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에 크레딧 하나. 이 글을 쓰기 전에 1:1 특강이나 다름없는 대화를 나눈 분이 계시다. 이 글은 그 분께 배운 푸코의 기본의 기본의 기본 다이제스트를 실전 학습할 용도로 쓰였다. 물론 너무나도 기본인데다, 직접 그 책을 읽은 건 아니라 직접 인용을 달지는 않았다. 그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주의문 하나. 이 글은 제목과 달리 슈퍼히어로를 무작정 까내릴 목적으로, 협객을 무작정 찬양할 작정으로 쓰이지 않았다. 실제로 필자는 무협보다는 슈퍼히어로 분야에서 읽은 책이 더 많다. <소오강호>는 반도 못 읽었으나, DC, 마블 코믹스 만화는 종이책도 있고 아마존 킨들로 원서는 훨씬 많다. 실제로 슈퍼히어로들은 누적된 수많은 레퍼런스를 통해 재해석되어 꼭 이 작품에 등장한 슈퍼히어로들만 존재하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슈퍼히어로를 까내린다’라고 관심을 끈 것이 첫째는 그래야 조회수가 많이 올라서 뿌듯해지기 때문이고, 둘째는 무협에 대해 공격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까는 게 되지만 슈퍼히어로를 공격하면 ‘그래도 좀 아니까 만만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유는 이 작품 또한 그런 ‘슈퍼히어로’의 이데올로기를 공격하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 읽었다고 히어로물 까지도 말고, 무협을 찬양하지도 말자. 그랬다간 ‘형우’되는 수가 있다.
처음 이규락 작가의 <관종영웅 태권소년!>(느낌표가 중요하다)을 읽었을 때, 필자는 이작품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이 리뷰에도 적겠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서술전략이나 작품의 공격 대상 같은 것들. 그러나 결국 필자가 이 작품에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이 생겼고, 이 리뷰는 거기에 대해 초점을 두려고 한다.
동의할 수 없었다고 했지. 좋은 말 하려면 나쁜 말을 먼저 하는 게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 그럼 동의할 수 없는 지점부터 먼저 살펴 보 ⋯ ⋯ . 기 이전에 이 작품 내용부터 설명해야겠지.
이 작품은 주인공 형우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긍정적인 소설!’ 이다. 일단 주장하는 바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규락 작가는 근간인 <기니피그의 뱃살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에 실린 숱한 B급 코미디 단편들에서 볼 수 있듯 과격한 표현과 저세상 드립이 난무하는 작품을 주로 쓴다. 그러나 그 작품들 하나하나가, 자본의 뼈를 때리고 살을 찢을 각오로 집필되어 있다. 뼈가 있는 B급인 것이다.
즉 ‘긍정적인 소설’은 어디까지나 코미디적인 과장을 더한 반어법이다. 실제로는 형우가 우연한 계기로 정의를 실천했더니 관심을 얻고, 그 관심을 계속해서 얻기 위해 ‘히어로’가 되려다가 인생을 말아먹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내용이다.
그렇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내려온 유구한 관심병자 플롯. 최근엔 토드 필립스가 <조커>를 찍으면서 널리 알려진 그 서사다.
아, 이젠 진짜 동의할 수 없는 지점 건드리고 넘어가자. 처음 동의하지 않았던 지점은 이 작품 특유의 ‘비웃음’이었다. 애초에 플롯에서부터 묘하게 <조커>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기분이 나빴으나, 이 작품은 ‘형우’와 같은 사람들을 비웃는다.
‘무협’에서 ‘협객’은 ‘노동자’에 상응한다고 들었다. 무협에서 ‘무공’은 ‘몸’으로 휘두르는 것이며, 따라서 ‘몸으로 일해’ 무공을 휘둘러서 ‘협’이라는 개인적인 사상을 실천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내게는, 어딘가 ‘무협’을 비웃는 것으로 들렸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엄청난 착각이었다)
더 나아가, ‘조롱하는 것’이 전략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 실제로 그러한지 알아보는 것은 어려우나, 앞서 기술한 ‘무협’의 ‘협객’과 이 작품의 조롱 대상인 ‘형우’를 보았을 때, 오늘도 열심히 일해야 하는 사람들 비웃는 것처럼 읽혔다. 그 때문에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생겼’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정도 오독이었음을 부끄럽게나마 밝힌다.
첫째로, 이 작품은 애초에 ‘대중지향적인 서사구조’를 취하고 있지 않다. 대중소설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차용하는 레퍼런스들이 다분히 장르적인 것이므로,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장르문학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욕망은 처절히 좌절되면서 끝나고 만다.
둘째로, 대중을 겨냥하되 ‘중단편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즉 장편 영웅 서사와는 전혀 궤가 다르고, 따라서 읽는 독자도 다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주된 비판 대상은 ‘협객’이 아닌, ‘슈퍼히어로’다. 사격이다! 아군중지! 아군중지!
야, 그럼 협객이랑 슈퍼히어로랑 뭐가 다르길래 이런 소리를 하는데? 음. 그 소리를 무협 애독자들에게 가서 하면 항룡십팔장이 날아와서 오장육부가 분리된다는 건 안다. 실제로 지나가다가 한 번 봤다. 철인삼종경기 연습하던 분이셨는데 진짜 끔찍하게 비명 한번 못 지르고 비명횡사하셨다.
