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작가 소개글이 참 인상적이어서 들고 와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모험은 너무 일찍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서라도 탐험해야지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외계 모험의 세계로!
누군가의 작가 소개글을 읽을 때마다, 그 사람이 쓰는 모든 글들의 지향점은 결국 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실감하는 편이다. 무엇을 출간했고 무엇을 수상했는지보다, 무엇을 쓰고 싶고 무엇에 손을 뻗는지가 궁금해지기에 이런 소개글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렇기에 이런 보석 같은 문장들을 만난 후 소설 본문을 읽을 때면, 실재하지 않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 상상 속의 세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We were born too late to explore the Earth, too early to explore the stars.
우린 지구를 탐험하기엔 너무 늦게 태어났고, 우주를 탐험하기엔 너무 이르게 태어나 버렸다.
그러므로 단언컨데, 우리가 이 소설 속 세상을 끌어안으면 세상도 우릴 끌어안을 것이다. 그런 소설이다.
* 결말 스포 주의. 소설 감상 후 읽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1. 본문 속의 이야기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이 감정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그리워할 수 있을까? 그저 그것이 아주 먼 과거에 ‘존재했던’ 세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 시대를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다.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 전략에 이점이 있다지만, 차마 우리의 조상이 닿지도 못할 아득한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늘상 의문을 품어왔다.
애틋함. 노스텔지어. 그것은 좋았던 추억, 행복했던 시절에 관한 회고에서 비롯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선 외로움과 고독, 기다림, 희미함이라는 서늘한 단어들을 가지고선 애틋함의 본질을 뒤집었다. 그리고 우주에서 희미함의 대명사는 바로 ‘우주배경복사’다.
그렇게 나는 우주배경복사 같은 인간이 되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아무도 느껴줄 생각은 안 하는.
절대 영도보다 고작 3도 정도만 따뜻한.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우주배경복사 같은 인간. 절대 타오르는 법이 없을 미적지근하다 못해 허옇게 식어버린 존재.
‘나’는 태양계를 찾아온 외행성 ‘에리니스’와 닮은 구석이 많다. 그리고 닮은 존재는 서로를 알아본다지 않던가. 모항성이 없어 발견조차 쉽지 않았던 에리니스의 존재를 처음으로 예측한 자가 바로 ‘나’인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일지 모른다.
행성이 발견되기 조금 전, 낡은 페르미 감마선 우주망원경이 기묘한 패턴의 지속적인 감마선 신호를 발견했었다.
남편과 이별한 후 공허함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문명 신호로서의 고에너지 광자 복사>라는 제목의 레터를 발행한다. 감마선을 되방출하는 신호를 수신하여 외계 행성의 문명 신호를 확인하기 위한, 어찌보면 중학생 수준의 억지 가설이 덕지덕지 붙은 조잡함 덩어리였다.
그러던 중 오르트 구름에서 ‘에리니스’라는 행성이 발견되고, ‘나’는 졸지에 모항성이 없어 발견조차 쉽지 않았던 행성을 밝혀내는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 행성은 점점 태양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정말로 지적 문명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에리니스에 직접 가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결국 ‘나’는 에리니스에서 유물들을 도굴하며 그곳의 기록물들을 파헤친다.
‘발굴’이란, 말하자면 도굴이었다. (중략) 모두가 똑같은 모습의 오래된 구조물이 있음을 보고했다. 그 송신기는 아무리 봐도 생물이, 지성체가 만들어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사면체의 건축물이었다.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구조물을 파헤쳐 언어를 해독하고, 오래 전 이곳에 살았을 이들의 기억을 읽어내려간다.


새하얀 모래 벌판에, 풀조차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는 행성. 빙하기를 앞둔 에리니스에 두 아이가 살고 있다. 그들은 점점 차게 식어가는 행성을 다시금 복구하기 위해 ‘할머니’의 지시 하에 탐험과 임무를 수행한다. 기록은 언제나 새카만 밤. 몇 없는 마지막 주민들은 생물 표본을 모으고, 아직 마르지 않은 풀을 찾으며, 괴물들과 싸우고 도망친다.
그들의 ‘할머니’는 행성을 관리하고 저장하는 존재로, 언제 어디서나 아이들을 지켜보며 조언과 위험 경보를 제공한다. 오빠인 누암과 여동생인 에페카는 할머니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을 직접 만나러 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돌아오라니. 보고 싶다니!
이 부분에서 장르가 스릴러인가 잠시 고민했다. 사람이 아닌 존재 같다가도 할머니의 어린 시절이란 말을 듣고 정말 인간인지 헷갈렸다. 게다가 아이들을 부르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는데, 그게 마치 빨간 망토 동화의 늑대가 아이를 속이는 장면 같았다.
