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언어를 몰라? 그럼 죽어야지” 공모(비평)

대상작품: 현행유지 (작가: 아침은삼겹살,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시간 전, 조회 11

0. 뒤로가기를 눌렀다가 다시 돌아왔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모양새를 보자마자 뒤로가기를 눌렀다.

나는 공무원은 아니지만 매년 갱신되는 매뉴얼북을 읽고 업무를 해야 하는 말단자리에 있다. 공공기관이나 정부가 발행하는 그 문서, 그 책자. Q&A 형식, 전문 용어, 개정이력, 처리 절차 분기 안내. 그런 것들을 업무로 마주하는 사람에게는 이 ‘소설’의 첫부분 부터 소설로 보이지 않는다. Q1을 읽는 순간 손이 먼저 반응한다.

연수 자료다. 업무 지침이다. 지금 읽어야 할 서류가 아니다. 대충 보니 내 업무도 아니다.

뒤로가기.

 

…그런데 결국 다시 돌아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 소설… 아니 매뉴얼은 규정 매뉴얼대로 일하는 실무 담당 공무원이거나, 아니면 그런 매뉴얼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 쓴 것이다. 이 정도로 공공 매뉴얼 언어에 정통하고, 이 정도로 개정이력의 패턴을 정확하게 재현하며, 이 정도로 처리 절차의 분기와 충돌 지점을 꿰고 있는 사람은 직접 그 안에서 살아본 사람이다.

실무에서 이 종류의 매뉴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매년 연수는 있다. 그러나 연수를 진행하는 사람조차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연수의 핵심 내용은 대체로 하나로 귀결된다. “뭐든 기안문 공문서로 증거를 남기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떤 항목이 개정되면 아직 개정되지 않은 다른 항목과 충돌하기 일쑤다. 민원 전화가 오고, 그 문제가 어느 부서 담당인지 공무원들도 몰라 전화를 돌리고 돌리고 돌린다. 그러면 결국 ‘난가? 하면 나다’ 인 상황이다. 민원인은 폭발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조용히 기도하게 된다. ‘나만 아니면 돼.’
이쯤되면 공무원 사회의 무사안일주의는 게으름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그리고 매뉴얼 개정 자체는 언제나… 의도는 좋았다. 아니, 의도’만’ 좋았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지점을 찌른다. 매뉴얼과 규정으로만 돌아가는 관료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매뉴얼과 규정의 형식 그 자체로 보여준다. 매뉴얼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뉴얼자체가 괴담이고 호러다. 이 소설은, 작가는 그것을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매뉴얼괴담 형식을 차용한, 남북통일 이후 디스토피아로 빗댄, 매뉴얼과 규정으로만 돌아가는 관료주의 비판 소설

 

1. 소설인데 소설이 아닌

소설처럼 생기지 않았다. 표지도, 장도, 문단도 없다. 대신 Q&A 목차와 개정이력이 붙어 있다. 작품 전체는 「북부지역 출신 주민 전입신고 업무처리 길라잡이」라는 관공서 내부 매뉴얼의 형태로 존재하며, 30차 개정을 거친 현행 통합본이 나란히 붙어 있다. 서술자는 없고, 등장인물은 없으며, 서사도 없다. 오로지 절차만 있다.

 

2. 실패한 매뉴얼 괴담, 그러나…

나폴리탄 괴담은 서술자는 공포를 인식하지 않… 못한 채로 기록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상한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열거되고, 독자만이 그 사이에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한다. 이 소설은 그 구조를 행정 매뉴얼로 나타냈다. 문서는 공포를 공포로 서술하지 않는다. 공포는 절차 안에 숨어 있다.

Q2를 보자.

“전산조회 결과 해당 주민이 사망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전입신고를 하러 왔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전산상 사망자로 등록된 채 창구에 나타나는 이 상황을 매뉴얼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담당자는 “창구에서 해당 주민의 생사 여부를 임의로 판단하지 않”는다. 임시접수 후 7일을 기다린다. 그리고 민원인에게는 “북부지역 기록 전환 과정에서 전산자료가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있어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라고 안내한다. 당신이 전산상 죽어 있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은 채.

