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희망찬 행성 이주라는 SF 설정으로 시작해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치닫는 호러 소설입니다.
줄거리
인류가 인구 포화로 인한 재앙을 피해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는 계획이 실행되고, 주인공은 1,000명의 정착민 중 하나로 선발됩니다. 그러나 행성 도착 후 평화로운 정착생활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생태계 연구소에서 발견된 버섯 모양의 토종 식물이 마약 효과를 내자, 연구원이 이를 밀거래하고 식품회사가 제품에 몰래 첨가하면서 사태가 벌어집니다. 주인공의 연인은 그 증거물을 빼돌려 주인공에게 건네주고 밖에 숨기라고 내보냅니다. 그러나 그녀는 경찰에 의해 사살되고, 주인공도 도망치다 얼마 못가 잡혀버립니다. 취조받던 도중 갑자기 유치장이 열리고, 주인공은 아수라장이 된 현실을 목격합니다. 이 식물을 섭취한 사람들은 극단적인 소유욕에 사로잡혀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그것들’로 변해갑니다. 주인공은 혼자 살아남아 쇼핑몰 주방에 숨어 마지막 기록을 남깁니다.
사건 진행의 속도와 시간구조의 특성
소설은 이중적인 시간 구조를 갖습니다. 현재 시점(숨어서 작성하는 기록)과 회상 시점이 교차하는데, 회상은 느리게 펼쳐지다가 약탈 사태가 발생한 시점부터 급격히 가속됩니다. 특히 경찰서에서 탈출한 후 부터는 숨가쁘게 전개되며, 중간중간 ‘그것들’의 침입으로 인한 긴장감이 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이런 속도 조절이 흥미로운 것은, 급박한 상황임에도 주인공이 멈춰 서서 기록하는 순간들입니다. 개가 나타났을 때, ‘그것’이 침입했을 때, 주인공은 기록을 멈추고 숨었다가 다시 타이핑을 재개합니다. 이 반복적인 중단과 재개가 독자를 끝까지 몰입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주인공은 지구에서의 삶을 암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행성이주계획에 당첨되는 것만이 “밝은빛으로 나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깁니다. 정작 그 희망이 결국 완전한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입니다. 주인공의 감정도 희망→불안→분노→공포→체념으로 변화하며, 마지막 문장에서는 죽음을 앞둔 초연함마저 보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락만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이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발견한 휴대용 컴퓨터는 “기적”으로 묘사됩니다. 물질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인공에게 마지막 희망이자 존재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이 ‘기록’이라는 행위야말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 생각합니다.
호러장르로서의 공포 요소
작가는 세 가지 공포를 쌓아올립니다.
1) 물질주의와 소유욕
“이곳엔 사람보다 쇼핑몰이 먼저 도착했다”.
새로운 행성에서조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본주의 시스템 구축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집착하는 것도 생존 필수품이 아닌 “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장기까지 “하나의 물건”으로 인식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2) 인간성 상실
주인공이 광기에 빠진 사람들을 “그것들”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제력을 상실”했고, “단 한 가지 욕망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소설에서는 이상한 버섯에 의한 약물 중독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좀 욕심을 부려서) 과장해석을 한다면, 현대 사회의 과잉 소비욕, 소유욕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의 모습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나 합니다.
3) 도피 불가능성
주인공은 지구의 암울한 미래에서 벗어나고자 행성 이주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서도 똑같은 인간의 탐욕, 기업의 욕심, 권력의 폭력이 재현됩니다. “어두침침한 터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도망칠 수 조차 없는 지옥에 도달했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 법이죠.
작가정신의 투영-기록하는 인간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이 끝까지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기록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는 게 이토록 소중한 일이라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라는 첫부분은 단순히 주인공의 생각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작가정신’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세상이 멸망해서 더 이상 읽어줄 사람이 없게 된다 하더라도 계속 무언가를 쓸 것이라고들 합니다. 주인공의 상황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이 기록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배고픔과 공포 속에서, 심지어 ‘그것’이 냉장고 위에서 침을 흘리며 내려다보는 순간에도 주인공은 타이핑을 멈추지 않습니다.
기록 행위의 의미
쇼핑몰 관리를 하는 주인공이, ‘기록’을 하는 이유는 다층적입니다.
첫째, 증언을 남기기 위함입니다.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서 드러나듯, 주인공은 자신이 마지막 목격자라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둘째, ‘그것’들과 달리 생각하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이 아직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소통의 욕구입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제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며 미래의 독자를 상정하는 것은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절박함을 보여줍니다.
넷째, 기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여기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유는 ‘작가라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작가는 증언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독자와 소통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씁니다.
글쓰기의 역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록 행위가 주인공을 더욱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타이핑 소리가 나고, 모니터에서 빛이 새어나와 ‘그것들’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 침입을 당하고도 주인공은 다시 기록을 재개합니다.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고 자조하면서도 멈출 수 없습니다.
이는 작가의 숙명을 보여줍니다. 글쓰기는 때로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비합리적이지만, 작가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죽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타이핑을 하면서 키보드를 조심조심 눌렀다”는 표현은 절박하면서도, 스스로도 우스꽝스럽지만, 바로 그것이 작가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봤습니다.
읽어줄 사람이 없어도 쓰고, 쓰고 싶고, 써야만 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기록을 읽을 사람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들’로 변했고, 자신도 곧 죽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씁니다. “과연 이대로 저장 버튼을 누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며 마지막 순간을 미루고 또 미룹니다.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글이 읽힐지, 이해받을지,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씁니다. 세상이 멸망해도, 독자가 사라져도, 의미가 없어 보여도 계속 씁니다. 그것이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작가)은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을 기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정신 아닐까요? 세상이 무너지고, 인간성이 사라지고, 죽음이 임박해도, 작가는 끝까지 펜을 놓지 않습니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끝끝내 몇 문장을 더 쓰는 모습은, 죽음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 작가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끝낸다고 말하면서도 끝낼 수 없는 것, 그것이 작가의 본능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