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끌꺼끌한 주황색 공모(감상)

대상작품: 주황색 (작가: Xx, 작품정보)
리뷰어: 녹음익, 1시간 전, 조회 9

주황색은 어느 날 갑자기 특정 자극에 과민증을 앓기 시작한 화자를 조망하며 시작된다. 화자는 처음에는 위화감과 가벼운 당혹감만을 느끼지만, 곧 자극이 과민하게 느껴지는 정도가 빠르게 심각해진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갖고 이에 대처하려 한다. 그러나 의사는 기질적인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정신증일 가능성이 낮다는 화자 본인의 추론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병증과 가장 유사한 예는 층간소음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귀트임이 있을 것이다. 원래는 대수롭잖게 흘려 보낼 중립적 자극이 문득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해당 자극에 강한 부정적 정서가 결합되는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 뇌가 해당 자극을 경계해야 할자극이라 학습해버리는 현상이다. 그 결과 해당 자극이 뇌에 의해 위협 신호로서 분류되면서, 점점 더 자극에 과민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실제로, 자신의 증상이 우울·불안·무기력 같은 부정적 정서와 연동돼 있다는 화자의 보고는 이 질환이 높은 확률로 학습된 과민증일 것이라는 심증을 야기한다.

 

하지만 화자의 병증엔 일반적인 사례와 달라 보이는 구석이 있다. 문제가 되는 감각이 소리나 촉감처럼 흔하게 보고되는 종류가 아니라 특정 파장의 색이라는 증상 자체의 희소성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해당 자극, 정확히 말해 주황색을 과민하게 감지하게 된 원인이나 계기가 철저하게 불투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증상에 대처하는 화자의 전략도 기묘한 측면이 있다. 보통 귀트임 같이 반복 학습에 기인한 과민증은, 자극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증세가 심해지기 쉽다. 싸우기 위해서는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극을 무시하도록 훈련하거나 아예 자극이 없는 환경으로 옮겨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 중 하나이다.

그러나 피하면 더 커진다. 하지만 계속해서 바라보면 이겨 낼 수 있다는 화자의 말 그대로, 병증과 직접 마주하는 화자의 방식은 기묘하게도 효과적으로 병의 증세를 경감시킨다.

 

하지만 정말 화자는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라본것일까?

 

이 이야기가 호러 장르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일종의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진술이라는 성격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피하면 더 커진다. 하지만 계속해서 바라보면 이겨 낼 수 있다는 문장 이후로 이어지는 자기 고백적인 서사는 표면적으론 화자가 자신의 죄책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보다 성숙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는 구성을 띄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그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자기서사를 어설프게 구축해 화자의 본심을 은폐한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화자는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를 기만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연민 받아야 할 존재로 이상화하며, 그것을 상당히 의식적인 혹은 적어도 반의식적인 차원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사악한 존재로 남는다.

스스로를 기만하려는 화자의 책략은 정신질환의 증상을 모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병원에 가면 안 된다. 의사가 내 상태를 보면 알 것이다. 내 머릿속이 불타고 있다는 걸. 그러면 엄마처럼 갇히게 된다.’는 화자의 진술은 화자가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정신과적 질환으로 범주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화자 본인에 의해 역시 명백하게 진술되듯이, 이러한 심리상태는 현실검증력을 일부러 손상시킴으로써 인위적으로 병적인 상태에 진입할 수 있도록 화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입된 도구인 노트에 의해 조장된 것이다. 게다가 화자는 노트를 단발성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심리상태를 변조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활용해왔다(‘현실이 힘들수록 나는 노트에 더욱 매달렸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둘이나 갖고, 직장에 다니는 등 화자의 현실 기능이 상당히 우수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화자가 스스로의 망상을 상당히 의식적인 차원에서 정밀하게 관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실제의 망상장애라면 망상과 관련되지 않은 영역에서 현실 기능이 유지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화자는 과한 몰입에 의해 환상이 길러진케이스로 의도적 조정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화자가 처음부터 정확히 정신질환을 모사하겠다는 계획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머니의 문제로 정신과 질환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을 공산은 있다), 결과적으로 화자가 행하고 있는 일은 질환의 모방인 것이다.

노트의 사용에 대해선 죽은 동생이 살아있기를 소망하면서노트를 쓰기 시작했다고 감상적으로 포장하지만, 결국 화자가 노트를 통해 최종적으로 달성하고 있던 것은 병적 증세를 촉발함으로써 외상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너무 똑똑했다간 엄청난 사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나는 찬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해야 했다.’는 진술은 화자가 결국 동생이 살아나 독립적인 인격체로 자기 삶을 통해 행복해지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저 철저하게 자기 통제 하의 도구로 남아 도덕적 엄폐물로 기능해주기를 바랐었다는 속내를 보여준다.

