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을, 낙관적 허무주의에 관하여 비평

대상작품: 위상잔차 (작가: 김우듬, 작품정보)
리뷰어: 담장, 2시간 전, 조회 7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이 이야기를 아주 열심히 오독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공지능의 의식에 관하여 논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을 넘어 인간의 자아에 타인에 대한 이해에 관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인공지능의 의식에 관해선 수도 없이 논의된 바가 있고, 어느 정도의 수렴값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 논의가 더는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즐비한다. 그러나 여러 번 논의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뻔한 것이 되어버리는가? 같은 문제를 보더라도 관점을 다르게 접근하면 얼마든지 즐거운 화제가 될 수 있다.

‘위상잔차’가 훌륭한 이야기였던 이유는 이것이 결국 ‘알 수 없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도적인 외면을 통했을지라도.

그러니 이것은 더 이상 로봇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해체하고 이해하는지 그 방식에 관한 것일 뿐이다. 로봇이 자아를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한 글이 아닌, 더 나아가 인간, 타인과 나의 자의식에 관한 내용이다.

 


1. 존재는 경험의 잔여물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 1분 정도만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보자. 두루뭉실해도 좋고,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면 답을 도출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기 보단 그저 질문에 관해 곱씹어 보자.

한 사람이 고통을 느낄 때마다 그의 두뇌에 있는 신경 세포 C-섬유가 활성화된다. 칼에 손을 베이거나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남에게 무시당하는 경험을 할 때마다 C-섬유는 활성화된다. 그렇다면 고통은 곧 C-섬유의 활성화인가? C-섬유가 아니라 D-섬유가 활성화되는 유기체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전기가오리 2022 일력 中-

현상학에서는 이 논쟁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다. 현상학에서는 고통이 C-섬유에서부터 발현되는지 D-섬유로부터 발현되는지에 관한 문제는 잠시 미뤄둔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경험으로 정의할 뿐이다.

잘 와닿지 않을 것 같아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빨강에 관해 생각해보자.

 

빨강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1. 빨강의 파장은 몇 nm 부근인가?

2. 빨강은 시각 피질 내에서 어떻게 처리되는가?

하지만 현상학에서는 이 두 가지 질문 모두 후순위다. 왜냐면 현상학은 ‘경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우리가 실제로 빨강을 볼 땐 파장이 몇인지, 시각 피질 내에서 어떻게 처리되는 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빨강을 볼 때 빨간색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원인의 정의보단, 있는 그대로 현상이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되었으니, 이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로버는 해저 환경에 반응했고, 그에 따라 움직였지만 우리는 그 인과를 모델링 할 수 없었다. 자의식이라느니, 구조신호라느니 하는 말이 기어나오기 시작한 건 그 불분명함 탓이 분명했다.

가로로 쭉 뻑은 축의 구석, 아주 작은 범위의 기울기가 매끈하게 떨어졌다. 모든 그래프가 그랬다. (중략) 노이즈 플로어 없는 0은 현장에선 볼 수 없는 결과다.

노이즈가 0인 이상적인 값은 현장에서 볼 수 없는 수치다. 인과의 불분명함. 여기서 인과는 로버가 전송하는 초저주파가 단순한 노이즈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아를 가지게 된 로버가 보내는 구조 신호인지를 언급하며 ‘그 신호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가’에 관한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과 관계는 현상학에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저 빈 공간을 채우는 데 혈안이 돼서는…….

‘위상잔차’를 관통하는 물음은 ‘해석할 수 없는 신호는 오류인가 기억인가?’이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우리는 빈 공간을 채우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는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버무려진 주인공의 입장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낙관적 허무주의에 관해 이야기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자의식이란 착각

 

그렇다면 왜 위상’잔차‘인가? 이는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계산값과 예측값 사이의 ‘차이값‘, 즉 노이즈의 존재 여부 – 여기선 노이즈의 부재가 로버가 의도를 가지고 행한 행위 (그러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이자 자의식의 증거다. – 를 뜻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간 잔여물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무엇이 로버를 휩쓸고 지나갔는가? 심해에서 축적된 오래된 외로움? 자신을 그곳에 방치한 인간을 향한 원망?

로버를 휩쓸고 간 건 그저 인간이 로버를 바라보는 시선일 뿐이다.

 

인간은 환경을 볼 때 무언가를 투영한다. 그것은 비단 생물, 혹은 생물처럼 보이는 사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뇌과학적으로 인간은 환경을 인식할 때 한 겹의 필터를 끼고 인식한다. 우리가 느끼는 시각, 촉각, 청각, 후각,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감각들은 오로지 신체라는 필터를 걸쳐 여과된 잔여물이다.

 

예시를 들어보겠다.

형광등이 켜진 방에 녹색 병이 놓여 있다. (광량은 병의 색깔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 이때 병의 색깔은 녹색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을 밝히고 있던 형광등을 끈다. 방은 이제 완전한 암흑이다. 당신은 병의 색은 물론 병이 어디에 있는지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운이 좋아서 병을 발견하고 손으로 쥐었다고 치자. 여전히 병은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그 병이 자신의 손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럼 이때 병의 색깔은 무엇인가?

