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추리 스릴러물의 정석, 비틂과 도구 사이에서 비평

대상작품: 벽지 뜯기 (작가: 우재윤, 작품정보)
리뷰어: 담장, 11월 12일, 조회 30

작품의 다 읽은 후 머릿속에 떠오른 총평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였다. 소설은 분량에 따라 단편, 중편, 경장편, 장편 등으로 나뉘는데 글을 한 번쯤 써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장편을 쓰던 사람이 중편을 쓰거나, 단편을 쓰는 사람이 장편을 쓰는 건 확연히 다르다. 물론 분량이 많아질수록 난이도가 어려워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분량과 난이도는 사실 상관관계가 많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대신 각 분량의 특성에 맞춘 사건의 배치와 전개 속도의 차이 정도가 이야기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우선 장편(제 기준으론 1000매 이상입니다.)을 쓰는 사람은 큰 그림을 보는 편이다. 장편은 추리스릴러 영역에서 조금 더 시너지를 발휘한다고 생각하는데, 채워나가야 하는 장면은 많지만 그만큼 복선을 분산하여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리를 요하는 장르일수록 완급 조절이 관건인데 이는 반전이 드러나기 전에 독자가 너무 일찍 알아채면 이야기의 흡입력이 떨어지고, 너무 늦게 알아챈다면 복선이 부실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경우에는 장편 추리물을 쓸 때 이야기 흐름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눈다. 하나는 메인 반전, 다른 하나는 서브 반전이며 ‘연막’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서사 트릭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이를 테면 분량이 충분한 장편에서만 쓸 수 있는 편법인데, 작품 초반에 메인 반전에 관한 이야기를 한 뒤, 그것을 서브 반전과 교묘하게 엮은 다음 독자들이 서브 반전을 메인 반전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추리물의 경우 장편이 조금 더 복선의 회수 시점을 컨트롤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300매 정도의 짧은 소설은 어떨까? 일단 분량이 짧으면 사건을 최대한 압축해야 한다. 그 말은 장면 하나하나가 낭비되지 않고 충실히 서사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한된 분량에서 속도감과 복선 배치가 어느 하나 뒤떨어지지 않고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에 사건 배치를 통한 서사 트릭보단 ‘도구’를 통한 트릭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벽지 뜯기’는 이러한 도구의 역할을 완벽히 작품에 녹였다. 게임의 설정만큼 소설 속에 트릭으로 쓰기에 적합한 것이 없다. 사실 글쓰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분야가 그렇다. 다른 분야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새로운 분야로 가져와 응용하고 융합하는 것. 이미 소설의 대가들이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대부분의 결말을 시도했기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는 어렵다. 특히나 추리소설에선 ‘사실 내가 범인이었다’, ‘범인은 모든 사람이다’, ‘사실 범인은 없었다’ 등의 바리에이션 때문에 식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굳이 결말을 비틀어 꼬려기 보단 도구로 독자의 인지를 제한하면 된다.

‘벽지 뜯기’는 공포 방탈출 게임에 갇혀버렸다는 흔한 주제로 시작하지만 2D 게임을 배경으로 채택하여 독자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게 조성한다. 이를 테면, 무작정 잔인한 장면과 귀신을 연달아 넣는 것이 아닌 그저 게임처럼 시점이 양옆으로만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설정 자체가 기묘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채택된 게임이 특이한 것도 아니다. 이미 ‘러스티 레이크’ 등과 같은 양옆 움직임만 가능한 추리 게임이 판을 치고 있다.

하지만 소설에 이 설정을 가져온다면 말이 다르다. 게임을 자주 해본 독자와 같은 경우 텍스트로 이루어진 줄글 속에서 해당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예를 들어 아이템이 화면 정중앙에 떠올라 방향을 조절한다든가, 카메라 시점이 고정되어 있다면 뒤를 볼 수 없다는 등)를 머릿속에 그리며 감상할 수 있기에 좋고, 게임이 익숙지 않은 독자들은 해당 설정 자체만으로 참신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 유저들은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보다 이 소설을 읽을 때 재미가 떨어지는가? 일단 나는 호러 게임 마니아다. 2D, 3D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 설정에는 익숙하디 익숙하다. 하지만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즐거웠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신함과 기이함을 동시에 주었을까?

이러한 부류의 게임은 원래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제작되는데, 이 작품 속에서는 기이하게 1인칭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작중에 이런 말이 있다. 시선은 게임 화면처럼 붙박여 뒤를 돌아볼 수 없는데, 악취와 공간감이 너무나도 강했다고. 우리가 ‘시야가 제한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할 때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우리는 게임 밖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 장소에서 언제든 게임을 끄고 싶으면 끄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게임 화면 속에서도 플레이어의 모습이라든지, 손이라든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에 관측하는 시점의 주체가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로 여겨진다. 인벤토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 캐릭터가 보이지 않고 더군다나 움직임에 제약이 걸린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인벤토리는 그저 게임 밖의 나를 위한 게임 속의 도구일뿐, 보이지도 않는 게임 속 캐릭터를 상상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1인칭 시점으로 주인공을 꾸역꾸역 몰아넣는 부분에서 독자는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기존에 느꼈던 안락함은 사라지고, 이 익숙하지만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공간과 시점에 납작하게 달라붙어버렸다는 기분을 말이다.

‘벽지 뜯기’는 장면 하나하나를 게임의 설정과 현실 사이 괴리를 꿰매 만들고, 적절한 속도감으로 서사를 밀고 나간 탁월한 작품이다. 300매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전부 사용했다는 말이다. 정직한 방식으로 서사가 충실하고, 동시에 흡입력 있는 작품을 쓰긴 쉽지 않다. 그렇기에 앞으로 작가의 향후 작품 활동이 더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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