단순하게 망각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복잡한 방식을 사용한 이유도 전략적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화자의 외상적 기억은 단순히 자신이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동생의 죽음, 범인인 자기 자신의 은폐, 어머니의 광기, 아버지의 자살, 누나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라는 도덕적 차원에 광범위하게 얽혀있다. 때문에 만약 순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려 한다면 도주하는 자신에게 지워질 도덕적 혐의를 회피하기 어려우므로 도덕적 자아개념이 손상될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 병적 증세를 동반시킨다면 선한 사람이라는 자아상을 유지하면서 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의 자기서사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일단 화자는 주황색으로 표상되는 외상적 기억을 가졌고,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다. 화자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 혹은 그보다 이후의 특정 시점부터 방어기제의 일종인 부정을 흉내 내기시작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외면하고, 부정을 바탕으로 환상적 현실을 꾸며내는 것이다. 이러한 조합은, (실제론 개별 증상에 따라 각기 다른 정신장애로 진단받겠지만) 죽은 가족이 여행을 떠났다고 믿으며 가족의 방을 수십 년 간 보존하는 사례, 죽은 가족의 시신을 집 안에 두고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례(mummification이라 부르기도 하며, 드물지 않다), 임신 거부증이나 부적응적 백일몽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극적이지만 충분히 현실적이다. 만약 정말로 화자가 이 같은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면, 화자는 버거운 기억을 견디다 못해 병에 걸려 불가항력적으로 동생의 죽음을 부정하게 된, 연민해 마땅할 대상이라는 자아상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죄책감에 대해 화자가 취하는 태도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단서이다. 일단 화자는 20년 넘는 기간 동안 자신에 대한 기만을 계속해서 강화해왔다. 연습실 외에도 월세가 일기에서 언급되는 것을 보면 동생의 자취방 같은 것도 마련해둔 상태일 가능성도 있다. 조금 더 상상력을 과하게 발휘해 보면, “11월인데 왜 저렇게 얇게 입혀 놨어. 애가 춥잖니.”라는 엄마의 말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엄마의 조현병을 악용해 일종의 공유정신병적 상태까지 유발해놓았을 수도 있다. 어떤 수준의 전략이 동원되었는지 그 전모를 알 순 없지만, 그 결과 현실검증력은 상당 부분 훼손되어서 화자는 아예 동생의 모습을 실제처럼 지각하며 대화까지 나누고 있었고, 본인이 먼저 동생에게 주황색에 대한 언급을 건넨 뒤 동생이 주황색 과민증에 대해 심리적 억압의 가능성을 내세우며 십 여 분 동안본인을 추궁할 때도 태연히 외면하는 게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기만 전략의 기저에는 언제나 죄책감, 자신이 동생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은폐했다는 데서 오는 죄악감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동생과 마주한 화자가 처음 꺼낸 말이 미안해였다는 점은 화자의 회피 전략을 붕괴시키는 가장 큰 요소가 죄책감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화자가 심지어 죄책감을 살아있는동생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부채감으로 왜곡해 우회하는 경로까지 일찌감치 활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식 아래 억눌린 상태에서도 죄악감이 화자에게 모종의 심적 영향력을 가하고 있었다는 추정을 강화한다.

