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SF란 뭘까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에 대한 정의는 데이먼 나이트의 ‘우리가 손가락을 들어 SF라 가리키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걸 보고 SF라고 여겨요. 그러니 이건 좋은 SF겠죠. 하지만 이 정의는 너무 성긴 정의죠.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가공의 이야기로 정의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SF의 기원을 거슬러가 보면 ‘프랑켄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분명 호러소설의 면모도 있지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탄생시킨 건 과학기술입니다. 이는 서양이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관점에 기인하는데, 베이컨이나 로크 등 계몽사상가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봤고, 과학발전을 통한 계몽의 빛이 인류를 환하게 비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죠. 물론 소설가는 의심합니다. 발달된 과학기술이 정말로 우리 인류에게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우리는 괴물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이렇듯 당연하다는 믿음에 소설가들은 소설의 형태로 그 의문을 던지죠. 정말 그래? 그렇다면 위대한 침묵은 어떤 믿음에 대해 정말 그런가? 하는 질문을 던질까요?
새로운 기술에 대한 희망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요소가 던져지죠. 배신자가 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루토늄 사태에 관해이야기 하면서 소설은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과학은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의 열쇠지만 과학으로 열어젖힌 그 문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과거에 연 문에서 수많은 죽음이 나왔지만 아직도 그 문을 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막대한 힘을 얻었지만 교훈을 얻진 못했죠. 어떻게 해야 할지 합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욕망과 배신감이 교차하고 결국 과학은 폭주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참상 앞에서 우리는 침묵해야 하죠.
좋은 드라마에요. 멋진 SF가 아니라 좋은 드라마라니 무슨 소리냐고요? SF, 특히 하드SF는 기술이 주인공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결국 인간들의 이야기에요. 중력파에 대해 안다면 이야기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결국 비유고, 중력파나 자연의 네 가지 힘이나 반물질 같은 건 알면 좋지만 몰라도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어요. 이건 결국 장기말로 이용당한 사람이 배신감 때문에 실수하는 이야기니까요. 좋은 드라마 여아만 멋진 SF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드라마가 없다면 SF소설이 아니라 기술 문서에 불과해요.
만약에 주인공이 이혼녀가 아니어서 양육비를 보내지 않아도 됐다면, 직장에 좀 더 초탈할 수 있었더라면 부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죠. 첫 번째 거래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기 전에는 그만둘 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거래 때문에 마지막에 욕심을 부립니다. 아니, 이게 아니더라도 배신감이 아니었다면 특이점에 도착하기 전 정지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이야기들은 다른 가능성을 모두 지워가면서 착실하게 끝으로 독자들을 인도합니다. 그렇기에 인류는 파수꾼의 경고를 알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한 체 특이점에 도달하죠. 그다음에는 되돌릴 수 없는 경이감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의 기원을 프랑켄슈타인으로 보지 않아요. 이 이야기의 기원이 되는 이야기는 아마 ‘판도라의 상자’ 겠지요. 인간은 과학이라는 도구를 얻어 전지전능에 가까운 막대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단 하나 이것만은 열어선 안 된다는 경고를 받지만 욕망과 호기심 때문에 상자를 열고 말죠. 그리고 상자에서는 온갖 악덕들이 튀어나와 인간을 괴롭힙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는 마지막에 희망이 남죠. 이 이야기에서도 희망이 남아있을까요? 아마도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이제 침묵을 지켜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