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로그라인만 요약하면 우스꽝스럽게 들릴 위험이 있다. “용이 농사를 짓고, 농업회사에 항의하기 위해 창고를 점거하고, 그 용을 몰아내기 위해 회사는 용살자와 뒤처리를 맡을 용 장의사를 보낸다.”
이것은 언뜻 클리셰를 비튼 코미디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이 이야기는 전혀 가볍지 않다. 용은 자신이 결국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용살자와 최선을 다해 싸웠고, 죽은 뒤에는 포도밭에 묻혀 끝내 싹을 틔운다.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설정과, 그 안에 담긴 절박하고 존엄한 저항. 이 낙차가 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이다. 클리셰를 비틀어도 진지할 수 있다.
비비(용 장의사)와 키론(용살자)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용의 죽음에 관여하는 두 인물이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 마을과 용 사이에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는 반전 — 테나브리온의 죽음이 ‘해결’이 아니라 ‘합의된 희생’이었다는 사실 — 은 이야기 중반부에 묵직하게 떨어진다. 관리인의 태연한 말투로 상황을 축소해서 설명하는 초반부의 서술 방식은, 회사(센그로프)가 얼마나 이 비극을 사무적인 절차로 치환해버렸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용을 죽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자 특허, 부채를 이용한 토지 잠식,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속성 재배 같은 현실의 농업 자본 문제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단순한 사회 고발극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용이라는 압도적인 존재조차 이 구조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설정이다. 인간보다 크고 강한, “다른 사냥감과 비슷하리라” 여겨지긴 해도 명백히 인간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 존재가, 결국 회사의 부채 구조와 자본 앞에서는 창고 하나를 점거하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 힘의 크기가 아니라 구조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력함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이 소설이 그리는 부당함의 본질이다.
테나브리온이 선택한 저항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아세우기, 굴복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우다 죽는 것,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땅에 되돌려 마을을 되살리는 것. 이는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저항이며, 그 결과가 즉각적인 정의 실현이 아니라 ‘싹이 트는’ 형태로 뒤늦게, 그것도 다음 계절에야 찾아온다는 점이 현실적이다. 힘없는 자의 저항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만 구현된다. 압도적인 상대를 당장 이기는 게 아니라, 죽음과 희생을 통해서만 다음 세대에게 회복의 씨앗을 남기는 것.
마을 사람들 역시 이 은유 안에 함께 놓여 있다. 그들은 용과 함께 저항했지만 동시에 그 저항의 대가로 용의 죽음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소설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그들의 “수치심”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방조자일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자들의 필연적인 딜레마를 보여준다. 완전한 승리도, 완전한 무고함도 허락되지 않는 저항이다.
키론은 전형적인 ‘무뚝뚝한 사냥꾼’처럼 시작하지만, “용이란 놈들은 다 똑같아”라는 대사를 반복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애도와 자기혐오를 서서히 드러내는 방식이 절제되어 좋다. 그가 용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것도 그저 돈 받았으니 일한다, 같은 임무 수행이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정직하게 응하는 것을 택한 용에 대한 일종의 존중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그를 키운 용 데오메네스에 대한 사연이 후반부에 짧게 스치듯 언급되는데, 조금 더 자세히 다뤄졌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냥 독자로서 뒷얘기가 궁금해서.
결말은 복수도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회사는 처벌받지 않고 그저 다른 땅으로 옮겨갈 뿐이며, 마을은 ‘용서’조차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 그러나 죽은 용의 자리에서 열매가 열렸다는 소식은, 부당함에 맞선 저항이 완전한 승리가 아니어도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준다.
용과 용살자라는 대단히 판타지적인 장치를 빌려 왔지만, 화려한 판타지 액션보다는 부당함과 무력함, 그리고 그럼에도 남는 회복의 가능성을 담담하게 그린 사회적 정치적 은유에 가까운 소설이다. 결국 이 소설이 그리는 것은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존엄을 지키며 맞서다 스러진 존재와, 그 죽음을 딛고서야 살아가는 이들의 대단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특히 용의 유해를 태우고 재를 밭에 뿌리는 장례식 장면은 판타지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실제 장례의 과정을 살려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힘없는 이들이 완전한 승리 대신 “다음 세대를 위한 최소한의 것”을 지켜내는 방식, 이것이 이 소설이 그리는 저항의 실체이고, 그것이 이 작품을 단순한 판타지 이상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