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가장 먼저 붙드는 것은 복수라는 이름의 닻이다. 그것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분노를 연료 삼아 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다리가 부러지고 새끼들을 잃은 제비 한 마리가 복수를 닻으로 삼아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 복수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통해, 소설은 묻는다. 복수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살아남은 자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하려는 제비]
흥부는 다친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고 선한 사람으로 이름이 나고 그 보답으로 금은보화를 얻는다. 그리고나서도 갈곳 없는 아이들을 거둬 먹여살리고 일을 하도록 해 준다. 놀부는 흥부의 이야기를 듣고 샘이 나서 멀쩡한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는 고쳐준다.
여기까지는 원작 동화와 같다. 그러나 졸지에 그 멀쩡한 다리가 부러진 제비가 놀부에게 복수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제비는 다리가 부러진 바람에 그 사이 둥지에 뱀이 들이닥쳐 새끼들을 모두 잃고 뱀에게 치명상을 입는다.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제비 앞에 구렁이, 사실은 하늘로 승천하길 거부한 이무기가 나타나 인간의 몸을 줄테니 복수하게 해주겠다, 새끼들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말을 받아들인 제비는 이무기의 힘으로 ‘연수’라는 이름의 예쁜 인간 아가씨가 된다. 이제 부리도 발톱도 없다.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을 미소로 홀리는 정도. 하지만 놀부에게는 그걸로도 차고 넘쳤다. 한밤중에 갈 곳 없다며 재워달라고 하는 연수에게 홀랑 넘어간 놀부는 아내 옹심이 미쳤다며 길길이 날뛰어도 연수를 별채에 첩으로 들인다.
연수에게 푹 빠진 놀부는 그 동안 쌓아올린 재산을 연수에게 값비싼 선물을 하느라 고작 일주일만에 탕진해버리고, 옹심은 결국 장부는 자신이 관리했고 자기가 벌어들인 재산이라며 다 싸들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원작에서 제비가 가져다 준 박씨를 심었다가 거기에서 나온 도깨비들이 재산을 싹 다 털어가 버린 내용이 이렇게 제비가 직접 나서서 털어먹은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 원작을 비튼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복수의 허망함, 그리고 이무기라는 거울]
이무기는 연수에게 힘을 빌려주고 새끼들을 되찾게 해준다고 약속한다. 연수는 그 거래를 받아들이며 복수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무기가 원하는 것은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피와 절망 뿐이다. 이무기는 연수에게 인간의 몸을 주면서 겉모습은 인간으로 주지만 죽음의 통증만큼은 고스란히 남겨놓겠다고 한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져 목적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마치 인어공주가 인간이 되더라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은 큰 사건을 겪은 사람의 PTSD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연수는 결국 이무기의 진짜 목적이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무기는 연수의 죽어가는 고통과 새끼를 잃은 슬픔을 이용해 계약을 맺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연수에게 흥부를 직접 찌르라고 명령함으로써 그녀의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파괴하려 한다. 결국 이무기에게 연수는 복수의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악한 본성을 투영하고 영혼을 수확하기 위한 ‘사냥감’이자 ‘그릇’에 불과했다.
이무기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다. 연수의 복수심이 가장 극단화된 형태, 즉 복수심이 삶의 전부를 잠식했을 때 도달하게 되는 모습의 상징이다. 이무기에게 사로잡힌 순간, 연수는 사냥꾼의 비명을 음악처럼 듣고, 인간의 피 냄새에서 설렘을 느낀다. 연수 자신이 이무기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복수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복수의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
이 지점에서 하나의 서사적 비교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워크래프트의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서스 메네실을 향한 복수심으로 언데드로서의 삶을 버텨낸 인물이다. 그러나 마침내 아서스가 쓰러지던 날, 실바나스가 마주한 것은 승리의 충만함이 아니었다. 복수가 완성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공허함이었다. 실바나스가 그 공허함을 참지 못하고 얼음왕관 성채의 얼어붙은 왕좌에서 몸을 던졌던 것처럼, 복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전부를 복수에 걸었던 자가 복수를 잃었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장면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연수의 이야기는 바로 그 공허함에 이르기 직전에서 방향을 튼다. 소설은 복수가 완성된 이후의 허망함을 직접 그리는 대신, 연수로 하여금 그 허망함을 예감하게 한다. 이무기의 심장을 움켜쥐는 순간 연수가 느끼는 것은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소진이다. 복수가 끝나면 무엇이 남는가. 연수는 그 물음 앞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복수가 완성된다 하더라도 새끼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흥부의 손이 연수의 뺨을 내리치는 순간 연수의 눈에서 붉은 빛이 꺼진다. 그것은 폭력이지만 동시에, 복수심이라는 닻에 의해 심연으로 끌어당겨지던 연수를 구원한 것이기도 했다.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감각이 있다. 바로 혼자라는 것. 연수는 제비였을 때부터 어미로서의 고독을 알았고, 인간이 된 뒤에는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고독을 겪는다. 제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저는 제비입니까? 사람입니까? 그도 아니면 구렁이의 사술로 만들어진 요괴입니까?”
