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현실이란 땅에 심으면 종종 슬픈 이야기가 열린다. 이 작품은 구미호라는 상상의 존재를 돌연변이 및 질병 신경 이상 등으로 과학에 기반하여 묘사하였다. 슬픈 이야기이나, 구미호가 아픈 세계기에 슬픈 것이 아니다. 슬픈 이유는 구미호가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판타지에 나오는 요정 같은 신비한 존재 들은 신비하다. 흔하지 않고 규정할 수 없으며 해석할 수 없기에 신비하고 신성시되고 보호 받는다. 다른 말로는 드물고, 귀하며, 관심의 대상이 되기 좋다. 그 관심이라는 게 결코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고이고 썩어버린 관심도 폭풍같이 휩쓸고 사라지는 관심도 모두 신비의 존대들과는 상극이다. 동화와는 다르게 행복하게 살아가며 끝날 수 없다. 그들이 완벽히 일상의 일부가 된 게 아니라면, 다른 말로 토양을 현실에 두는 한 우리는 비극을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은 비극과 희극이 함께 섞였으니까.
그렇기에 주인공도 우리도 갈등하게 된다. 그 삶을 끝내는 것과 이어가게 하는 것, 수많은 관심을 끌어모으는 것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 당사자인 구미호들의 의사를 알 수 없는 이상 우리는 답을 내리지 못한다. 고통 어린 삶과 삶 없는 평온 중 우리는 무엇이 최선인지 알 수 없다. 현실에게 해부당한 환자에게 우리는 어떤 처방도 내릴 수 없다.
다만, 이 이야기는 무기력과 무력함만을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환자에게 안락사와 고통스러운 치료 사이에는 한 지점이 있다. 연속적이고 양 극단이 존재하기에 그 사잇값도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작품은 소극적 치료를 택하였다. 같이 있으며 같이 고민하기를 말이다. 우리는 때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분명하고 명확한 답을 얻길 바라고 막연한 희망이나 끝없는 비관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과연 상대를 위하는 것일까? 적어도 나는 당사자의 의견을 알기 위해, 언젠간 올(끝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때를 위하여 우리는 함께 기다리는 선택이, 주인공의 결정이 일시적이나 대안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우리 또한 현실에 뿌리내린 존재기에 온전한 희극을 만들 수 없다. 그건 한계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바라며 기다릴 순 있다. 그건 괴롭지만 분명히 필요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