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에서 소수가 생존하는 법 감상

대상작품: 무성한 사랑 (작가: 천가연, 작품정보)
리뷰어: 글씀이, 18시간 전, 조회 22

나는 이 이야기를 충격적인 개요에 의해 들어오게 되었다. 무성한 사랑은 개요의 내용이 정직하게 들어간 작품이다. 무성애인 에이섹슈얼을 다루며 풍부함을 의미하는 무성한 사랑이기도 하다. 둘의 이러한 사랑이 기술의 발전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우선, 이 작품은 근미래라는 배경을 채용하여 개요를 부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었다. 객관성이나 판단을 인공지능에 의지하는 사람은 지금도 있다. 근미래에 공적 확인절차를 인공지능에 의탁하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작품은 인공지능 포포의 유용함과 일상적인 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어디에나 있을 수 있음은 편리와 함께 거슬림을 동시에 의미한다. 본래라면 에이섹슈얼이라는 문제 될 것 없는 개인적 정체성이 기술의 발전과 사건사고로 인하여 침범당한다. 만일 성관계를 사람이 직접 보고 확인해야 된다고 한다면 해당 법안은 결코 통과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는 편리한 도구는 비인간이란 이름으로 사생활에 구둣발을 들이민다. 시스템이 차마 걸러내지 못한 신혼주택 사기꾼에 의해, 두 부부는 시스템이 담지 못하는 이들로 변화한다. 신혼부부라면 당연히 성관계를 자주 할 것이라는 다수의 동의에 의해 그들은 소수자성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다. 일상에 깊게 스며든 편리한 도구, 행정개혁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는 오만, 다수만을 대변하고 예외가 없는 법안까지, 부부는 늘 다수의 폭력에 시달린다. 대학생 때에는 에이섹슈얼에 대한 얕은 지식으로 인해 성희롱과 조롱을 당하였으며 부부가 되고 나서는 에이섹슈얼이라는 존재 자체가 배제당한다. 이러한 사회는 어쩌면 멀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우리의 일상엔 인공지능이 녹아있으며, 생체적 반응을 감지하는 도구와 집 또한 최근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 그저 시간을 버리고 연기하며, 채영처럼 구역질을 버티고 낯선 감각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걸까.

답은 놀랄 정도로 멀리 있지 않다. 성적 정체성에 대한 분류는 현대로 올수록 세분화된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분석렌즈의 분해율이 높아지자 같은 색이던 것들이 이젠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존재 자체는 이미 해왔던 것들이다. 판별 이전에 대상의 존재가 선행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답은 둘의 행위와 같다. 서로를 사랑하고 기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 만일 기술의 발전을 부정하였다면 주택을 잃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포포를 속일 방법을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범법과 속임수를 조장하는 게 아니다. 신혼부부 공급주택의 의의는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거주하기 위함이다. 만일 에이섹슈얼이기에,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는 게 의의에 어긋난다면 신청 때부터 에이섹슈얼과 동성애자와 입양선호자와 무자녀계획자 등을 막았어야 한다. 그건 차별이면서 부부간 뜨거운 사랑의 형태가 성관계여야만 한다는 건 차별이 아닌가? 물론 이는 일정의 궤변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궤변이 시간을 버린다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늘 그렇듯 사랑이다. 지훈이 채영의 작품을 본 건 큰일이 아니다. 정확히는 서로가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같이하기에 작은 문제가 되었다. 포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했기에 이제 그 문제는 중요치 않다. 커피에 시럽을 넣던 설탕을 넣던 마찬가지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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