 이번 작품에 대해 지나친 자괴감이나 아쉬움을 가지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전히 이끼처럼 달라붙는 아쉬움을 뒤로할 수 없다면, 이 텍스트를 잠시 거두어두었다가 충분한 내공과 세월이 쌓인 후 다시 펼쳐보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 하찮은 감평문이 던진 언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흡수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작가님의 창작 여정을 열렬히 응원하는 독자로서 함께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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