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신이고 또 악신惡神일 수밖에 없다.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마케이누 (작가: Pip, 작품정보)
리뷰어: 선작21, 17년 9월, 조회 91

왜냐하면 작가는 세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왕 하나를 만들 때마다 마왕이 학살한 주민들도 같이 만들고, 용사가 물리칠 몬스터 하나하나가 죽이고 짓밟은 마을도 함께 만들며, 주인공의 복수를 위해 주인공의 눈 앞에서 끔찍한 일들을 저지릅니다. 그 모든 것이 작가의 짓입니다. 작가는 신이고, 악신입니다. 끔찍한 쾌락주의자 악신입니다. 그리고 이 작가도 예외는 아닙니다.

로맨스. 로맨스라는 말을 들으면 꼭 나오는 전통적인 캐릭터상이 있죠. 가녀린 공주와 듬직한 용사. 용사는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에게 청혼하고,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삽니다. 다만 문제라면 이게 예전에는 먹혔지만 너무 진부해졌다는 점일까요. 이제 작가들은 이 둘을 행복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왔더니 공주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이젠 시녀와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왔지만 공주는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해있고 자신은 복수를 다짐해야 합니다.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왔지만 공주는 또 다른 위협에… 네. 허탈함에서 오는 강력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어느 서사에게나 매력적인 법이죠. 여기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용사는 모든 위험을 뛰어넘고 마왕을 물리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차마 그 기회는 주어지지조차 않았습니다. 국왕은 용사가 잠든 사이에 공주를 제물로 바치고 평화를 얻었습니다.

용사는 세계를 떠돕니다.

용사는 세계를 떠돕니다.

용사는 죽지 않고 세계를 떠돕니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그녀가 환생해서 돌아올 겁니다.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를 찾기만 한다면 자신은 예전에 꾸었던, 마왕을 물리치고 그녀와 함께 살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용사는 세계를 떠돕니다. 몇십 년. 몇백 년. 몇천 년. 그리고, 그녀가 다시 나타납니다.

그녀는 예전과 똑같은 외모와 똑같이 착한 마음씨를 지녔습니다. 용사는 공주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녹아버릴 것만 같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무구에 붙은 보석을 팔아넘겨서 집을 살 때도 그렇습니다. 행복하고 행복하고 자신과 그녀의 아이는 너무나도 귀엽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그것을 부정합니다.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 합니다. 같은 외모와 같은 마음씨임에도 불구하고 아니라 부정합니다. 점점 그녀가 슬퍼하고 미쳐갑니다. 용사도 그것을 버틸 수 없어서 같이 슬퍼갑니다. 모든 것이 터져나온 어느 날에 용사는 더 이상 망가지는 그녀와 망가지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서 공주에게서 떠나가기로 했습니다.

사막을 어린 아이와 걸으며 그녀의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이 잘못했던 건 무엇일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꼴이 된 걸까. 모닥불 앞에서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들린 어느 사막의 도시에서 용사는 자신의 공주가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편지를 받습니다…

 

뭐, 그런 겁니다. 여자의 시점에서 본편이 나왔듯이 저는 용사의 시점에서 적어 봤습니다. 달리 할 말은 없으니까요. 이 글은 소름끼치는 서사에 기대는 것도, 매력적인 캐릭터성에 기대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글이 기대는 건 오직 단 하나입니다.

감정.

그리고 미문.

감정이 미문에 담겨져 나올 때 그것은 어떤 파괴력을 지닐 수 있나, 하는 그런 글을 저는 매우 좋아하며 따라서 저는 이 글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를테면 네 번째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숨가쁘게 달려가는 감정과 쏟아붓듯이 진행되는 과거 이야기 같은 건 작가의 필력을 잘 보여주는 장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깔끔하게 엮어서 내민다는 선택지는 끔찍하게 힘든 작업이거든요. 하지만 Pip님은 그걸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냅니다. 정말로 이 이상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캐릭터는 정통파 캐릭터에, 서사는 단순한 클리셰 비틀기. 재료가 단순하고 정석적일수록 요리사의 기술이 빛나듯이, 캐릭터와 서사가 일반적이고 고전적일수록 작가의 기술이 빛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대개로 이런 기술들은 해설할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다만 Pip님은 감정을 아름답게 빚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입니다. 그뿐입니다.

그래서, 저런 용사와, 이런 여자의 만남은 요런 이야기로 끝을 맺었습니다. 슬픈 이야기고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어이 없을 정도로 막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말이 슬프도록 아름다우니 다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저도 그 쾌락주의자 악신 가운데 하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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