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평: “소설이여 있어라” 하시니 소설이 생겼다.
난해했다. 이 소설은 너무 난해했다.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온다. 문체가 바뀌고, 시야가 휙휙 바뀐다. 마치, 바람을 잡기 위해 허공에 손을 줬다 폈다 하는 감각이다.
나는 이런 기법에 대해 알고 있다. 자동기술법. 생각 그대로를 가감없이 글로 써내리는 글이다. 보통 미술이나 시에서 사용되는 기법이지만 소설에서도 사용된다. 대학에서 시를 공부하던 나한테는 간혹 만나던 방법이다. 자동기술법을 매우 획기적이며, 천재의 방법론으로 믿었다. 천재병에 걸렸던 시절의 나는 교수님께 이런 방법론에 대해서 여쭤보았다. 교수님의 판결은 부정적이었다. 함부로 따라해선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방법이 첨단적일지 몰라도(이후에, 낡은 방법이라고 고치셨다.) 함부로 따라해서는 괴기한 망상이 될 뿐이라 말했다. 존경하는 교수님의 말씀이니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그 후 이상의 시를 공부하면서 나는 이상에게 감탄했다. 어떻게 20세기에 현대에까지 통용되는 세련된 시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이상을 모방했다. 이상을 따라려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자동기술법으로 쓰여진 작품은 항상 따라다니는 평가가 있다. 이해할 수 없다. 실험적이다.
이런시 – 이상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한창 건방을 떨던 조막만한 나는 교수님께 파격에 대해 물었다. 교수님은 파격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정확히 파격을 물어보는 나에게 부정적이었다. 파격을 하기 위해선 먼저 격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격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파격은 있을 수 없다. 세상엔 새로운 것은 없는데, 파격이라 불리는 작품들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파격을 쫒는 것은 너무 이르니, 일단 격에 대한 이해를 높히라고 하셨다. 나는 파격적을 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것이 문학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교수님은 진정한 파격은 없다고 하셨다. 당시의 파격적이라고 불리던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냐고 다시 반문하셨다. 나는 이상을 꺼내들었다. 진짜 이상이 대단하기에 아직까지 거론되는 것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위의 교수님의 반론은 내가 재능과 천재성에 대한 스스로의 고찰이 끝나기 전까지 계속 물고 늘어졌다. 나는 무언가 새롭고, 다른 것을 써내려야 한다고, 나는 천재니까. 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난 천재가 아니었다. 이상이 아니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니었고, 모짜르트가 아니었다. 이것은 혁명적으로 다가왔다. 없는 재능에 의지하던 내가 아니라, 노력과 땀으로 글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천재란 말에 숨겨진 의미가 있었단걸 알았다. 천재는 깍두기다. 어린 시절, 앤 깍두기야. 라며 끼어주는 것이 천재다. 즉, 어떤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냈을때, 그것에 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해서 성공했을 것이다. 그것이 조금의 운이 따라줘서 젊은 나이에, 이루어졌다면 사람들을 그 사람을 천재라는 카테로기로 집어 넣는다. 천재적이야. 재능이 있어서. 이제 재능에 대해서 그리 신뢰하지 않는 나는 그 말의 본위는 저건 외계인이야. 우리랑 달라라는 외면에 있다는 걸 알았다. 난 아직도 천재를 보지 못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봤다. (노력이나 흥미를 재능이란 카테로기에 넣어두기도 하지만, 나는 재능과 노력 흥미는 구분된다 생각한다.)
천재병이 사라지고, 자동기술법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다. 할 수는 있지만 그걸 남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단지 한낱 인간임을 알고 있다. 내 글을 읽는 독자 역시 한 명의 인간 임을 알고 있다. 누군가와 즐겁게 대화하기 위해선, 내 이야기만 주구장창 꺼내선 안된다. 좋은 대화란 경청이 항상 필요하며, 주제와 논리성이 필요하다. 자동기술법에 대한 기대는 부정적인 실망으로 바뀌었다.
자동기술법을 말하자면, 누군가를 앉혀두고, 두서없이 생각나는 말을 전부 뱉어버리는 거다. 그런 걸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문학이 상호소통이란 걸 알고 난 이후로는 그런 방법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작품을 만나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잘썼냐 못썼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감정이 옳냐 틀리냐 하는 논의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표현했다면 (그것은 오직 작가 본인만이 아는 것이겠지만) 잘 쓴 작품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못 쓴 글이 될 것이다. 실험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작품 자체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나는 답할 수 없다. 이런 글은 잘쓰고 나쁘고가 의미가 없다.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