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도전 정신이 좋았습니다.
도전정신이 있었다고 느끼는 까닭은 문장 때문입니다.
가독성 떨어지는 혼란스럽고 빽빽한 문장도 사이버 펑크 특유의 테마(나를 나라고 파악할 수 있는가? 현실을 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등등, “당연한 명제”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도전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를 강화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치로도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썼느냐” 라던가, 더 노골적으로는 “이렇게 쓰면 멋있을 줄 아느냐” 같은 반발이 두려워 조신하게 에고를 억누르고 쓰는 편입니다(일단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당 작품의 문장은 독자 개개의 평가가 어떻건 간에, 그 평가를 감수하는 과감함 그 자체로 점수를 주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보았습니다.
스토리상 변변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것도 좋았습니다. 자기 욕망을 드러내며 주인공을 제 뜻에 맞게 부려먹으려는 인물군상이 묘사됩니다만, 그들 중 누구도 또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시시하게 사라지죠(주인공을 부려먹는 데 성공하고서도 정작 목적을 이루지 못 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드라마틱 보다는 허무감으로 치닫는 전개도 도전적이라고 평할 만 하며, 특유의 문장전개와 잘 맞물리는 이야기라고 보았습니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고은과 주인공 사이에서 생기는 건조하고 미심쩍은 로맨스도 좋았습니다.
반면 이 작품의 다른 요소인 대체역사 부분은 조금 의아합니다.
제가 그간엔 이 장르를 애독하진 못 했는데, 그런 측면에서 저는 대체역사물 라이트유저라고 해야겠지요. 라이트유저로서 말씀드리자면, 대체역사 장르에서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역사가 변경되는 지점이 어디인가?”입니다.
여기서 작가가 취할 이야기 전략도 두 가지 떠오릅니다. 하나는 역사를 다르게 흘러가게끔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가령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여 식민지배 역사를 피하도록 노력하는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작중 “현재”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고,, 현실과 다르게 흘러간 역사는 “그럴싸한 배경 세팅”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갈림길”이 무엇인지 특정한 사건을 제시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바뀐 역사로 인하여 “작중 현재”의 문화와 사회도 실제 현실과 달라질 텐데, 이 부분을 맛깔나게 다루는 것이 승부처일 것 같습니다. 다만 중심은 어디까지나 “작중 현재”입니다. 이야기의 모든 요소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철의 왕국은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의문이 남습니다. 결정적 갈림길 부분인데요….
철의 왕국이 제시하는 “작중 현재”는 실제 현재와 현격히 다릅니다만 그렇게 된 경위가 조금 설명이 약합니다. 왜냐하면 현실 역사와 거의 비스므리 하기 때문입니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한국은 실제 역사대로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실제 역사대로 핵도 맞았습니다. 실제 역사와 똑같이 베트남 전쟁도 벌어지고 여기서 미국이 망신을 당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즉, 현실 역사가 거의 똑같이 흘러갑니다만, 갈림길이라 할 수 있는 건 국부라는 사람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개발독재자라서 실제 한국의 근현대사와 특별히 다른 점도 없습니다. 정권과 밀착한 대기업이 지원을 받아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도 그냥 똑같습니다.
대체로 실제 역사와 똑같이 흘러가는 가운데, 한국 독재자가 북진통일론으로 미국을 움직여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한국은 그 반사이익으로 세계 최강국 반열에 오르며, 일본에 핵폭격을 한 뒤 국제제재 없이 무사히 넘어가는 과정이 쉽게 납득 되기는 어렵습니다. 작중 독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박정희도 할 수 있었어야 했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앞서서 칭찬했던 작품 특유의 장광설 문장은 여기서만큼은 약점입니다. 특히 일본에 핵폭격을 날리고도 한국(작중 이름은 반도국…입니다만 이것보다는 근사한 국가명을 지으셨어도 될 듯 한데…)이 국제사회에서 무사한 이유를 서구 세계의 사상과 양심에 근거를 두고 정당화하는데, 장광설은 길만 길수록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근래 가자지구 상황에 대처하는 서구세계를 보면, 그들이 평소 거룩하게 내세우던 가치가 실로 가볍기 그지없음을 알 수 있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라리 독재자의 외교 역량이 너무 뛰어나서 서구 강대국들을 잘 구슬렸다고 하는 편이 납득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1화 (특히 핵폭격 관련 장광설) 때문에, 이 작품을 폄하하고 더 읽지 않을 뻔했습니다. 전술하였듯 저는 이 작품이 대체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1화 내용 때문에 하차했다면 저에게나 작가님에게나 적잖은 손해였을 것입니다.
더 본질적인 부분을 따지자면 굳이 이런 무리수적인 대체역사 세팅이 왜 필요했나 싶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일본이 한국 식민지라는 세팅이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일본인 창작자는 일본이 미국인지 영국인지 모호한 서양 국가의 식민지가 되고 무장 독립투쟁 세력이 활약한다는 설정의 픽션을 그냥 만들어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건 1차적으로 일본인들이 감정이입해서 보는 작품일 테니까요. “자유투사뽕”을 만끽하고 싶은 일본 청소년들이 타깃이 됩니다.
그러나 한국인 작가가 쓴다면 좀 다른 맥락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와”라던가 “신간”같은 일본어 요소가 활용되지만, 일본이 한국 식민지가 된다라는 전복적 상상에 뒤따를 도전적인 고민거리가 딱히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더 본질적으로 질문하자면,, 그런 전복적 상상이 유효한 이야기이긴 한가요? 만약 이 작품에서 한일간 민족적 역사적 문제, 더 나아가 역사에 얽힌 복수심이라는 문제를 비중있게 다루었다면, 오히려 이야기 주제가 방만하다는 인상만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작품을 보며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인 통제국가를 상상 속에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굳이 식민지인 처지의 일본인이 놓일 자리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작중 비참한 처지의 민중 묘사가 나오는데, 이들이 굳이 일본인일 필요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부당한 경제구조 아래서 희망 없이 살아가는 빈곤층… 인 것으로 묘사해도 충분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인 것으로 설정하려면, 그에 걸맞은 고민거리를 반드시 제안해야 한다 – 고 할 것 까지는 아닐지 모르나, 제가 볼 때는 군더더기 설정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