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니셔 비긴즈 공모(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칼날이 향하는 너 (작가: 블루라쿤,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9월, 조회 75

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의 경우 스크린에도 걸리는 유명한 친구들이다. 때문에 이름만 꺼내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퍼니셔는 모르는 사람이 다수일 테니 잠깐 설명하고 지나가려 한다. 펴니셔는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이다. 보통의 히어로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살인하면서 정의를 세우는 방식의 스탠스를 내세우고 있다. 요컨데 다크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퍼니셔는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죽여서 없애버린다. 그렇게 정의가 세워진다고 믿는다.

내가 이 작품의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퍼니셔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았던 까닭은, 이 작품의 초반 분위기가 내게 퍼니셔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초반에 ‘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 없다는 뉘앙스가 폴폴 풍겨나온다. 퍼니셔 역시 범죄자에게 딸과 아내가 살해당했다. 나는 무릎을 쳤다. 하지만 내용의 전개는 내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운영 작가의 ‘생강’이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전개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생강과 이 작품의 내용 자체는 비슷하지조차 않다. 생강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사실 어느 시절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둘 중 하나겠거니 하고 복수 명기함)의 고문 전문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사회가 뒤바뀌면서 일어나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작품과 생강에서 비슷한 것을 느꼈느냐하면, 두 작품이 모두 어느정도 ‘사회 비판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내가 리뷰한 작품 중에 ‘삼파기타’라는 이름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역시 사회비판적이다. 그러나 삼파기타의 사회비판은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생강과 이 작품의 경우에는 근대사에서부터 출발하는 사회비판이다. 그 점이 내게는 굉장히 독특하게 다가왔다.

지금부터는 그 외의 몇 가지 점들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1. 시간의 그라데이션을 극적인 연출로

본 작품은 일련의 사건이 시간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사건을 쪼개서 시간의 순서와는 상관 없이 배열하는 것은 장점 만큼이나 위험 부담이 크다. 우선 독자가 각 장면의 순서를 헷갈려 할 수가 있다. 이렇게 헷갈려버리면 자연스럽게 내용의 이해도 또한 떨어진다. 그렇지만 장면을 파편내어 시간의 순서와 상관 없이 배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뒤에 오는 장면이 훨씬 극적으로 보여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출을 가장 잘 살려낸 영화로 나는 메멘토를 꼽는데, 메멘토는 과거를 알 수록 현재를 혹은 미래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재미있게도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면서 서로가 서로의 내용에 힌트가 된다. 참 대단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극적인 연출은 분명히 얻었다. 그렇지만 몇 개의 장면의 경우에는 조금 햇갈렸다. 다행히도 내용의 이해도에 대단한 영향을 끼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라, 그래서 이 장면은 뭘 의도로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는 되었다.

 

집전화가 울린다. 난 받지 않는다. 받을 이유가 없다. 난 침대에 누워서 몸을 웅크린다. 이 차가운 자궁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정녕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방은 어두웠고, 먹먹해진 귀는 소리를 거부한다. 내 아이는 늘 이런 세계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나도 웅크렸단다. 잠을 못 들고, 너는 나에게 물었지, 아빠 나 무서워.

걱정 마렴. 아빠가 꼭 붙어있을게.

특히 이 장면이 그러했는데, 정말이지 이 장면이 뭘 의도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선 왜 전화를 받을 이유가 없는지부터가 그러하다. 혹시 경찰이 범인 잡았다고 전화한 건가?! 그런데도 받을 이유가 없는 건가?! 범인이 잡히든 안 잡히든 내 딸은 이미 죽었다 이건가?! 뒤에 나오는 ‘이런 세계’는 관 아래 같은 세계인가?! 근데 아빠가 꼭 붙어있을게, 하는 부분은 또 뭐지?! 으아아 젠장 하나도 모르겠다!!!! 의 시퀀스로 내 이해를 파괴하였다.

 

눈을 떠보니 아이엄마가 날 보고 있었다. 화장조차 하지 않은 민낯이었다. ~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른손만 뻗어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아주길 기다렸다. ~ 그녀는 날 질책한다. 딸아이가 아끼던 유리컵을 깼을 때와 똑같은 얼굴이다. 그때 딸아이의 표정을 따라한다. 전부 연기였다. 슬프지 않았지만 슬픈 척 한다. ~ 그녀는 나간다. 다시 나는 혼자 있었다.

이 장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인물들의 감정선이 그 어떤 시계열에도 적합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딸이 죽은 이후의 장면이라면 남편도 아내도 너무 무덤덤하다. 딸이 죽은 이전의 장면이라고 하면, 왜 이 두 사람이 이런 감정으로 대화하는 지 마땅한 까닭을 알 수 없다. (한 가지 더 붙이자면. “그녀는 나간다. 다시 나는 혼자 있었다.” 의 부분도 좀 이상하다. 그녀가 나가는 것이 현재 시제로 묘사되었는데, 내가 혼자 있는 것은 과거 시제로 묘사되었다. 그녀가 나간 후에 내가 혼자 있는 건데도, 시제는 역전되어있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문장의 종결 시제가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데, 그건 나중에 가서 이야기하려 한다.)

 

 

2. 은유 

이 작품은 굉장히 많은 묘사가 은유를 통해 독자에게 제시된다. 그것도 상당히 은유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어진다. 가령 이런 식의 은유 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다. 졸업한 후 가보지 않았지만 알고 있다. 핏자국은 물걸레질로 지워지지 않는다.

