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적이 원래 목표에 예정 일정보다 더 일찍 데려다주고, 확보된 시간만큼 승객들을 면담하고, 역할은 체계적으로 나누고, 그 역할의 배분을 유동적으로 합니까? 어느 해적이 ‘모두의 이익’ 같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사명처럼 얘기한다는 겁니까?”
“그래서 우주지식해적단은 해적이 아니란 겁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당신의 정의로 우주지식해적단을 부른다면, 무엇이 좋겠습니까?”
“그건…….”
원ㅍ스 같은 다른 매체나 작품들 때문에 제목만 보면 뭔가 발랄한 우주활극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손도 안 대고 사람의 자아를 강탈하는 진짜 ‘해적’이야기다.
이 소설의 진짜 무기는 총도, 워프게이트를 조작하는 항법 기술도 아니다. 진짜 무기는 질문이다. 그것도 아주 정중하고, 아주 체계적이고,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된 질문. 우주지식해적단은 승객을 인질로 잡지 않는다. 그들은 승객의 ‘자아’를 인질로 잡는다.
[무아(無我)라는 복면을 쓴 해적단]
불교에서 무아는 해방이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 나를 지키기 위한 온갖 고통스러운 집착도 함께 놓아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아’라는 말이 ‘자아를 버려라’라거나 ‘에고를 부숴라’ 같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두 방향을 혼동한다.
그리고 이 소설 속 해적단은 바로 그와 같은 통념을, 정확히 무기로 사용한다. 그것도 사람의 자아와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을 부수는 무기로 쓴다. 선장이 이창석에게 던지는 질문들 — 당신의 모든 속성을 제외하면 당신은 당신일 수 있는가, 그 속성들의 합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 은 무아의 논리 구조를 그대로 따른다. 다만 그 끝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이창석’이라는 자리를, ‘우주사회심리학자’라는 ‘기능’으로 대체해버린다. 이창석이 “저는 모든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은, 관념 속에서만 다뤄지던 ‘무아’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 실제로 한 인간을 무너뜨리는 ‘물리적’ 사건으로 나타난 지점이다. 깨달음의 언어로 존재를 강탈하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이 그리는 가장 무서운 아이러니다.
그래서 해적단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면담자’, ‘항해사’, ‘제빵사’, ‘조직상담사’. 이런 역할은 유동적으로 순환하며 개인은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건 기능적인 동료의식이지 우정이나 인간적인 교류가 아니다. 조직이 개인들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조직이 개인들 각각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형상화한 무아의 실천적 버전이다. 단, 해탈이 아니라 기능화로서의 ‘무無’아다.
다만 여기서 결정적으로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그들이 흉내 내는 무아는 반쪽짜리다. 무아는 관계를 끊어야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나’라는 것이 애초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연기(緣起), 즉 타인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임시로 맺어지는 매듭이라는 걸 자각하는 게 무아다. 즉 ‘나’가 공(空)함을 알 수 있는 건, 바로 그 관계동참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애당초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어야 ‘나 없음’도 드러난다. 관계 자체가 사라지면 남는 건 깨달음이 아니라 그냥 진공이다.
해적단이 하는 일은 정확히 이 순서를 뒤집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이창석을 승객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부모로부터, 프리먼 교수와의 정상적 소통 경로로부터 물리적으로 단절시킨다. 익명메일 하나만이 그와 세계를 잇는 유일한 끈이 되고, 그마저도 그들이 검열하고 지시한다. 관계동참을 완전히 끊어놓은 다음에야 “당신의 모든 속성을 빼면 당신은 이창석일 수 있는가”라는, 무아론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절차만 보면 선문답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자아의 공(空)함을 함께 발견해나가는 과정과, “관계를 강제로 끊어놓고 그 빈자리에 질문만 꽂아 넣는 과정”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 전자는 ‘나’가 본래 관계 속의 무늬였음을 알아가는 확장이고, 후자는 그 무늬를 그릴 관계 자체를 지워버린 채 무늬만 억지로 지우는 절단이다. 그러니 이창석에게 남은 건 해탈의 가벼움이 아니라, 자신을 비춰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의 백지 같은 공포다. 해적단은 무아에 이르는 논리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 논리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관계동참—를 외부에서 강제로 파괴함으로써, 깨달음의 알맹이는 빼고 껍데기만 남긴 기계적 절차로 자아를 부순다.
[“모든 조직엔 이유가 있다”는 말의 배신]
프리먼 교수의 오랜 격언, “모든 조직엔 이유가 존재한다”는 이창석이 끝까지 붙들고 있던 마지막 합리성의 지푸라기였다. 그러나 소설은 이 명제를 정면으로 배반하며 끝난다. 이창석은 결국 우주지식해적단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선장이 제시하는 기원 서사들—좌절한 미래학자, 대부호의 취미, 비밀 군사조직—은 하나같이 그럴듯하지만 어느 것도 검증되지 않는다.
