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매우 주관적이며 작가가 의도한 바와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 이 점 유의하시고 객관적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생계수단으로써, 자신이 좋아해서, 누군가 시켜서 등등.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하나 있는데요, 바로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해섭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카나엘 디아즈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꽃집으로 가 죽은 여동생을 기리기 위해 튤립을 사고 그것을 그녀가 묻힌 곳을 향해 바다에 띄웁니다. 그러고는 곧장 직장으로 가는데, 그의 일은 바쁘기만 합니다. 때문에 그것을 묘사하는 데에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요, 모두 그가 느끼는 고통을 감추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쁘게 돌아가는 펍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장치에 불과한 것을 읽는 중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빌리 조엘의 노래 ‘Piano Man’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가 일하면서 만약, 계속 죽은 여동생을 떠올린다면 그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생각은 오히려 머릿속에서 망령처럼 남아 그를 괴롭히기만 했을 것이고, 그는 그것 때문에 실수를 만들어내고, 그의 그런 모습을 본 주변인들에게 걱정과 민폐를 끼쳤을 것입니다.
일이 모두 끝나고 집에 와서는 아침과 다르게 뜨거운 물로 피로를 떨치기 위해 씻습니다. 그제서야 그 피로로 감춰놓았던 정신적인 고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졸음이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죠. 열심히 일을 한 것도 자기 전에 그것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하루는 평범하면서도 바쁩니다. 하지만 그 바쁘고 평범한 일들은 자신이 겪은 비애를 잠시 잊고 덮어버리기 위함입니다. 만약 그가 매일같이 슬픔에 잠겨 자신을 돌보지 않고 폐인이 되버린다면 디아즈 자신에게도 힘들지만 남아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나 죽어서 그를 지켜주는 사람들 역시 힘들어 할 것입니다.
디아즈는 자신이 몸소 실천하는 것으로 슬픈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더욱 힘든 육체적 노동을 하지만 절대로 그 일들을 잊지 않습니다. 매일, 화원의 아가씨마저 알아서 척척 움직일 정도로, 튤립을 사가 바다에 띄웁니다. 아마 바닷속에는 그가 띄운 꽃들로 정원이 이뤄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죽은 디아즈의 여동생이나 디아즈 주위의 사람들이나 그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연, 가족의 죽음, 소중한 것의 유실 등으로 큰 실망감과 절망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피폐해지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에게 동정과 연민을 주지만 저는―매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매일을 울고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사는 것이 떠난 이들이 그 사람에게 바라는 일일까요. 우리가 갑작스러운 고통을 맞았을 때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일까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행동이 그것을 잊자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흉진 것을 어떻게 없애겠습니까. 그저 무너지지 않고 그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빠져 어떻게 할 바를 보르는 분들은, 죄송하지만, 정신차리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걷던 길을 걸어가며 마음속에 그들을 담아두면 됩니다.
카나엘 디아즈가 그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