주황색 과민증이 부정된 기억에 기반한 일종의 침습적 이미지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파악이 가능하다(‘주황색 티셔츠의 불길이 바닥에 옮겨 붙고 있었다.’). 억누른 죄책감이 임계점을 넘자 마침내 증상으로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이에 대처한 방식은 다름아닌 피하면 더 커진다. 하지만 계속해서 바라보면 이겨 낼 수 있다였다. ‘계속해서 바라보면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도 그렇고, 화자가 동생의 생존여부를 어떠한 형태로든 내심 인식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고백(‘나도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제발-‘), 주황색의 진짜 의미가 의식으로 완전히 올라온 후에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던 억압된 기억에 경악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이를 외면할 새로운 전략만을 계속 찾아 헤매는 화자의 모습(‘일단 집에 가자. 집에 가면 괜찮아.’, ‘선우한테 전화를 해야 해.’)을 조합하면, 이는 증상의 진짜 원인을 어느 정도 자각한 상태에서 작위성을 상당량 개입시켜(‘눈을 떼지 마. 숨 쉬어. 집중해.’) 진행한 전략적인 층위의 수정일 가능성이 높다. 수정된 전략을 최종적으로 검증하는 자리로 구태여 동생의 공연장을 선택한 것(‘나는 선우가 하는 음악에 관심이 없어서, 중요한 날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이나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와 같이 수정된 전략이 무용해지자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던 원래의 전략으로 재빠르게 회귀시키는 행적(‘억지로 보려고 하지 마. 무시해.’) 또한 이런 추측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준다. 화자는 부정이라는 기존의 회피 전략으로 더 이상 죄책감의 침투를 방어하기 어렵게 되자 주황색 과민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창작해냄으로써 더 원시적이고 강력한 방식인 왜곡으로 전환하기를 시도한 것이다. ‘계속해서 바라보면 이겨낼 수 있다라는 표현은 사실 계속해서 왜곡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본심의 은폐였다. 화자에게 외상적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기보다는 전략적으로 대처해야 할 심리적 방해물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러한 조처 후 동생 앞에서 효과를 검증하는 것으로(“성공까지는 아닌 것 같고, 지나간 거지.”) 화자의 방어 전략이 성공적으로 조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납골당을 방문하자는 누나의 권유라는 현실 직면이 더해지며 전면적인 붕괴가 시작된다(‘선우는 26년 전에 죽었다.’). 급하게 왜곡을 다시금 부정으로 되돌려보기도 하지만 담뱃불이라는 추가적인 직면이 가해지자 끝내 무너지고 만다. 이에 뒤따르는 화자의 마지막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화자는 자신이 기존에 활용하던 회피 전략을 뿌리부터 철저하게 고백한다. 그런 뒤 불타오르는 연습실에서 동생을 구하는 환상을 체험한다. 이는 화자가 자신이 외면해오던 죄책감을 마침내 수용하는 과정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기존 전략을 파기하고(‘나는 불길 속에 수첩을 집어 던졌다.’) 동생을 구하며 함께 죽는 환상에 기반한 새로운 전략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라 볼 여지도 있다. ‘수첩 따위는 필요 없어졌으니까. 수첩은 가짜를 진짜로 만들 때나 쓰는 것이다.’라는 진술 직후 새로운 환상 속으로 뛰어드는 모순적인 행동은 화자가 지금 체험하는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강하게 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백은 자신의 이상화된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절차로 설명할 수 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죄악을 뉘우치는 태도로 고백하는 것이 도덕적 자아의 방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환상 속에서 꺼낸 화자의 마지막 말이 다시는 널 떠나지 않을게.’였다는 점은, 이와 같은 추측을 지지하는 단서이다. 만약 화자가 자신의 죄악감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라면, 올바른 해소 절차는 동생의 죽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책임을 제삼자에게 고백하며 동생을 떠나 보내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는 널 떠나지 않을게.’라는 마지막 말은 다시는 환상이 붕괴하지 않게 만들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화자는 죄악감을 구성하는 주요 부분, 자신이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을 은폐했다는 사실을 현실의 타인에게 고백하는 과업도 결국 수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이 동생을 구한다는, 혹은 동생을 보호하며 함께 죽는다는, 새로 만들어진 환상에 자신을 던져 넣을 뿐이다.

사실,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화자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다. 동생을 구하는 환상은 단순히 직면을 쉽게 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고, 이후엔 자신의 죄를 가족에게 고백하고 그 결과를 감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화자가 자신을 계속 기만하기를 선택한 것이라면, 환상 속에서 죽은 화자는 이후로 자신이 죽었다는 환상 속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는 기만을 유지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 기능은 사실상 소멸될 터이다. 화자는 심지어 결혼해 자식까지 본 상황임에도 말이다.

 

맨 처음에 화자를 사악하다고 표현했지만, 화자가 느끼는 죄책감만큼은 진실할 것이다. 또한 기만이라고는 했지만 기만의 대상은 죄책감을 견딜 수 없던 자기 자신일 뿐이었다. 화자는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부류의 악당은 아니지만, 자신이 당면한 죄책감 앞에서 끝도 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며 기만을 기만으로 덮는 사악한 인물로 변모해갔다. 그러한 점에서 화자의 행적은 처절한 만큼 공포스럽다. 죄악감을 당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 그래서 우리 또한 기만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그토록 철저히 스스로를 기만하고, 환상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주황색에 대한 대응을 발 빠르게 수정하고, 죄책감마저 우회로로 흘려 보내는 식으로 악착같이 노력했어도, 두 세계가 갈라지는 시작점에 닻처럼 내려진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절대로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본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차삼동 작가의 주황색은 이처럼 죄책감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희귀한 증상을 가진 괴질, 상궤를 벗어난 기행, 그리고 그 근저에 도사린,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대상이라는 세 겹의 흥미로운 소재에 실어 명확하면서도 새로운 형태로 제시해준 공포소설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인간이 갖가지 기현상에 시달리다 외면하던 원죄와 마주한다는 플롯은 호러 장르에서 꽤나 자주 차용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현상을 위어드코어 톤의 극도로 암시적이고 뒤엉키고 난폭한 환상 정도로 표현한다. 그런 측면에서 주황색은 이야기의 줄기가 되는 기현상 자체에도 설득력 있는 인과 구조를 부여하고 그 기전을 세밀히 조적하여, 화자의 미시적 경험으로부터 죄책감이라는 주제가 도출되는 과정에 높은 개연성을 부여한 이야기로서, 뚜렷한 변별성과 밀도 높은 서사적 정합성을 이끌어냈다. 본 작품의 접근법이 호러 장르 내에서 죄책감에 대한 방어기제 표현방식의 상대적으로 소외된 층위를 보다 양지로 끌어내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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