Q3은 북부에 남아 있는 가족이 생사불명일 때의 처리법이고, Q6은 동일한 임시식별번호를 가진 주민이 복수 확인될 때의 처리법이다. Q8은 동행자가 신고인 대신 답변하거나 내용을 정정하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담당자는 신고인 본인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되, “동행자의 개입 가능성을 창구에서 단정”하지 않아야 한다.

이 Q&A들이 열거되는 방식 자체는 확실히 매뉴얼 괴담의 문법이다. 각각의 상황은 극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망자도, 생사불명의 가족도, 의심스러운 동행자도 모두 동일한 행정적 어조로, 동일한 글자 크기로, 동일한 문단 구조로 처리된다. 아무것도 강조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동일한 무게로 중요해보인다.

이것이 매뉴얼괴담이 산문 괴담보다 강력할 수 있는 이유다. 서술자는 놀라지 않으니 독자 혼자 한참 뒤에 이해하고 놀란다.

그리고 이 소설과 같은 매뉴얼을 업무로 다뤄본 사람은 이 소설을 보고 더 크게 놀란다. 문장들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어조, 어딘가에서 읽은 것 같은 분기 처리 구조. 그 익숙함이 공포를(그리고 욕과 두통을) 배가한다.

단, 이 소설이 ‘나폴리탄 괴담’장르로서의 매뉴얼 괴담으로서는 오히려 실패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나폴리탄 괴담의 공포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독자가 “아” 하는 순간에서 온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Q1을 읽으며 이미 모든 구조를 파악하고,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다 안다. 초판 매뉴얼이 스스로를 너무 열심히 해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Q는 예외 없이 “이 절차는 전입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를 방지하기 위한 임시 확인 절차입니다”로 끝난다. 이 면피 문구의 반복이 오히려 의도를 너무 선명하게 드러낸다(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반전이 없으니 괴담이라기보다는 내부고발 문서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실패”가 다음 층위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3. 통일 디스토피아

이 소설의 배경은 2052년 통일 이후다. 북부 출신 주민들이 남부로 전입신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통일의 과정이나 정치적 사건을 단 한 줄도 직접 서술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오로지 행정 처리 절차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통일 디스토피아는 장벽이나 검문소, 감시카메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동사무소(아 요즘은 주민센터던가) 전입신고 창구에서, 전산심사 분류 코드에서, 개정이력 스탬프에서 드러난다.

초판 Q1은 “거주·이전의 자유는 남부지역 주민과 북부지역 출신 주민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장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현행본 Q1에 이 문장은 없다. 권리의 동등성 선언이 통째로 삭제됐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구 체계 기록의 전산 전환 및 전환기 자료 정리가 완료되지 않은 사례가 있을 수 있습니다”라는 기술적 문장이다. 6년 사이에 권리 언어가 기술 언어로 교체됐다.

Q12는 현행본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삭제] 2056. 7. 1. 개정으로 별표 4에 이관함”이라는 한 줄만 남아 있다. 별표 4는 여기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독자는 별표 4를 읽을 수 없다. 민원인도 마찬가지다.
이 대조는 전형적인 디스토피아의 작동 방식(서류와 같은 법적 절차를 통한 점진적 배제)을 무미건조하게 표현한다. 통일 직후의 매뉴얼은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열심히 부인했다. 6년 뒤의 매뉴얼은 더 이상 부인할 필요가 없다. 시스템이 처리한다.

 

4. 관료주의 비판: 책임 없는 구조의 완성

이 소설이 단순한 통일 서사나 정치 우화에 머물지 않고 관료주의 비판 소설로 읽혀야 하는 이유는 개정이력에 있다.

30차 개정의 궤적을 따라가면, 이 소설이 묘사하는 것이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님이 드러난다.

초기 개정들(1~10차, 2052.8~11)은 현장 감수성의 산물처럼 보인다. “사망자”를 “사망기록 보유자”로 바꾸고(1차), 생사불명 가족을 담당자 판단만으로 세대에서 제외하지 못하도록 하고(2차), 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반려하지 말라고 규정한다(3차). 어딘가에서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났고,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이 조항들을 만들었을 것이다(그러길 바란다). 의도는 좋았다. 아니… 의도’만’ 좋았다.