둘 다 ‘정의’를 쫓는다는 점은 같지 않아? 틀렸다. ‘정의’가 아니다. 애초에 ‘정의’에 대해 질문해야 맞는 것이다. 누굴 위한 정의, 무엇을 위한 정의인가?
무협을 좋아하는 모 지인이 있다. 그 지인이 말했다. 따로 문학을 전공하는 분은 아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의표를 찌르는 점이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이 말을 꽤 좋아한다.
“협은 지X대로 행동하는게 협이에요.”
협은 ‘사적 정의’다. 무협지 한 질 안에 장강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협객들이 등장하는데,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무공’과 ‘협’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을 실천해나간다. ‘정파’ ‘사파’ 그리고 ‘마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그랬는지 나중 가서 재해석되었는지는 몰라도 ‘협’을 자신만의 ‘무’로 실천해나가는 것의 ‘협객’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만약 강호에 정말로 명시적인 법이 있다면, 협객은 범죄자가 될 것이다.
슈퍼히어로를 지칭할 때 다들 하는 말이 있다.
“그거 마스크 쓴 정신이상자 아니냐.”
나름대로 순화하려고 노력한 표현임을 알린다. 특히나 작품에서도 언급되는 ‘배트맨’을 언급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배트맨 그거 불법 자경단 아니냐?” 글쎄, 이제와서 요즘 고담에서 배트맨이 불법은 아닌 것 같다. 음, 정확하게는 ⋯ ⋯ .
배트맨은 인정투쟁을 하는 히어로다. 법은 명시적으로 존재한다. 가끔 작품의 재미를 위해 법이 배트맨을 탄압하기는 하지만, 배트맨은 그저 연방도시 고담의 법이다. 명시적인 법이 아니고, 암묵적인 법. 법 정신 그 자체.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은 정의를 지킨다. 아니, 정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배트맨이 정의다. “나는 밤이다. 나는 복수다. 나는 배트맨이다!”
특히나 작품에서 인용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이런 점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먼 미래의, 배트맨이 은퇴하여 무법천지가 된 고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배트맨이 약속된 왕처럼 돌아와서 수많은 라이더 깡패와 새로운 로빈을 거느리고 정의를 실천하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무법적 고담은 무협의 ‘강호’와 비슷한 셈이기도 한데, 강호 또한 사실상의 무정부적 무법지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호의 도리’와 서양의 무법지대, -펑크나 -아포칼립스에서의 ‘정의’는 차이점이 있다. 전자는 개개인마다 다른 정의관을 가지고 서로를 ‘리스펙트’하는 반면, 후자는 서로 군림하고 통치한다. 배트맨이 고담시에 군림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듯 말이다.
이런 배트맨의 통치 수단이 ‘코스튬을 통한 공포의 각인’이라는 점에서, 배트맨은 모두의 내면에 이데올로기로서 효과적으로 내면화된다. 그런 점에서 ‘배트맨’이라는 상징은 ‘법’으로 실제로 ‘권력’이 되는 것이다.
아, 하여간 광인들의 축제가 벌어지는 도시다.
(기본적으로 미국 만화에 히어로가 ‘배트맨’만 있지 않다는 점도 알린다. 물론 어느 정도 유사한 속성이 있거나, 아예 ‘실드’ 같은 비밀첩보기관 소속의 요원, 군인인 경우도 있으나 ‘데어데블’처럼 ‘아 이거 완존 협객이자너’ 싶은 친구들도 존재한다. 거기다 앞서 말했듯 슈퍼히어로 만화 안에서도 여러가지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정말로 위 내용만 믿고 ‘응 슈퍼히어로는 협객만 못하네’ 했다가는 “너 그러다 형우되는 수가 있다.”)
무엇을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범죄자가 되기도 하며 광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형우가 원했던 것은 제목에도 드러나있듯 ‘관심’이다. 남들 쫓는 ‘정의’를 추구함으로서 ‘히어로’가 되어서 관심받고 싶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 형우는 범죄자가 아닌 마스크 쓴 강박증적 광인이 되고 싶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협객’이 되는 것이야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혁명 전략이지만 누구도 ‘법’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연경이 맨 마지막에 말하듯, ‘한 사람의 정의는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이 작품은 결국 ‘타인에 의한 정의’를 무분별하게 쫓은 결과, 형우가 ‘아무런 자아도 벼려내지 못했음’을 효과적으로 조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독자들은 “음, 협이 없었구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처음 글을 읽었을때 필자가 내린 감상도 그것이었고 말이다.
아, 그래서 형우처럼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글에는 그게 빠져있지만, 단편소설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소설의 창작이라는 것 자체가 주어진 재료를 통해 운칠기삼으로 ‘연성’해내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이 글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바통이 다음 사람으로 넘겨져야 하는 것뿐. 창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아, 잔말 하지 말라고 답이나 가져오라고? 허, 이것 참. 그럼 형우가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나이트 리턴즈> 같은 거 말고 뭘 읽어야 했냐면 말이지 ⋯ ⋯ .
뭐긴 뭐야. 히어로 같은 거 되지 마라. 소년이여, 협객이 되어라.
“무협지. 지금 당장 독서. 독서 즉시 기연 무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