하필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이 긴장감이 끝까지 이어질 줄 알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읽었다가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호러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서, 에리니스 탐사대는 원주민들의 기록을 살펴보며 이상한 점을 몇 가지 깨닫는다. 모든 기록은 밤에 이루어졌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건, 에리니스의 지질을 분석했을 때 반감기 추산용 원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연대추정이 실패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을 가능성을. 리튬으로 된 사막. 언제나 밤하늘이었던 세상. 끝없는 겨울. 멸망을 당연시하는 것처럼 들리던 기록 속 ‘할머니’의 어조. 모든 단서가 하나로 맞물렸다.
이미 반감기가 다 지나 분해된 원소조차 없다면, 얼마나 오래 전의 지질인 걸까? 천문학자인 ‘나’는 이를 파헤치기 위해 초기 우주의 원소 함량비와 에리니스의 원소 함량비를 비교한기로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에리니스는 그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주 먼 과거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우주가 138억 살쯤 되죠. 그러니까 영상에 나왔던 사람들은 바로 그 138억 년 전에, 여기 살았던 거고요.”
우리가 아는 우주의 탄생은 138억 년 전. 그리고 에리니스가 살아있는 행성이었을 때 역시 우주의 시작과 비슷한 시기다. 초창기의 우주는 너무 뜨겁고 밀도가 높아서 빅뱅과 동시에 터져나온 빛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주가 점점 차게 식어 전자와 원자가 결합하고, 빛이 점점 퍼지면서 우주배경복사가 되었다.
우주 전체가 생물을 기를 만큼 따뜻했으니, 행성이란 행성마다 꽃이 피고, 포자가 날리고, 물고기가 헤엄치던 시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에리니스가 식어가는 것 역시 초창기 우주에서 현재의 우주로 넘어가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암과 에페카는 모항성이 없어도 그저 우주라는 공간 안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따스한 포옹을 겪는 시대의 끝물에 태어난 아이들이고, 그들의 에리니스 멸망 막기 프로젝트는 헛발질에 불과했다. 아이들에게 이 일을 지시한 할머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리니스의 표면을 뒤덮은 하얀 수산화 리튬 모래처럼 하얀 거짓말들이 대대로 에리니스인들에게 물려진 것이다.

할머니를 만나러 금지된 방에 들어간 에페카가 마주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을 할머니라고 주장하는 거대한 기계였다. 멸망을 목전에 둔 에리니스인들이 선택한 것은 마인드 업로딩이었으며 그들은 대대로 기억을 물려주며 자신들의 흔적을 보존해왔다.
“그래. 기록해야 했으니까.”
“나도 내 ‘어머니’에게 그렇게 속은 채로 살아갔단다. 이제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아. 필요악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이런 컴퓨터도 영영 살 수는 없거든. 너는 내가 기록해두었던 모든 걸, 그리고 내 기억을 이어받아 줘야 해.”
본문에서 생략된 것인지, 아니면 에페카 역시 은연 중에 자신의 일들에 의구심을 품었던 건진 몰라도 에페카는 크게 저항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거의 강요에 가까운,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일이었기에 체념하고 받아들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 장면이 살짝 아쉽게 느껴졌는데, 세계의 비밀이 밝혀지는만큼 에페카의 감정이나 생각이 조금 더 드러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적으로 도망치려 하거나 강제로 잡히는 등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방에서 나온 뒤 에페카가 그날 밤 내내 고뇌하거나 할머니와 독대한 순간 혼란 혹은 체념에 가까운 속마음이 조금 더 묘사되었다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싶다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남긴 마지막 문장이 참 따스했고, 여운이 오래 남기에 이 이야기를 300매 정도의 분량으로 조금 더 늘려서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에페카와 누암이 임무를 수행한 장면이 단순 설명글이 아닌, 세세한 장면으로 묘사된다면 결말의 여운이 강해질 것이다.
중단편이라는 분량의 제한 때문에 담을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극적인 결말과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만 같은 설정과 묘사 덕분에 경장편의 잠재력도 훌륭하게 보인다. 이야기의 큰 축이 ‘세계의 비밀을 푸는 것’인만큼, 호흡을 조금 더 늘려 결말을 보류하고 복선을 더 촘촘히 엮는 것도 하나의 좋은 개작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단절로 인한 고독과 존재론적 고독의 만남
그렇다면 이제 리뷰를 시작함과 동시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이 감정의 본질은 무엇일까?
고독은 두 가지로 나뉜다. 개인 사이 연결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고독, 그리고 존재론적인 고독. 여기서 ‘나’는 전자이며, ‘에리니스’는 후자에 속한다. 두 존재의 고독은 기인한 뿌리부터 다르다. 그러나 늘 우리는 타자에게서 교집합을 찾아본다 하지 않던가. 그들은 완전히 같진 않지만, 꽤나 닮은 구석이 많다. 비록 ‘나’는 자신이 에리니스보다 다른 것과 닮았다고 한참 착각하고 살았음에도.