14차 개정(2053.2)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정착지원 참고정보” 표시 대상자에 대해 관계기관 협의 절차가 추가되고, 동시에 “등급, 산정 사유, 관계기관 조회 내용은 창구에서 설명하지 않도록” 한다. 민원인 모르게 어딘가에서 등급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역시 아마도 선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제발).

26차(2056.3): “전환정착 참고등급”이 “관계기관 협의 필요 여부”로 다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한 문장이 추가된다. “협의 완료 전까지 주민등록표 정리 또는 작성을 보류할 수 있도록 함.” 수리 여부의 “직접”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협의가 끝날 때까지 사실상 전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직접”이라는 한 단어가 모든 것을 면피한다.
이 문장의 구조를 알아보는 사람은 안다. 공공기관 매뉴얼을 많이 본, 써본 사람이 작성한 문장이다.

30차(2058.6): 모든 절차가 주민등록정보시스템 자동심사 결과로 일괄 처리된다. 담당자는 전산이 표시한 처리유형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개별 사유에 대한 세부 설명은 민원인에게 고지하지 않음.”
그리고 2058년 12월 31일, 2059년 12월 31일, 연이어: 현행 유지.

이 30차례의 개정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관료주의의 가장 섬뜩한 특성이다. 누가 이 매뉴얼을 썼는지 알 수 없고, 누가 등급 체계를 설계했는지 소설은 말하지 않는다. 담당자는 시스템을 따랐고, 시스템은 관계기관 협의 결과를 따랐으며, 관계기관은 상급기관 지침을 따랐다. 모두가 절차를 따랐을 뿐이므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전화는 돌고 돌고, 담당 부서는 없고, 증거는 공문서로만 남는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이 소설은 행정 문서 형식으로 실증한다. 빅브라더는 없다. 악의를 가진 설계자도,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급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Q&A가 있고, 개정이력이 있고, “현행 유지”라는 말만 있다. 악의 없이도 차별이 작동하고, 선의로 만든 조항이 배제의 도구가 되며, 책임 소재는 언제나 한 칸 위의 시스템에 있다. 나만 아니면 돼. 시스템이 그렇게 결정했어. 나는 절차대로 했어.

 

5. “현행 유지”라는 결말

소설의 제목이자 마지막 부분인 “현행 유지”는 이중으로 작동한다.

행정 문서의 언어로는 단순히 “변경 없음”이다. 정기검토를 실시했으나 별도의 개정 사항이 없다는 사무적 기록. 그러나 소설로 읽으면, 이 두 단어는 시스템의 완성을 가리킨다. 7년의 개정을 거쳐 도달한 이 상태가 현행이고, 이 현행이 유지된다. 더 이상 해명할 필요가 없다.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아주 잘…

초판의 매뉴얼이 그토록 열심히 “이것은 전입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반복했던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전입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행본은 그 문장이 필요 없다. 전산 자동심사가 분류하고, 관계기관 협의가 보류하며, 별표 4가 안내한다. 담당자는 이유를 알 필요가 없고, 민원인은 이유를 들을 수 없다. 투명한 절차가 불투명한 시스템을 감싼다.
이 구조 안에서 폭력은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처리유형이고, 이관 사유이며, 협의 완료 대기다. 누구도 나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6. 이 소설이 말하는 진짜 공포-“행정 언어를 몰라? 그럼 죽어야지”

이 소설은 행정 언어를 읽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만 공포를 전달한다. “협의 완료 전까지 보류”가 사실상 거부와 동일하다는 것, “직접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처리기한에서 구체적 날짜가 사라질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 모든 것은 매뉴얼 안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온전히 감지한다.

이것은 이 소설의 결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테제이기도 하다. 행정 언어는 자주 접한 사람, 또는 전문가만이 해독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몇년을 일했지만 나도 매번 보면서 이게 뭔소리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정작 중요한 에러나 처리방법은 전화해서 물어봐야 된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언어를 먼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배울 기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매뉴얼은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가 매뉴얼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북부 출신 주민이 창구에서 받아드는 처리완료 확인서 하단의 안내문도, 별표 4도, 관계기관 협의 결과도 다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이 소설이 가장 불친절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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