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 비평

대상작품: 숙희 (작가: 용준치킨사우루스,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9월, 조회 138

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문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왜냐면 작품을 쓰는 데 문법을 모르고서는 시작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그 전에 한 가지 노파심에 미리 말을 꺼내자면, 내가 이 작품의 문장이 문법적으로 맞네 그르네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문법‘은 그런 게 아니다. 문법에도 여러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는데, 나는 그 한 두 가지를 가져와서 이 작품의 일부를 풀어보고자 한다.

일본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대체로 ‘한국어와 어순이 비슷하여 배우기 쉽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문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아 초보티 떼기에는 가장 쉬운 언어다. 그렇지만 난이도를 높여나가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어를 그대로 왕창 번역해버렸다간 일본사람들이 듣기에 매우 요상하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혹은 한국어에서는 문법적으로 금지되어있지만, 일본어에서는 엄청 자주 사용되는 문법이라던가 하는 게 있을 것이다. 가령 이중부정이라던가). 그러니 문법이 유사하다고 해서 문장의 변환이 꼭 쉽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언어에서 사용하는 문법을 제대로 지켜야 좋은 문장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에도 어느정도 통용되는 논리라고 생각한다. 작품 혹은 장르에는 그 나름대로의 문법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문법을 잘 따르는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브릿ㅉ 작가 중 철관님을 꼽겠다. 장르가 가진 문법성을 잘 따라온다는 것은 곧 작품의 장르적 완성도에 하자를 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해당 장르에 익숙한 사람이 보았다가는 너무 ‘일반적이다’라는 평가를 듣기 딱 좋기도 하다. 요컨데 문법을 따르면서도 튀는 거 하나를 제대로 넣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과연 그런 ‘튀는 것’을 잘 넣어두었을까?

 

 

1. 호러의 문법

그 전에 한국에서는 명확하게 구분하려 하지 않는 듯한 두 장르에 대해서 간단히 정의를 내리고 가야 할 것 같다. 그 두 장르란 ‘호러’와 ‘테러’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두 장르를 구분하는 단 하나의 척도는 ‘심리적인 개념차이’라고 한다.

호러: 무언가 공포스러운 것을 보거나, 듣거나, 경험했을 때 발생하는 혐오감으로서, 무언가 끔찍한 것을 인지했거나 매우 불쾌한 무언가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테러: 앞으로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을 예상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두려움의 감정이다.

– 위키백과 한국어 판에서 발췌

그렇지만 나는 조금 다른 정의를 차용하고자 한다. 위의 정의보다는 조금 더 간결한 정의를 말이다. 내 개인적인 정의에 따르면 테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공포’이고, 호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공포’이다. 쉽게 말해서 연쇄살인마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면 테러고, 그놈이 귀신들렸으면 호러다. 그리고 이 작품은 테러를 가장한 호러다.

작품의 시작은 일반적인 호러/테러 영화와 비슷하다. 주인공이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 공간은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정도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아, 처음에는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곧 적대적으로 돌변한다. 이들이 적대적으로 돌아선 까닭은 주인공이 ‘숙희’에 얽힌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희 이야기는 어느 할아버님의 양심 고백으로 시작된다. 숙희는 서울에서 내려온 예쁜 여자애다. 그리고 시점의 주인공(그러니까 어렸을 적의 할아버님)은 옆집으로 이사온 숙희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학교의 드센 계집애들은 숙희를 가만 두지 않는다. 속된 말로 존내 팬다. 그 시대의 왕따라고나 할까, 그런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할아버님은 발을 동동 구르지만 결국 앞에 나서지는 못한다.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에 숙희는 실종된다. 숙희의 어머님은 딸아이를 애타게 찾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리고 방학이 지났을 때, 숙희는 학교의 체육 창고에서 죽은 체로 발견된다. 이런 식의 과거 회상은 호러라기보다는 테러에 가까운 문법으로 이어진다. 적어도 숙희와 숙희 어머님에게는 테러블한 시간이었을 테니까.

