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료 이미지를 조합한 사진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가 더 오래 남는 이유는, 극적인 결말보다 그 사이에 흘러가는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 진짜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장면에서도 인물들은 계속 숨 쉬고, 두려워하고, 서로를 살핀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읽는 동안 자꾸 현실의 얼굴들이 겹쳐 보였다. 누구나 거창한 선택을 하며 살지는 않지만, 작은 망설임과 작은 용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버틴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환상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내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로 남는다.
처음 Jimoo 작가의 단편 판타지 「고양이를 좋아할 수 있나요?」를 읽게 된 건 제목 때문이었다. 제목이 묘하게 순하고 다정해서였다. 고양이를 좋아할 수 있냐는 질문은 보통 귀엽거나 따뜻한 이야기로 이어질 것 같지 않나. 그래서 큰 긴장 없이 읽기 시작했다. 처음 몇 페이지는 정말로 그랬다. 어딘가 아늑하고 포근한, 동물들이 나오는 우화 같은 느낌. 햇살 좋은 날 오후에 읽기 딱 좋은 그런 이야기처럼 보였다. 그런데 조금 더 읽다 보니 이게 결국 우리 얘기라는 걸 알게 됐다. 사람들 사이에서 늘 벌어지는 일들, 누군가는 쫓고 누군가는 쫓기는 그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동물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내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좀 낯설었고, 동시에 묘하게 반가웠다.
이 작품은 귀여운 동물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꽤 잔혹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다.
소설 속 세계에서 쥐들은 늘 도망친다. 숨고, 떨고,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고양이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고, 잡히는 순간 이야기는 끝난다. 단순한 설정인데도 읽는 동안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단순히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라기보다, 이미 정해진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품 소개에 나온 문장, 누군가는 잡아먹기 위해 살아가고 누군가는 먹히기 위해 살아가야 하나? 이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쥐들은 특별히 잘못한 게 없다.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이미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어디로 가든 위험이 있고,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된다. 읽으면서 문득 현실이 떠올랐다. 사람도 완전히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선택권이 많고, 누구는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거의 없는 삶을 산다. 그리고 그 차이는 대부분 노력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태어난 곳, 태어난 환경, 태어난 몸. 쥐들이 쥐로 태어난 것처럼. 그 사실이 읽는 내내 마음 한편에 걸렸다.
그래서인지 쥐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먹을 것을 몰래 나눠주고, 괜찮은 척 농담을 하고,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함께 있으려고 하는 모습들. 영웅적인 장면은 거의 없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진짜 같았다. 거창한 용기가 아니라, 그냥 옆에 있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누군가를 살리고 싶어서 움직이는 아주 작은 선택들.
특히 쥐3과 친구들 사이의 관계는 읽을수록 애정이 생겼다. 서로 대단해서가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살아남고 싶고, 무섭고, 그래도 혼자는 싫어서 함께 있는 존재들. 그래서 이후에 닥치는 위험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미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버렸으니까.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잃고 싶지 않은, 그런 인물들이었다.
이 소설에서 고양이는 흥미로운 존재다. 명확한 악역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일 뿐이다. 사냥하고, 가지고 놀고, 본능대로 행동한다. 누군가를 괴롭히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더 무섭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의 삶을 끝낼 수 있다는 점. 그렇게 생각하면 고양이를 미워하기도 애매해진다. 나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존재인 거니까. 그 애매함이 읽는 내내 불편하게 남았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다음 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종종 누군가에게 ‘고양이’ 같은 존재가 아닐까. 특별히 나쁘려는 마음이 없어도 누군가를 위협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언제든 쫓기는 쥐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고양이였다가 쥐였다가 하면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걸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선과 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가장 강하게 남은 장면은 역시 쥐1이 포크를 던지는 순간이었다. 그 장면을 읽을 때 이상하게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완벽한 계획도 아니고, 승산 있는 싸움도 아니다. 그냥 친구를 살리고 싶어서 몸이 먼저 움직인 선택.
그 이후 이어지는 대화가 정말 좋았다.
“넌 정말 대단해.”
“아니야.”
“넌 용감해.”
“나도 겁쟁이야.”
이 장면에서 이 소설이 말하려는 ‘용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용감한 사람은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무섭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이 장면이 영웅 서사처럼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너무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대단한 존재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겁쟁이여도 괜찮고, 떨어도 괜찮다고. 그래도 움직일 수 있으면 그게 용기라고.
그리고 이야기의 후반부, 쥐들이 인간이 되는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 판타지적 설정인데도 전혀 뜬금없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살아남은 뒤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인간이 되는 순간이 완전한 해방처럼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된 뒤에도 편안해지지 않는다.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인식하게 되면서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쥐로 살 때는 단순했다. 도망치면 살고, 잡히면 죽는다. 하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건 훨씬 어렵다. 생각해야 하고, 기억해야 하고, 감정을 견뎌야 한다. 더 많은 걸 가지게 되었는데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는 게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유로워진다는 게 꼭 편해진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이 소설은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부분이 이상하게 현실적이었다. 우리는 더 안전해지고 더 많은 걸 갖게 되면서도, 동시에 더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니까.
그래서 마지막에 다시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고양이를 좋아할 수 있나요?’
이 질문은 단순히 동물 취향을 묻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협했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가, 두려웠던 세계와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읽고 나서 한참 생각했는데, 사실 고양이를 탓하긴 어렵다는 결론에 닿았다.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니까. 그 구조 자체를, 그 안에서 각자가 맡게 된 역할을 이해하게 되면,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완전히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은 세계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정도는.
읽고 나서 바로 감상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재미있었다고 말하기엔 마음이 무거웠고, 슬펐다고 하기엔 따뜻한 장면들이 계속 떠올랐다. 아마 이 작품이 좋았던 이유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나는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는가. 누군가에게 고양이였던 적은 없었을까.
전문적인 리뷰는 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읽고 난 뒤에 더 오래 남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장면들이 계속 떠오르고, 인물들의 대사가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아마 좋은 이야기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다 읽었는데도 끝난 느낌이 들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 지금 누가 이 작품을 어떠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재밌다기보다 오래 남는 이야기라고. 그리고 다 읽고 나면, 제목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게 되는 소설이라고.
나는 이제 그 질문에 조금은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양이를 좋아하긴 어렵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