정답은 ■이다. 이는 앞서 던졌던 질문과도 다시 연결된다.

 

1. 빨강의 파장은 몇 nm 부근인가?

2. 빨강은 시각 피질 내에서 어떻게 처리되는가?

우리의 뇌는 620nm 부근의 가시광선을 ‘빨강’이라고 인식한다. 이는 빨강에 대한 절대적인 정의가 아닌, 그저 우리가 그것을 시각 피질과 뇌를 통해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깔이란 결코 사물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만약 색이 고유한 특성이라면 불을 껐을 때도 우리는 녹색 병을 ‘녹색’이라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빨강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해당 파장을 색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인식하는’ 존재가 본다면 그들의 감각은 결국 우리와 같을까? 설령 그 대상이 동일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을 raw data로 볼 수 없다. 그저 우리가 환경을 조금 더 쉽고 간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인식할 뿐이다. 자아는 존재의 증거가 아닌 환경을 바라보는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넓게 사용되는 것이 바로 투영이다.

하늘에 뜬 구름을 보았을 때 무질서한 배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강아지를 찾아내고, 누군가는 바나나를 찾아낸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착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주인공이 로버가 자신을 ‘응시하고’ 노이즈가 없음을 ‘로버가 의도적으로 행한 일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이라 믿는 것은 사실 관계에 자신의 생각을 접붙여 정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혹은 그것)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모든 감각이 환경을 인식하는 일종의 도구라면, 자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과거의 과학자들은 심장이 의식의 근원이라고 말했고, 현대에 이르러선 뇌가 의식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최신 뇌과학자들은 의식이란 심장이나 뇌와 같은 하나의 기관에 묶인 실체가 아닌, 우리 신체의 전부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현상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다시 말해 뇌만 뚝 잘라 새로운 몸에 이식한다고 해서 자아를 옮길 순 없다는 것이다. 오직 뇌에 의해서만 자아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상대방이 내게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도 나처럼 마음이 있으리라고 가정할 뿐이다. 이 가정은 참인가? 다른 사람도 나처럼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사실 나 빼고 나머지는 무늬만 사람인 좀비가 아닐까?

– 전기가오리 2022 일력 中 –

우리는 이를 확장하여 인공지능의 의식에 관한 논의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이 나와 같은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라고 직접적인 증거를 구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런 것처럼 행위하므로 나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 인공지능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인공지능의 ‘의식’처럼 보이는,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한다면, 그래서 규명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그들의 의식 유무를 논하는 것이 과연 유의미할까? 인간조차 철학적 좀비인지 가늠할 수 없는데?

결국 존재의 이유에 관해 파고들면 인간과 비인간 모두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물론 나는 ‘로봇에게 의식이 없다’라고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의식이 있다’라고 말할 생각 역시 없다. 서문에서 언급하였듯 이 물음에 관한 답을 의도적으로 ‘알 수 없음’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해가 없는 방정식처럼 말이다.

 


3. 이해의 부재는 불통과 단절로 이어지는가?

타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음으로 그들이 철학적 좀비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것이 필연적으로 일반적인 허무주의와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완전한 불통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완전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더라도 소통은 가능하며, 몰이해와 소통 / 이해와 불통은 모두 모순적이게도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일러두고 싶다. 그러나 분량이 너무 길어질 듯 하여 이번 리뷰에선 건너뛰겠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내가 ‘위상잔차’에 관하여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내 취향 뿐만 아니라 인식의 확장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들여다 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몰이해가 아닌 이해로 귀결되야 한다는 기이한 강박이 존재했다.

그러나 ‘위상잔차’를 읽고는 관점이 조금 달라졌다. 이해라는 행위에 ‘종결’이라는 개념은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위상잔차가 내게 남긴 메시지다.

물론 작중 주인공은 심리적 갈등으로 인한 도피, 외면을 선택했으나, 내게는 그것이 완전한 부정이 아닌 결정 유보 정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서 지금 당장 받아들일 순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명분이 생기면 기꺼이 두 손을 들 것 같았다.

이 부분이 바로 앞서 언급하였던, ‘열심히 오독하겠다’의 한 부분이다.

 

제1강령, 감정은 공정과 객관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

‘당연하잖아요. 저도 심해에 십 년 동안 처박혀 있었으면 진작 미쳐버렸을 걸요.’ 그게 아니라고. 그저 분석할 수 없는 신호 하나였을 뿐이라고. 이전처럼 반박할 수 없다.

그럼 주인공은 로버를 이해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로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버에게 의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이 기운 것이다. 그는 잔차를 설명하지 못했고 규명하질 못했다. 이미 자신의 감정이 투영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정하게 이해하려는 시도에 사견이 들어가 실패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통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외면하기로 결심한다. ‘알 수 없음’으로 남겨두고 그는 수면으로 다시 올라간다. 그의 외면은 이해가 소통의 전제 조건이라 여겼기 때문일까? 이에 수반되는 인식의 변화가 두려웠기 때문일까?