헌데 이 작품은 어느 지점을 계기로 장르적 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회상이 끝나고 할아버님께 어느 산의 이름을 들었을 때가 바로 전환지점이다. 그 지점을 중심으로 이 작품의 장르는 테러에서 호러로 전환된다. 죽은 줄 알았던 숙희와 어머님이 꿈틀거리고, 으아아악 기절하고, 눈떠보니 병원이고, 횡설수설하고, 그리고 작품은 석연찮은 구석을 남겨놓은 채 끝을 맺는다.

다 읽고나서 나는 조금 고민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명확했다. 이 작품은 호러였다. 다만, 보통의 호러와는 다른 구석이 있다. 주온으로 예를 들어본다면, 이 작품은 카야코와 토시오가 사람들에게 해꼬지하는 부분이 아닌 ‘그들이 왜 죽었고 어떻게 죽었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가’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호러인데도 테러같은 모습이 더 많이 보이고, 때문에 생각보다 무섭다고 느껴지는 않았다.

무섭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재미없다고 느꼈던 것은 아니다. 테러와 호러의 문법을 착실하게 밟아서, 종말에는 ‘여운을 남기는’ 식으로 끝을 맺었다.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로 남겨져 있지만 어느정도는 해결되었다고 느껴진다. 근데 왜 이렇게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걸까?

 

 

2. 그들은 왜 그러하였는가?

가장 이상한 점은 마을 주민들이 타지인인 숙희네를 따돌린다는 점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화자의 나이, 그리고 아버지의 나이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60년대 언저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이 시대는 전쟁을 치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다들 먹고 살기 지랄맞을 때였다. 모두가 고향을 잃었다가, 모두가 제 고향을 찾아 돌아오던 시기다. 그리고 누군가는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 이전에 숙희네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단지 흘러가듯 ‘서울에서 살다가 망해서 내려옴’ 정도가 전부다. 심지어 그것 마저도 공인된 설정이 아니다. 그저 소문에 불과하다. 시골로 내려왔을 때, 숙희나 숙희 어머님이 시골사람들이라고 무시한다거나 그런 면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시골로 내려왔을 뿐이지.

이 시대의 시점 주인공인 할아버님은 옆집의 숙희에게 관심이 지대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옆집애랑 놀지 말라고 타박한다. 왜 놀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이 무조건 놀지 말라고만 한다. 여기서부터 독자는 이해할 수 없는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다. 언젠가 이 지점이 설명되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 의혹은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애들에게 처 맞는데 선생은 모른척 혹은 알아도 그냥 넘어가버린다. 숙희가 사라져버렸는데도 마을 어른들은 아무도 숙희 어머님을 돕지 않는다. 숙희가 죽은 채 발견되었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마을 밖으로 쫓아내버린다.

이런 뿌리깊은 증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비춰진다)는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조금 의아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혹은 단지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이유 만으로 사람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건가? 왕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가 어떤지는 몰라도 그 나이 또래의 애들이 흘러넘치는 성장기의 빠워를 감당하지 못해서 누구 패는 일은 다반사니까. 그렇지만 다 자라다 못해 늙어가기 시작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비논리적인 증오라 할 지라도 이유는 필요하다.

끝까지 읽고나서 나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영험한 무당이 10년 쯤 전에 신내림을 받고서 ‘외지인이 이 마을을 좋(되)게 만들 것잉게 절대 놔둬서는 안 디야!’ 라고 했다는 설정을 까는 것이다. 그 위에 ‘그 무당이 했던 말은 다 들어맞았던기라. 정숙이네 아들램도 그 무당이 하지말란짓 했따가 뒤지삔거 아이가.’ 식으로 무당의 신탁(?)에 힘을 실어주고, 그 신탁의 힘으로 숙희네를 괴롭히는 것이다. 나중에 아이들 몇 명이 사라졌을 때도 ‘그년을 마을 밖으로 영영 보내쓰야 하는디 산자락꺼정만 쪼까내서 우리 마을을 좋(되)게 만드는 거 아니여?’ 하면서 추가 레이드의 명분도 세워줄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뭔가 이들의 행동에 까닭이 있었으면 했다. 이유없는 폭력을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3. Hey, Mr. 공권력?