I envy the others. They seem to be in the very center of gravity. But I seem to live in a permanent flight longing for rest.
다른 사람들이 부럽다. 그들은 중력의 중심에 안착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늘 안식을 갈망하며, 영원히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다.
요나스 메카스,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모항성의 궤도에 달라붙어 세월을 보내는 여타 행성들과는 달리, 어디에도 붙박이지 못하는 떠돌이 행성 에리니스에게 이만큼 잘 어울리는 문장이 있을까? 모항성이 없으니 낮이 없다. 모항성이 없으니 우주배경복사와 함께 천천히 식어가야만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나’는 자신과 가장 비슷한 존재는 우주배경복사가 아니라, 에리니스였다는 걸 깨닫는다.
어린 우주는 그들 모두에게 생명을 주었고, 그 생명을 동시에 앗아갔다. 내키는 대로 개미를 살렸다 죽이는 어린아이 장난처럼.
‘배경복사 같은 인간’이라니. 나는 얼마나 끔찍한 말로 나를 부르고 있었던 걸까.
‘나’는 구역감을 느낀다. 아주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연민했던 우주배경복사는 실은 주인공보다 주인공을 떠난 옛 연인과 닮아 있었다. 애정과 미련과 고통이 점철된 그 존재 말이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기다리던 그 존재.
고독한 자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기다림’에 있다. 이는 단순한 연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를 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계속 존재할 수 있길 바라는 것이다. 에리니스의 주민들이 마인드 업로딩을 하면서까지 기억을 이어나가려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근본적으로 기억에 매달리는가? 냉정하게 보면 기억과 기록이 있든 없든 멸망은 예견되어 있고 피할 수 없는데 왜 기억됨은 결국에 위안이 되는가?
스캔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완벽하게 무해함.’
지구인들이 에리니스에 직접 착륙하기 전 행성의 방사선을 탐지한 결과는 ‘완벽하게 무해함’이었다. 그냥 무해함도 아니고, 완벽하게 무해함. 에리니스의 환대. 에리니스에 남은 기억이 행성의 방사선까지 조절하진 못하겠지만, 그가 얼마나 관찰자를 기다려왔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들이 일구었던 문명, 멸망 직전까지 놓지 못했던 기록, 스스로 기계가 되면서까지 보존해야 했던 기억은 곧 존재의 연장선이 될 수 있을까?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크게 3가지로 나눴다. 노동, 작업, 행위. 여기서 노동은 살기 위해 반복하는 것, 작업은 무언가를 창조하여 세상에 내보내는 것, 행위는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행위야말로 인간의 조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한나 아렌트는 행위는 그 자체로 보존되지 않으며 ‘이야기’를 통해서 보존된다고 말한다.
이는 개인의 행위가 이야기로서 기억되어야 인간의 조건을 충족하고 존재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물론 한나 아렌트는 독재에 대한 저항, 그리고 역사의 기억에 대해 말했지만 이런 방식으로도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억이 존재의 일부인지 아니면 전체로서 연장이 되는 것인지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기억이라는 재해석을 통해 존재가 이어진다고 보고 싶다. 그게 근본적으로 인간이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라고 여기고 싶다.
내행성 궤도를 교란할 일도, 해왕성이나 천왕성과 충돌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 뒤로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태양계를 벗어나는 길을 따라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날 것이었다.
에리니스가 태양계에 머물 시간은 고작 100년. 떠돌이로 태어나 수백 억년 동안 우주를 헤매던 떠돌이가 태양계의 행성을 벗 삼을 수 있는 기간은 아주 찰나지만, 이곳을 떠나더라도 태양계가 멸망하기 전까진 지구인들의 기억에는 오래도록 남을 테다. 당장은 공허하겠지만, 앞으로도 재해석되고 가공되고 관측되면서. 그렇다면 언젠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알고만 있는 것과 실제 보는 게 이렇게나 다르다니. 결국 태양도 그냥 별이구먼. 태양계를 다 벗어난 것도 아닌데, 저렇게나 초라해져서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에, 오히려 그 끝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끝이 있다는 것이 마냥 무정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BGM으로 삽입했던 노래의 몇 없는 가사를 남기며 닫는다.
Thank you, I’ll say goodbye soon
고마워, 곧 작별 인사를 할 거야
Though it’s the end of the world, don’t blame yourself now
세상의 끝이라 해도, 지금은 자신을 탓하지 마
And if it’s true, I will surround you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너를 감싸 안고
And give life to a world that’s our own
우리만의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