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복지 담당 공무원인 40대 중반 여성 화자가 아동센터를 방문한 어느 오후, 금발머리 원장에게 30년 전 실종된 금발머리 영태라는 친구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는다.
화자는 11살 때 숨바꼭질 노래의 가사를 “치맛자락”에서 “머리카락”으로 바꿔 불렀고, 그 노래는 아이들 사이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금발머리 소년 영태가 숨바꼭질 도중 실종되었다.
그러나 더 기이한 것은 그 이후다. ‘머리카락’으로 바뀐 노래는 너무나 빠르게 퍼져나갔고, 심지어 이상한 소문이 붙어 있다. ‘머리카락’으로 바꿔 부르면 숨바꼭질 하다가 사라진 남자아이가 나와서 같이 숨바꼭질을 해 준다’는. 거기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태의 존재는 신문 기사에서, 친구들의 기억에서,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다. 오직 화자만이 그를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 화자는 고등학교 수련회에서 숨바꼭질을 한 후 인원이 한 명 늘어나는 경험을 하고, 자신의 세 자녀 중 누가 ‘진짜’ 자녀인지 의심하는 공포에 시달린다. 심지어 숨바꼭질 노래는 사람들에게 ‘그 노래는 처음부터 머리카락이었잖아’로 기억된다.
그러다 화자는 딸이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의 투명 필름 구조를 통해 평행우주 가설을 떠올리고, 마침내 눈앞의 금발머리 원장이 어딘가의 세계에서 무사히 자라난 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2. TMI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라는 노래를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하는 화자에게서, 나는 오래전에 잡지인지 책인지에서 본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 별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TMI다.)
글을 쓴 사람은 전통놀이를 복원하거나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아니면 소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작가님이었거나), 그러다 이화장 앞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한다. 그 사람이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라는 말은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다. 깜짝 놀라 글쓴이가 정말이냐고 물어보니, 친구들과 이화장 앞에서 그 놀이를 자주 했는데, ‘하나, 둘, 셋, 넷…’이라고 하면 글자수가 맞지 않고, ‘일, 이, 삼, 사…’로 하면 재미가 없고… 그러다 그냥 문득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라는 문장은 외우기도 쉽고 딱 10글자라 좋았다는 이야기였다. 뭐 그 뒤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냥 유쾌하게 끝나는 대화였다.
암튼 혹시 작가님이 그 이야기를 본 적이 있으셨던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3. 영태와 저녁의 행방불명
이 소설의 초반부를 보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올랐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행방불명’은 일본어로 ‘神隠し’ 카미카쿠시, 즉 ‘신이 숨겼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르게 정말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찾을 수 없게 사라진 것을 그렇게 지칭한다.
영태의 실종은 바로 이 카미카쿠시에 가깝다. 그는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 마치 신이, 혹은 세계가, 의도적으로 숨긴 것처럼.
그리고 화자는 그것이 자신이 만든 노래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적으로 폭발하지는 않는다. 조용히 내면에 자리잡는다. 고등학교가 되고 어른이 되어도 죄책감과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일상의 바닥에 깔린 채 지속된다. 심지어는 수련회에서 인원이 늘어나는 경험, 자녀에 대한 의심 등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며 더더욱 불안을 부추기지만, 화자는 이를 억압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못 본 걸로 하고 넘기는” 선택.
4. 나만 기억한다는 공포
왜 영태는 ‘사라졌’는데, 다른 사람들은 ‘늘어났’을까.
화자의 어린시절 기억에(또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생각에) 영태는 ‘실종’이지 ‘사망’은 아니다. 그런데 영태가 죽은 게 맞다면? 정말로 누군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놀이에 끼어들어서 그런 소문이 퍼진거라면?
그리고 놀이가 끝나자마자 늘어나 있는 인원.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내가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고?’ 라는 위화감까지.
혼자만 알고 있는 그 이상함. 혼자만 변화를 기억하는 절대적인 고독이 이 소설이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공포다.
보통은 이런 경우 ‘아, 나 혼자 착각했나보다’ 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아주 긴 기간을 소유하고, 너무나 구체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 그 기억을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5. 다른 해석을 통한 죄책감의 해소
그러다 화자는 딸이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의 투명 필름 구조를 통해 평행우주 가설을 떠올리고, 마침내 눈앞의 금발머리 원장이 어딘가의 세계에서 무사히 자라난 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숨바꼭질 노래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꼭꼭 숨어라’는 사실 진짜로 숨으라는 내용이 아니에요. 술래가 찾을 수 있게 잘 보이는 곳에 있으라는 의미죠. 그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함께할 수 있도록, 친구의 안녕을 비는 노래라는 걸 저는 30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어요.