나는 경찰이 없는 줄 알았다. 경찰이 있으면 숙희 어머님이 공권력을 발휘하여 딸 찾는데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고 있는 걸 보니 공권력이 없거나 최소한 공권력이 닿지 않을 정도로 외진 시골인 거라고 가늠했다. 60년대 초반이면 그런 곳이 있을 법도 하니까. 그런데 바로 다음에 경찰이 나와버린다. 경찰이 죽은 숙희의 시체를 앞에 두고 담배나 빨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묘사가 나온다.

숙희 어머니가 경찰과 마을 사람들로 둘러싸인 채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이 한 문장은 내게 모순적인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 한 문장에서 지적하는 두 가지 사실이 서로 모순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두 가지 사실이 지금까지의 독서로 밝혀진 다른 사실들과 모순된다는 이야기다. 첫 모순은 지금껏 이야기했던 공권력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경찰이 있었으면 도움을 청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경찰은 동네 주민들과 같은 편일 것이다. 숙희 어머니가 (경찰+마을 사람) 에게 둘러싸인 채였으니까. 나는 이 묘사가 공권력이 동네 주민과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은유하는 거라고 봤다.

하지만 숙희 어머니가 공권력에 도움을 청하고, 그것을 어영부영 하는척 마는척 하는 공권력의 모습을 묘사하는 편이 더 ‘선명’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면 경찰과 마을 사람들로 둘러싸인 채 울부짖는 것이 실제로 그렇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인지(사실의 묘사) 아니면 이 문장을 통해 공권력이 마을 사람들의 편임을 넌지시 제시하는 것인지(관계의 은유)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모순은 (공권력 항목에서 다루는 것이 조금 요상하기는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존재에서 생겨난다. 지금껏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관심도 주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최대한 시야에서 먼 곳에 혹은 아예 안 보이는 곳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숙희가 죽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득달같이 달려와서 시체를 둘러싸고 있다. 일단 배경이 학교라는 점에서 더 이상하게 보인다.

선생이 창고를 까봤을 때 숙희가 죽어있었다. 아마도 곧장 경찰에게 전화했을 것이다. 경찰은 일단 사람이 죽었다니까 (숙희인 걸 알았다면) 밍기적거리면서도 와보긴 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학교 부지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을 사람들은 뭘 알고 학교로 찾아온 것일까. 선생 혹은 경찰이 ‘숙희 뒤져쓰요’라면서 알리고 다녔던 것일까. 경찰은 경찰이니까 신원확인을 위해 숙희 어머니를 학교로 데려와야 했을 것이다. 이 때 마을 주민들이 우루루 몰려온 것일까.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으니.

이런 식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작품 내에 너무 많이 산재해있다.

 

 

4. 왜 있는 지 모를 장면들

6번 씬이 특히 그러했다.

할아버지는 담뱃불을 끄고 녹슨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적는 것을 멈추고, 펜을 집어넣었다. 할아버지는 한없이 침묵을 지키셨다.

“할아버지 힘들면 나중에 얘기해도…….”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야. 누군가에게 숙희를 알려줘야 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잠을 제대로 못 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거든.”

할아버지는 힘겹게 말을 이었고, 나는 펜을 꺼내 들었다.

이 장면이 정말 이 작품에 필수적이었을까. 이 짧은 씬은 작품 내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자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독자는 이미 이 할아버지가 그런 까닭에 이야기하고 있음을 안다. 가장 첫번째 씬에서 할아버지의 동기가 전부 설명된다. 마을 사람들은 숙희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리지만, 할아버지 만큼은 다르다. 숙희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노인정 전체와 척을 지면서까지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그래서 이 장면은 의미적으로 첫번째 씬의 후반부와 중복되어있다.