이 질문은 연수만의 것이 아니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라면 한 번쯤 맞닥뜨리는 근원적인 고독이다. 인간이면 그냥 인간이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꾸 스스로에게 무언가 명칭을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디든 좋으니 소속이 되길 바라는 마음.
놀부의 외로움도, 연수의 외로움도, 흥부 집의 아이들 각자가 가진 외로움도 모두 이 소설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외로움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들이 있다. 연수가 소연에게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 흥부 부인이 말없이 연수를 안아주는 장면.
근본적인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들이 연대를 할 수는 있다.
[절대적인 악인도, 절대적인 선인도 없다]
놀부는 분명 못된 인간이다. 색을 탐하고, 게으르고, 욕심이 많고, 지저분하며, 제 이익 앞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 연수가 그를 처음 바라보는 시선에는 혐오가 가득하다.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향한 경멸이 놀부라는 한 인간에게 수렴된다.
그러나 소설은 놀부를 그 경멸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가 병석에 누워 혼자 떠드는 장면에서, 친구 한 명 없이 살아온 외로운 사람의 윤곽이 드러난다.
“나는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이 고백은 단순한 넋두리가 아니다. 살갗을 맞댈 이 하나 없던 인간.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인간. 놀부의 탐욕과 심술은 그 외로움과 분리되지 않는다. 연수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읽는다. 놀부가 품에 파고들 때 새끼들이 날개 아래로 숨어드는 감각이 겹친다고 느끼는 순간, 독자도 함께 불편해진다. 놀부는 미워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왜 자꾸 불쌍한 것이 겹쳐 보이는가.
흥부 역시 마냥 완전한 선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선하지만 의도치 않게 자신의 선행이 불러온 비극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또한 모두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악인인 놀부를, 단지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편을 들기도 한다. 연수가 마음속으로 흥부를 향해 “저 자만 없었다면 내 새끼들은 살아있었을텐데”라고 되뇌는 장면은, 선의조차 누군가에게는 비극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냉정한 시선을 담는다. 이 소설에는 완벽하게 옳은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이 이야기를 살아있게 만든다.
[용서란 무엇인가]
흥부 부인이 연수에게 묻는다. 아주버님을 용서하였느냐고. 연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용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연수는 놀부를 살리기 위해 움직인다. 이 역설이 이 소설이 용서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 용서는 가해자를 이해하거나 그의 행위를 면죄하는 것이 아니다. 연수는 끝까지 놀부를 용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진 고통을, 새끼들을 잃은 슬픔을, 연수가 한 일도 놀부가 한 일도 옳지 않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연수가 한 것은 다른 결정이다. 더 이상 그 증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정. 복수심이 자신을 이무기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연수는 그 방향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용서가 아니라 증오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저승의 강가에서 연수가 새끼들에게 건네는 말이 그것을 압축한다.
“미안하다, 아이들아. 나는, 못된 어미는, 너희를 버릴 수밖에 없구나.”
버린다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죽은 자들을 붙들고 죽어가는 대신, 살아있는 자들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이다. 살아야 다음이 있다는 흥부 부인의 말을 연수가 비로소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야 한다]
연수에게 살아남음은 복수심 대신 다른 것을 삶의 중심에 두기로 한 결정이다. 복수가 완성된 자리에 공허함만이 남는다는 것을 연수는 이무기의 심장을 쥐던 순간 이미 알았을 것이다. 실바나스가 아서스의 죽음 뒤에 마주한 그 공허함을, 연수는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예감했다. 그래서 돌아왔다. 새끼들을 향한 그리움, 흥부 부인의 다정함,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놀부의 손바닥이 주는 체온. 그것들이 복수를 밀어낸 자리를 채운다.
제비는 놀부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는다. 복수는 완성되지 않았고, 놀부는 살아있다. 새끼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잃어버린 것들은 여전히 잃어버린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제비는, 연수는 어쨌든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다.
흥부와 놀부라는 익숙한 전래동화의 뼈대를 빌렸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것은 권선징악이 아니다. 절대적인 악인도, 절대적인 선인도 없는 세계에서 상처 입은 존재가 어떻게 다시 삶 쪽으로 걸음을 돌리는가. 그것이 이 소설의 진짜 질문이다. 상처 입은 채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용서하지 못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걸음 곁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손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