이 은유는 폭력의 기억에 대한 것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때렸다는 사실과 맞았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런 은유들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너무 은유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 좀 힘들었다. 적재적소에 은유를 사용했다기 보다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이러한 은유를 사용한 거 같은 인상이 더 짙었다. 꼭 필요한 곳이 아니라면 은유를 조금 걷어내본다면 어떨까 싶다.

 

 

3. 뜬금포 등장인물

문 앞에 앉아서 주인공을 기다리시던 그 아주머니, 그 캐릭터가 너무 뜬금없었다. 그 캐릭터의 등장 역시 뜬금없었지만, 그보다 더 뜬금없다고 느꼈던 것은 그녀가 지껄이는 대사들이었다. 이 작품은 매우 현실적이고, 또한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제대로 잡혀있었다. 그러나 아주머니 등장 이후로는 뭔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령 아래와 같은 대사가 그러했다.

 

“당신 변호사라며. 잘나가는 변호사라며! 그럼 죽일 수 있잖아. 우리 딸 죽인 개자식을 우리 딸이랑 똑같이 죽일 수 있잖아!”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잘나가는 변호사가 사람 죽이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변호사가 잘 나가면 사람 몇 명 정도는 우습게 죽일 수 있는 건가? 뭔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이것이 ‘사형 선고’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대사 때문에 모든 추측은 억측이 되었다.

 

“우리 선경이 죽인 놈. 내가 똑같이 죽일 거야. 당신도 똑같은 마음 아냐? 당신 딸도 그렇게 불쌍하게 죽었잖아. 당신 인맥으로 부탁하면 돼. 판검사 동기들 많을 거 아냐. 피해자 부모인 우리가 부탁하는 거잖아.”

?????? 한 심정이었다. 우선 아주머니께서는 본인이 살인자를 죽이겠다고, 주인공도 같은 마음이지 않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뒤에는 다시 판검사 동기를 운운하면서 피해자 부모인 우리가 부탁한다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싶었다. 아주머니께서 사형 선고 받도록 힘쓰시겠다는 건지, 칼로 찔러 죽여버리겠다는 건지 판단이 안 선다.

 

개인적으로는 아주머니가 등장하는 부분을 모두 걷어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 장면을 살린다면 대사는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수정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4. 들쑥날쑥한 시제

위에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초고라는 점(블루라쿤 님이 초고라고 했었던 거 같다)을 감안하더라도 문장의 시제가 너무 들쑥날쑥하다.

 

내 딸은 살해당했다. 내 딸은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다. 총 26조각이었다. 아직도 검지와 왼쪽 눈동자, 심장은 찾지 못했다. 내 딸은 옆구리를 3번 찔렸고, 얼굴에 엑스 모양으로 금이 그어져 있다. 골절된 부위는, 척추, 갈비뼈, 양 정강이와 손등이다. 손톱은 뽑혀있거나 부러져 있었다. 성대는 찢어져 있었다. 뺨에는 손자국 멍이 있었다. 살해시각은 오후 3시로 추정된다. 범인(은) 납치 후 8시간 동안 데리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내 딸이 살 수 있었던 시간이 8시간이나 있었다. 그 8시간 동안 나는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두꺼운 폰트로 된 부분이 내가 특히 이상하게 느꼈던 부분이다. 범인 뒤에 괄호가 쳐 있는 것은, 원문에는 조사가 없었는데 어쩐지 있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옆구리를 세 번 찔렸고, 얼굴에 엑스 모양으로 금이 그어져 있었으며, 골절된 부위는 이러이러했다. 정도가 시제의 올바른 사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해 시각에 대한 내용은 뭐 틀렸다고 하기에는 모호하지만, 들쑥날쑥하다는 점에서 미루어보면 확실히 들쑥날쑥하다.

또한 범인을 잡았는데 왜 살해시각이 ‘추정’인가 싶다. 범인을 잡았으면 살해시각도 물어봤을 텐데. 8시간 동안 데리고 있었다고 말했으면 살해시각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내 딸은 살해당했다. 시신 일부가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다. 원래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산산히 해체되어 있었다. 아직도 검지와 왼발, 심장은 찾지 못했다. 딸의 얼굴에는 십자로 된 흉터가 깊게 그어져 있었다. 옆구리를 세 번 찔렸고, 그 외에 척추∙갈비뼈∙양 정강이∙손등의 골절을 확인했다고 부검의가 말했다. 손톱은 모조리 뽑혀져 있었는데, 그 역시도 살아있을 때 뽑힌 것이라 부검의가 덧붙였다.

범인은 납치 후 8시간 동안 내 딸을 데리고 있었다 증언했다. 살해시각으로 추정하던 때와 정확히 일치하는 증언이었다. 그에 따라 살해시각은 납치 다음날의 오후 세 시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딸이 언제 죽었는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딸을 살릴 수 있었던 시간이 8시간이나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 딸의 주검은 그 결과였다.

 

그냥 제가 가장 껄끄럽게 느꼈던 문장을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시제의 연속이 되도록 써 봤습니다. 이것을 모욕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재미있다. 분량이 너무 적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부분을 은유로서 묘사하지 않고 독자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디테일과 추가 내용을 덧붙여서 5만자 짜리 중편으로 써내는 것이 어떨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위의 네 가지는 다만 그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점들을 적었을 따름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는 이런 명 문장으로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나는 이것을 리뷰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은 재미있다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재미있지만, 걸리는 부분은 굳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로 걸리적거렸다. 그저 그랬을 따름이다.

 

 

 

+ 스릴러를 기대하고 들어온 사람이 느끼기에는 너무 내용 전개가 덤덤하다는 점도 문제긴 했다. 이 작품의 장르에서 스릴러는 빼서야 할 듯.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