조금 다른 ‘중복’을 이야기해볼까. 도대체 왜 주인공은 펜을 넣었다가 다시 꺼내는 것일까. 이 행동의 중복이 나는 껄끄러웠다. 할아버지가 언제 그만하자고 할지 모르고, 언제 침묵이 깨어질 지 모르는데 이 친구는 펜부터 집어넣는다. 이 장면이 껄끄러웠던 까닭은 고작 몇 줄 이후에 다시 펜을 꺼내들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단시간만에 펜을 다시 꺼내들 거였으면 뭐하러 집어넣었대? 애당초 작가는 왜 펜을 넣었다 뺀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쟁이로서 추측해보자면, 행간의 비어있는 부분을 동작으로서 채워넣고자 하셨던 게 아닐까. 그렇지만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서로 다른 동작을 넣었어야 했다. 적는 것을 멈추고 나도 할아버지를 처다보았다. 할아버지는 힘겹게 말을 이었고, 나는 다시 펜을 놀렸다. 이런 식으로 했어야 더 말끔하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한다.

 

 

5. 근데 할아버님은 왜 그러셨대?

이 부분도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부분이란 ‘할아버님가 마음에 쏙 든 숙희를 나몰라라 하는 것’이다. 숙희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긴장해버리는 까닭에 엄청 일찍 일어나서 숙희와 마주치는 일 없이 등교하고자 할 정도로 할아버님은 숙희를 좋아했다. 그런데 숙희가 괴롭힘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다. 숙희의 젖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는 아예 시선을 피해버린다. 이것은 일반적인 ‘로맨틱’의 문법이 아니다(아 물론 로맨스로 이야기를 전개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님은 실패해보기도 전에 숙희를 버린다. 이 부분이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왈가닥패와 붙어봐서 존내 얻어터지고, 또 얻어터지고, 그 다음에야 ‘이제 맞기 싫엉, 숙희 미얀’ 하면서 포기하는 편이 독자로서는 납득가능한 전개였을 것이다. 앞에서는 그렇게 좋아 죽어서 정말 죽어버릴 정도로 심장 멎어버릴 것처럼 굴었으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하니? 너님 정말 싸나이 맞음? 하고 생각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숙희 어머니가 왔을 때도 좀 뭔가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여튼 그런 식의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 할아버님 캐릭터의 운용이 쉬엄쉬엄 끝나버린 거 같아서.

 

 

6. 호흡이 너무 짧은 거 아닌가요

호흡이라는 표현이 너무 모호하다면 씬의 길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이 작품은 장면 단위로 끊어져있다. 내가 ‘장면’의 길이라고 하지 않고 ‘씬’의 길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각본 혹은 극본의 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씬들은 꽤 짧다. 그래서 씬과 씬 사이의 행간에서 독자는 많은 것을 상상의 영역으로, 불명확한 시간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6번씬 다음에 바로 7번 씬이 온다. 6번과 7번 사이에는 다행히 행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액자식 구성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지점이기 때문에 6번과 7번씬의 사이에서는 과거로의 회귀만 존재한다. 문제는 7번씬과 8번씬의 사이이다. 8번은 짧고 7번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 씬의 사이에 방학이 존재한다. 방학 내내가 존재한다. 이 시절의 방학이 얼마나 길었을까는 상상이 안 되지만, 적어도 한달 반쯤은 되지 않았을까. 그 넓은 시간의 공백이 묘사되지 않고 다만 비워둔 채 존재한다.

이렇게 묘사하지 않고 비워둔 채로 넘어가는 것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너무 잦기까지 하다. 이것이 이토록 잦은 까닭은 당연히 씬의 길이가 짧기 때문이다. 뭔가가 진행되려고 하면 끊어지고, 끊어지고, 끊어진다. 이것이 누군가의 회상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끊어진다는 것은 이상하다.