물론 이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화자의 개인적 깨달음이다. 소설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화자는 다만 자신의 기억을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오래된 하강 상태에서 아주 미세하게 방향이 바뀌는 정도”에서 소설은 끝난다.
모두가 잊어버린 존재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했을 때, 치히로는 그들을 알아보지만 부모는 치히로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아가 유바바는 치히로에게서 이름을 빼앗아 ‘센’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름을 잃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존재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영태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이름은 기록에서 사라졌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오직 화자만이 그를 기억한다.
영태는 돌아왔는가? 모른다. 진실은 밝혀졌는가? 그것도 아니다. 화자는 구원받았는가? 그렇지도 않다. 화자는 자신의 기억을 다르게 읽을 수 있게 될 뿐이다.
소설은 그 질문들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의 태도를 제시했다고 본다.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치히로가 하쿠의 이름을 기억해냄으로써 그를 구원한 것처럼, 화자는 영태를 기억함으로써 그를 ‘완전한 카미카쿠시’로부터 지켜낸다.
6. 제목의 의미
1) 저녁이 없는
“저녁”은 하루가 마무리되고, 긴장이 풀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부모님들은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아이들은 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일과가 종료되고 휴식이 시작된다.
그러나 ‘저녁이 없는 세계’는 끝나지 않는 낮, 끝나지 않는 노출과 긴장의 상태를 의미한다. 영태는 숨바꼭질을 끝내지 못했다. 화자 역시 30년간 그 ‘저녁이 오기 직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0월의 저녁”, “해가 주황색으로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 “오후 다섯 시 반”이다. 영태가 사라진 바로 그 시간. 화자는 30년간 영태가 “빛이 들어올 기미가 없이, 해가 끝없이 지고 있는 어둑어둑한 저녁”에 갇혀 있다고 상상했다.
이것은 카미카쿠시 당한 존재들의 시간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유바바의 세계는 시간의 구분도,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구분도 모호하다. 시간은 흐르지만 끝나지 않는다. 치히로의 부모는 돼지가 되어 끝없이 먹기만 한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영태가 간 곳 역시 그런 세계였을까? 아니면 화자가 상상한 것처럼, 해가 끝없이 지는 황혼의 세계였을까?
2) 너의 세계
제목은 “나의 세계”도, “그의 세계”도 아니라 “너의 세계”다.
이것은 영태에게, 혹은 지금 눈앞의 원장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2인칭의 사용은 거리를 좁힌다. 이것은 관찰이나 분석이 아니라 대화이며 호명이다.
내 단편에서도 그래서 ‘나’와 ‘너’라는 인물이 대화를 한다.
(밑도끝도 없는 자기어필 ㅈㅅ)
동시에 “너의 세계”는 화자 자신의 세계이기도 하다. 영태를 기억하는 한, 화자 역시 저녁 없는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필름 위에 있지만, 같은 시간에 갇혀 있었다.
3) -는
문장은 끝나지 않는다. “~는” 뒤에 무언가가 와야 한다.
화자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소설 역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미완의 문장은 독자에게 남겨진 공간이며, 화자가 평생 품어온 질문 그 자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마지막 장면에서 치히로는 터널을 통과해 원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일들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그 경험이 진짜였음을 암시하는 장치는 있지만, 확답은 아니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원장이 정말 영태인지, 평행우주가 실재하는지, 아니면 모두 화자의 해석에 불과한지는 확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7. 정리
기억되지 못한 존재는 저녁에 도달하지 못한다. 돌아오지 못한 아이는 저녁을 맞이하지 못한다. 죄책감에 갇힌 화자 역시 30년간 저녁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완전히 저녁에 도착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다만 조금 더 가까워졌을 뿐.
카미카쿠시 당한 존재들은 영원히 저녁을 맞이하지 못한 채, 어느 세계의 황혼 속을 떠돈다. 현실의 실종자들,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들, 기록되지 못한 희생자들… 그러나 누군가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한,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화자는 30년간 혼자 영태를 기억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억했다. 그 기억은 광기로 치부될 수도 있었고, 착각이나 망상으로 무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 기억을 놓지 않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하쿠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진짜 이름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세계가 그를 잊으려 해도, 한 사람이라도 기억하면 완전한 소멸은 일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소설은 실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기억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한 개인의 태도가 세계를 어떻게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