연기(緣起)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다. 존재란 본래 조건들의 임시적 결합일 뿐, 고정된 본질적 ‘이유’로 소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조차도 해적단은 자신들이 무엇인지, 왜 만들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무기 또는 방어도구로 이용한다. 이유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조직했다. 선장 자신조차 “우주지식해적단을 가장 잘 설명하지만 정작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적 중심으로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진 게 많다는 것은 잃을 것도 많다는 뜻]
흥미로운 건 해적단이 노리는 대상의 성격이다. 이들은 돈이나 물자를 약탈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수익원은 오히려 위장 보안회사 사업 자체다). 이들이 약탈하는 건 ‘지식’이며, 정확히는 지식을 진리라고 믿는 확신, 자신이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을거라는 ‘확신’이다. 이창석이라는 인물이 표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해적단에게 요청했다고 하지만, 소설을 전부 읽어보면 그것은 미끼를 보고 통발로 스스로 들어간 물고기와 다를 바 없는 꼴이었다. 그는 우주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생이며, 합리와 검증을 무기로 삼아온 사람이다. 지식이 많을수록, 그 지식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을수록, 그 믿음이 부서질 때의 낙차는 더 크다. 이 소설은 ‘가진 게 많다는 것은 잃을 것도 많다는 뜻’이라는 이 문장을 아주 문자 그대로, 잔인하게 실현시킨다. 다른 57명의 승객에게는 그저 “잘 짜인 유머”에 불과했던 사건이, 유독 이창석에게만 존재론적 붕괴로 귀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존재하는가?”]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존재를 증명하는 최후의 근거였다. 그러나 항해사와 선장은 정확히 그 지점을 공략한다. “당신의 믿음이 그러한 형태로 존재하는 한, 모든 건 비합리로 매도될 수 있다”는 선장의 말은 사유하는 주체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사유는 더 이상 존재를 보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유를 고집할수록 이창석은 더 깊이 함정에 빠진다. 믿음만이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선장의 말은, 근대적 이성 중심 주체를 겨냥한 정면 공격이며, 동시에 무아적, 아니, 자아해체적 무기(고정된 자아도, 그 자아를 보증하는 사유의 확실성도 실체가 없다는 것)를 그럴싸한 종교적 확신의 언어로 재포장한 것이기도 하다.
[프리먼도 결국 털렸다, 원격으로]
선장이 프리먼 교수에게 직접 보낸 마지막 메일에서 “당신은 우주지식해적단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독자에게도 그대로 던져진다. 이 소설은 실체나 진위를 확정해주지 않는다. 이창석의 이메일이 진짜인지, 해적단이 실재하는지, 결말에 이르러서도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채 열려 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게 하나 있다. 이 모든 메일을 애초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익명메일사이트에서 온 정체불명의 첨부파일들, “우주지식해적단”이라는, 이름부터가 우스꽝스러운 자칭. 평범한 사람이라면 스팸으로 분류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을 종류의 메일이다. 실제로 다른 57명의 승객에게는 그저 술자리 안줏감이 될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 프리먼은 그러지 않았다. “모든 조직엔 이유가 존재한다”는 자신의 오랜 신념을 붙들고, 끝까지 그 이유를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태도가 프리먼을 무너뜨렸다. 그는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서서히 확신을 잃어갔고, 나중엔 이창석이라는 조교가 애초에 실재했는지조차 의심하기 시작했다. 신고했지만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1년도 못 가 은퇴한 뒤 그의 소식은 완전히 끊긴다. 해적단은 프리먼의 여객선에 탄 적도, 그를 심문실에 앉힌 적도 없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는 이창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털어갔다. 그것도 원격으로, 오직 메일 몇 통의 질문만으로.
앞서 짚었듯 지식이 많고 그 지식을 진리로 믿는 사람일수록 이 강탈은 더 치명적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 이창석이 아니라 정작 그를 가르친 스승에게서 완성되는 셈이다. 결국 해적단이 노린 최종 표적은 여객선에 탄 승객이 아니라, 조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믿어온 프리먼이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과 멘탈붕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소설이 구현하는 공포란, “깨달음에 이르는 절차”와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절차”가 어떤 면에서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는 점을 정면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아의 견고함을 해체하는 질문들, 고정된 ‘나’라는 착각을 벗겨내는 논리. 이것이 사찰의 선방에서 관계속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면 해탈이라 부르고, 여객선의 일등석에서 낯선 이가 고립시킨 채 강제로 밀어붙이면 트라우마라 부른다. 이창석에게 결여됐던 건 논리가 아니라 스스로 그 과정을 선택할 자유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전감이었다. 이 소설은 그 차이가 사람을 얼마나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지를, SF 코스믹호러의 외피를 두른 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다.
소설의 형식 자체—익명 메일, 검증 불가능한 첨부파일, 결국 재판 내역조차 밝혀지지 않는 결말—가 무아와 연기의 세계관을 표방한 ‘정신공격’을 서사 구조로 구현한다. 독자 역시 “이 이야기를 믿는가”라는 질문 앞에 이창석과 똑같이, 아니 프리먼과 같이 온라인 상으로 강제로 서 있게 된다.
나는 존재하는가? 내가 아는 것들, 나에 대해 명명되어 있는 것들이 진짜라고 ‘믿는가’?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이며 무엇을 통해 확신할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