아 물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기억이니 군데군데 비어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야기 자체는 줄줄줄 하셨을 것이다. 가령 8번씬과 9번씬은 굳이 나눠놓을 필요가 없어보인다.

 

~~작은 소리조차 거대한 공포로 다가와 심장이 요동쳤을 것이다. 숙희는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숙희의 마지막 눈빛이 잊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마을에서는 숙희의 ‘숙’자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완전히 잊은 듯이, 애당초 숙희가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장례식도 해주지 않았다. 숙희 어머니는 점점 이성을 잃어서 혼자 웃거나 바닥을 긁어댔다. 마을 사람들은 위로하기는커녕 숙희 어머니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욕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숙희 어머니는 미소를 띄우며 숙희가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숙희 어머니를 마을 밖으로 쫓아냈다.

숙희 어머니는 동네 뒷산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제대로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후, 다섯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실종되었다. 그중에는 미숙이도 있었다. 우리 마을은 말 그대로~~

 

8번과 9번씬을 이어붙여보았다(만약 문장을 멋대로 주무른 점이 마뜩잖으시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이어붙여놓아도 이야기는 걸림없이 흘러간다. 나는 이런 식으로 굳이 나눠놓은 곳을 전부 이어놓았으면, 혹은 최소한으로만 나눠놓았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씬을 너무 많이 나눠놓아서 이야기를 읽는 데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7. 근데 주인공은 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러면 너무 길어지므로(지금도 길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첫 문단을 인용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숙희 이야기는 시골 마을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만든 내용이다.

협회에 등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 기회를 얻었다. 처음 출판할 소설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하여 만들고 싶었다. 한참을 머리 싸매며 고민하던 중, 무작정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기대를 안고 내려간 마을은 편의점 조차 없는 따분한 마을이었다. 그래도 벽에 기댄 채 명상을 하면 아이디어가 물결처럼 퍼졌다. 큰 호흡을 했다. 냉랭한 공기가 폐 속을 맴돌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문득, 양로원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 오래 사신 분이라면 많은 것을 알고 있으시지 않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양로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벽돌로 만들어진 양로원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유리문을 거울삼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1) 우선 숙희 이야기는 마을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기보다는, 마을에서 들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귀신에게 홀린 채로 진행된 이야기를 재구성 한 것이지만, 그걸 초반에 밝혀버리면 반전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사실 관계의 잘못됨은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관계가 잘못된 것은 사실이니까 아예 저 문장을 빼버리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2) 협회에 등단 후? 기본적으로 등단이란 신문사 혹은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문예 대회(?)에서 수상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보통은 이런 수상작을 따로 모아 책을 내기 때문에, 출판 기회는 등단과 동시에 진행된다. 그 외의 방법으로 등단하고자 한다면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하여 계약을 진행하는 방법 뿐이다(정확히는 이 이외의 방법을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말이다). 시로 등단하였다가 이제는 소설을 출판하는 거라면 뭐 틀린 말은 없지만, 그렇다면 그렇다고 적어줘야 하지 않았을까.

3) 왜 고민끝에 내린 결론이 ‘아버지의 고향으로 간다!’ 인 건지 모르겠다. 주인공이 왜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독자에게도 좀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싶다. 다 읽고난 소감으로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야 이야기가 시작될 테니 어떤 식으로든 주인공을 아버지 고향으로 보내기 위해 그냥 막 던진거 같다는 인상이다. 심지어 주인공이 무슨 기대를 했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4) 도대체 주인공은 어느 벽에 기대고 있는 걸까. 임시로 숙소 같은 걸 구했는지, 아니면 남의 집 벽에다가 기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배경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어서 독자인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5) 왜 명상하다말고 양로원 생각을 했을까. 그것보다는 마을을 둘러보다가 양로원을 발견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보다 양로원 보다는 노인정이라는 표현이 더 옳지 않았을까. 어쩌면 마을회관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가장 적합했을 지 모른다. 시골의 마을에는 다 노인들이라서 양로원이나 노인정이 따로 없고 다들 마을회관에 모여서 놀곤 하시니까.

