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이상이 없습니까? 감상

대상작품: 이상 없습니다 (작가: 노르바, 작품정보)
리뷰어: 이외, 47분 전, 조회 10

가끔 그런 때가 있습니다. 모두 망가졌고, 모두 옳지 않고, 분명히 잘못 되었는데 모두 정상인 상황.

그런걸 보고도 우리는 ‘이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리뷰는 간단하게 끝날 예정입니다. 작품이 워낙 명료하기도 하고, 이 작품의 진가는 글의 깊이보다는 글이 던지는 의문을 독자가 받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전제품의 생애를 살펴볼까요. 가전 제품은 도구입니다. 도구의 목적은 정상 작동이죠.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기능할 수 있으니까요. 그 기능은 가전제품 본인을 위한게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 즉 소유자인 인간을 위한것입니다. 그런 가전제품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불만 없이, 기약 없이, 고장날 때까지 작동합니다. 이걸 인간 노동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선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기능보다는 정상에 주목해주셨으면 합니다.

십 년 넘게 작동한 가전제품이 정상 작동하는게… 과연 정상일까요?

 

기사가 방문하면 제품이 정상 작동하여 결함을 확인할 수 없다.

작품은 우리의 오랜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이상하게 전자제품이 수리할 때만 되면 정상이 된다.” 모두 한 번쯤 겪어보았을 일입니다. 노트북 수리 센터에 갔더니 노트북이 멀쩡히 켜진다거나, 하는 일이요.

 

이 작품은 꽤 단순한 반복 구조입니다. 거칠게 로그라인을 뽑자면 이럴겁니다. “수리기사인 주인공은 오래 된 가전제품을 수리하고, 이상하리만치 모든 게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상’을 확인한다.” 그게 전부입니다. 이 반복이 때로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 ‘이상이 없다. 그래서 뭐?’에 머무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 글의 표층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그런 글이 있죠. ‘그래서 뭐?’를 독자 본인이 찾아야 하는 글이요.

 

이제 작품을 읽어봅시다.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알고 싶지 않은 숫자가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재민은 “사람들이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쪽을 택하기 시작하고 나서도 조금 더 버텼”습니다. 그는 구시대의 유물이며 (소비자들에게) 불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수리는 어렵고 소비는 쉬우니까요. 그런 기술자에게 반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가전제품이죠. “이놈이 기술자 눈치 보네.” 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듯이요.

우리에게 가전제품은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흐린 존재입니다. 오래 전 쓰던 가전 제품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저는 뭘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주인공도 비슷합니다. 그는 기억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언제부터 그 일이 없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TV가 어떻게 됐는지도.

가전제품이 어떻게 끝났는지를요.

뭐 중요하진 않을겁니다. 가전 제품이야 새로 사면 되고 쓰지 않으면 버리면 되니까요. 우리는 솔직히 이러지 않습니까.

“두들겼다, 쳤다, 발로 찼다, 소리 질렀다, 던질 뻔, 화가 났다.” 다들 솔직하게 말했다.

이상 없음 처리 비율은 79퍼센트였다.

인상적인 지점은 이 작품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과 이질적인 정보(이상 없음)을 병치한다는 겁니다. 병치의 효과에 따라 우리의 일상은 더욱 이질적이어지죠.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이상”이란 도대체 뭘까요. 고장? 비정상?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 그렇다면 “이상 없음”은 자연히 ‘제대로 기능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면 수리는 그 기능을 고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겁니다.

그러나 작품에서 이상은 어떻게 감지되나요. ‘멀쩡해지는 것’으로 감지됩니다. “고장이라는 건 기계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 인데도 수리기사가 가면 “그냥 조용해져요. 소리가 없어져요.” 라는 말이 돌아오죠. “사람을 알아 볼 방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판별할 수 있는 존재 앞에서 조용해집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작품에서 가전제품을 묘사하는 방법은 꽤 일관적입니다. 단순한 의인화라고 하기엔 묘하죠.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니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마치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환자 같았다.

숨소리였다. 숨을 참았다 뱉는 것 같았다.

무언가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듯한 불규칙함. 고르지 않은 호흡.

저는 작중 묘사를 읽으며 어떤 억압감, 답답함, 숨이 막혀옴에도 그 숨을 토해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깊은 바닥으로 억눌러야하는…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소리를 낼 수 있는 부품이 없었으니까. 전기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재민은 그것을 알면서도 한 발짝 더 걸어 나가기까지의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요. 한 자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그런 존재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걸 알고 싶지 않은 숫자라고 말했죠.

 

지금까지 늘어놓은 걸 합쳐봅시다.

새로 사는 게 미덕이 된 시대에, 오래도록 홀로 작동해 온 가전 제품이 오작동하기 시작하고, 그걸 ‘고쳐 줄’ 수리기사 앞에서 제품은 정상 작동’하는 듯’ 합니다.

왜일까요?

자신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평소에 문제가 발생하면 안됐겠죠.

작품이 가전 제품을 바라보는 방향을 의인화라고 할 때, 그건 ‘의도를 가진 존재’로서의 의인화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존재’로서의 의인화일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자신의 이상을 알아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수리기사 앞에서 정상 작동 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아이러니 일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수리기사 앞에서의 정상 작동은 호소나 요구가 아닙니다. 나의 비정상과 이상을 알아달라, 그런게 아닐 겁니다.

만약 호소라면, 정상 작동하고 있는 이 상태가 이상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거겠죠. 그러나 수리기사의 목적은, 수리라는 것의 기준은 만들어졌을 때의 기계 상태에 맞춰져있고 그 기준에서 이탈한 존재 또는 이탈 된 존재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간극이 작품이 보여주는 긴장입니다.

 

작품에서 이 ‘이상 없음’을 바라보는 방향은 아래와 같습니다.

원인이 설명 가능한 범위의 밖에 있는 것

설명은 특정 기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어떤 현상을 어떤 프레임 안에 밀어 넣는 것, 또는 그 프레임에 맞추어 재조립 하는 과정. 그게 설명이라면 이상 없음은 설명될 수 없는 상태가 맞습니다. 그게 가전제품들이 유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통로인 수리기사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비극일 것이고요. 그렇게 발견되어 봐야 정상으로 ‘수리’되어 기약 없이 작동되겠지만요.

 

그러므로 저는 이 작품을 정상의 비명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가끔 그런 때가 있습니다. 모두 망가졌고, 모두 옳지 않고, 분명히 잘못 되었는데 모두 정상인 상황. 그런걸 보고도 우리는 ‘이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의 가전제품들은 언젠가 발견될까요? 그렇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나면, 그 가전제품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에 대한 답 모두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게 이 작품은 무척 슬픈 이야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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