 

Understanding is always the fusion of horizons.

철학자 가다머(Gadamer)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해’는 지평의 융합과도 같다고 말했다. 나와 타인, 나와 세계라는 지평이 서로 맞부딪히며 재구성된다. 미지와의 조우에서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한 번 으스러지고, 섞인다. 이는 결코 나에 대한 완전한 상실이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융합의 과정이 확장이 아닌 그간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견해에 관한 붕괴라고 여겼다. 그가 가진 두려움은 바로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더 나아가야 하는가.

 

그간 우리는 무언가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기 위해선 무조건적으로 그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게 아닐까? 사실 이해라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가까운데, 우리는 그것이 끝이 있는 것이라 여겨서 조급했던 것이다.

The horizon of the present is continually in the process of being formed.

지평(이해)은 끊임없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결코 완벽한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결이란 불가능과 불필요에 머문다. 그렇기에 이토록 끊임없이 확장되는 세계는 우리에게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보다 소통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안겨준다.

 

그 도화선에 앞장서서 기름을 부은 건 잔차현상학계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로버가 ‘살아있다’고 믿었다.

작중에서 사람들은 로버가 살아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미 마음 속에서 로버를 자신들과 비슷한 지성체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는 로버가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초저주파를 보냈는지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음에도, 로버에게 자아가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투영하여 몰이해의 대상에게 소통을 제안한 것과 같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그리고 타자라는 인간이 실제로 우리처럼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인지를 정의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몰이해는 소통의 부재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겨진 과제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규명할 수 없고 중요하지 않다는 두려움은 이제 낙관적 허무주의로 변모했다!

 


3. 허구는 어떻게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고 영향을 미치는가?

허구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허구는 말 그대로 가짜로 존재하는 것인데, 가짜로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하여 진짜로 존재하는 우리의 감정을 흔들고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가?

전기가오리 2022 일력 中-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우리는 증명되지 않은 인과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를 고민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선을 정의할 수 있는가? 허구는 어떻게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고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는 고작 글자들의 조합을 이루어진 허구의 이야기에서 감명을 받고, 작품을 읽는 동안은 작중 인물들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허구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실제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상충되는 견해가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는 현상학의 관점에서만 파고들겠다.

현상학에서는 감정은 자아의 경험이므로 그것이 허구에서 비롯되었든 현실에서 비롯되었든 별로 중요치 않다. 감정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감정이 실제한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1. 현상학에서의 자아 (원인 규명 불가 및 불필요)와 2. 이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가능함을 연결 짓겠다.

왜냐면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진짜니까.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니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당신이 그러길 원한다면 기꺼이 낙관적 허무주의에 몸을 던져라. 그것이 허구에서 비롯되었든 현실에서 촉발되었든,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진짜니까.

 


마치며

‘위상잔차’는 작품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뿐만 아니라 서술 방식, 흡인력, 문체 무엇 하나 빠짐 없이 조화롭다. 컴퓨터 관련 전공자가 아닌 독자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 있는 단어들(패킷, 페이로드 등등)이 있음에도 이 작품이 술술 읽히는 이유는, 단언컨데 문장의 맺고 끊는 속도감이 아주 절묘하기 때문이다.

쉼표를 사용하여 호흡을 붙잡고 석점줄임표를 활용해 등장인물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사유까지 유보시킨다. 고뇌와 감정적인 갈등을 너무 루즈하지 않게, 그러나 너무 평탄해서 지루어지지 않도록 놓았다 붙들길 훌륭하게 해냈다.

 

반투명한 구조물 안에서 링크 인디케이터가 여전히 깜빡인다. (중략) 핸드셰이크, 악수라.

핸드셰이크라니. 이건 악수가 아니다. 움켜쥔 건 권한이었다.

게다가 리듬감 있고 머릿속에 행위가 하나하나 그려지는 서술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단어에 중의적인 의미를 붙여 주인공 인식의 변화를 서술하고 사건을 충실히 요약한다.

그가 테이블에 놓인 서류 두 개를 손가락으로 눌러 밀었다.

더군다나 길고 긴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아도, 짧은 문장 속에서 어떻게 하면 원하는 장면을 재현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인 중단편에서 착실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노련함에 읽는 내내 감탄했다.

 

이 글에서 내내 이야기 한 자아에 관한 낙관적 허무주의는 인공지능을 구축하는 엔지니어들에게는 무의미하게 와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우리의 삶에 침투할 비인간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에 관해서는 생각해볼 수 있다.

 

아주 간만에 즐겁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파고 들 수 있게 좋은 작품을 선사해주신 작가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다. 한동안 서평은 쉬고 있었는데 무슨 교통사고, 신내림 받은 것처럼 이 작품에 훅 꽃혀서… 이리 줄줄 써내리게 되었다.

 

리뷰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럼 이만 다음 작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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