이렇게 사실을 틀리거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묘사들이 너무 많다. 또한 어느 묘사의 앞뒤로 필요한 묘사가 다 잘려나가있다. 때문에 독자는 주인공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까닭을 은연중에 짐작해야만 한다. 불확실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 많이도 불확실하다. 나는 이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

 

8.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이 제일 이상하다. 이렇게 길게 구구절절 떠들어댈 거였으면 작품이라도 재미가 없던가. 이 작품은 재미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재미있게 만드는 지점은 바로 결말이다. 얼굴이 굳은 채 시선을 피하는 아버지. 그 장면이 너무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서, 덕분에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도 끌어올려놓는다. 어쩐지 끝까지 읽은 보상 같기도 하다.

언젠가 작법서에서 그런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첫 문장은 독자를 끌어들이고, 마지막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해당 작품을 기억하게 한다고.’ 이 작품은 첫문장과 맺는 문장 모두 훌륭하다. 호러가 갖춰야 할 대부분의 것을 갖춘 채로 은은하고 괴괴하게 끝을 맺는다. 가장 도덕적으로 완벽할 것이라 믿어온 ‘부모’가 그 끔찍한 일화에 가담한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독자에게 심어준 채로 말이다. 하여간 결말의 밸런스가 너무 좋다. 그래서 재미도 있고 여운도 있고 기억에도 남을 거 같다.

 

9. 별 거 아니지만 오타인 거 같은 걸 모아봤습니다.

52문단 : “어디 보자. 그래 저기 춘동이 옆자리가 비웠으니깐, 거기 앉아라”

↳ 춘동이 옆자리가 ‘비었으니까’ 가 맞을 것 같다. 혹은 춘동이 옆자리’를’ 비웠으니까라고 할 수도 있겠다. 후자의 경우 ‘어디 보자’는 없어야겠지만.

 

85문단 : 미숙은 숙희를 뒤로 자빠트렸다. 다른 여자애들마저 숙희를 둘러 쌓아 기분나쁜 웃음을 띠었다.

↳ 다른 여자애들마저 숙희를 둘러싸고 기분나쁜 웃음을 띠었다. 정도가 될 것이다.

 

96문단 : 여자아이들의 순순한 미소에서 우러나오는 거짓말이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덮쳤다. 선생님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 여자아이들의 순수한 미소에서 우러나오는 거짓말 나는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끼쳤다. 순순한 미소라는 게 뭔지 모르겠고, 조사의 사용도 잘못된 것 같다.

 

이 이외에도 오타가 여럿 있었는데 대체로 조사의 사용이 잘못된 경우였다. 기본적인 맞춤법의 사용은 검사기 돌려서 해결할 수 있지만, 문맥과 맞지 않는 조사의 사용은 검사기가 걸러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는 퇴고를 치밀하게 하시는 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할 말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아주 꽝인 작품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 점이 신기해서 리뷰를 쓰다보니 문장이 줄줄 나와버렸다. 이 리뷰에 용준치킨사우루스 님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기를 바라면 그것은 리뷰어로서의 욕심일까. 그렇지만 이제와서 문장을 줄이는 것도 리뷰어로서의 BornWriter 답지 않으니, 그냥 놔두고자 한다.

 

 

+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 급하게 몇 자 더 적는다. 이 작품은 아주 좋은 방식으로 독자로 하여금 결말을 곱씹게 만든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작품이 1인칭 시점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덕분에 주인공의 아버지가 실제로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아끼셨던 것인지, 아니면 진짜 숙희 사건에 연관되지 않아서 ‘아니’ 라고 대답한 것인지 독자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독자는 아부지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나쁜 사람이라 생각해버리고 넘어가버릴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3인칭으로 썼다면 어땠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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