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이 쏟아지던 날에 울새가 사망합니다. 수신자인 ‘너’는 그 때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바보 상자를 보고 있던 ‘너’에게 발신자인 ‘나’는 책망을 쏟아냅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울새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자신이 그 순간에 TV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처음 읽고 느끼는 감정은 당혹감입니다. ‘울새가 죽었을 때 너는 TV를 보고 있었다’는 14매의 엽편으로 브릿G에 올라온 글 중에서도 특히 짧은 편에 속합니다. 하지만 빨리 읽어내려갈 수 없고 쉽게 읽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저는 글을 천천히 읽는 편이지만 이 글을 읽을 때 평소 읽는 속도의 두 배가 넘게 들었습니다. 아마 이 글의 두 번째 단락 정도에서 상당수의 독자가 포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 글이 무척 불친절하기 때문입니다. ‘울새가 죽었을 때 너는 TV를 보고 있었다’는 마치 암호와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은 특정 동물(특히 조류)의 이름을 하고 있고 어떠한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지가 단번에 밝혀지지 않습니다. 화자는 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는 것으로 인지하고 이야기를 서술해 나갑니다. 독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더듬으며 선후 관계를 맞추고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특정한 상황이 주어지긴 하지만 딱히 줄거리가 있지는 않습니다. 강력한 뱀파이어 헌터로 모두의 신임을 얻었던 울새가 배신자인 참새에게 일흔 발의 화살을 맞고 사망합니다. 울새의 동료들은 그 사실을 무척 슬퍼합니다. 울새는 그들의 미래였고 모든 헌터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데 이런 이야기들이 의미가 있을까요? 작가님이 다른 주제를 숨겨두셨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쉽게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글에서 뱀파이어 헌터는 남북 전쟁의 북군으로 바꾸거나 일제 강점기 배경의 애국 건달로 바꿔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저에게 이 글은 일종의 문장 실험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울새가 죽었을 때 너는 TV를 보고 있었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입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은 세 번째, 네 번째로 이어지면서 해소가 됩니다. 마치 시 구절처럼 같은 서술을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동물 이름으로 된 특정한 인물 하나가 느닷없이 끼어듭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 그에 대해 설명이 이어집니다. 아, 하고 납득할 바로 즈음 바로 인물이 훅 들어옵니다. 또 그에 대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그러니까 그 규칙 자체가 리듬을 이루는 단편인 것입니다. 독자는 이 글의 문장 사이를 해매며 그 형식에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원래 소설이라는 건 영상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매체니까, 첫 부분에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헤매게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이 글은 그런 요소를 의도적으로 극대화한 단편인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독법 트레이닝을 하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낯설었지만 다 읽고 나니 그 느낌이 꽤 괜찮았어요. 컨셉이 명확하고, 밀도와 완성도가 있는 글이거든요. 그 규칙을 찾는 것이 즐겁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과연 독자들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이 글을 읽어 내려 할까요? 저는 선작21님의 작품 세계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이 글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겐 유입 장벽이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난해한 글을 그렇게 애를 써가며 읽는 게 웹 소설 포맷에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감안하지 않은 실험작일 수 있습니다. 단편이라는 건 어차피 이런저런 발상이나 기법들을 시험하기 위한 형식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작가님의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이것이 널리 읽히기 위한 글, 대중적인 글쓰기를 위한 시도이시라면, 조금 방향을 제고해보는 게 어떤가 하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드려 봅니다.
덧붙임 : 작가님께 쪽지를 받았습니다. 이 글은 ‘누가 울새를 죽였나?’라는 외국 동요에 기초한 단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동요인데 제가 그걸 몰랐습니다.; 미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면 또 감상이 달랐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