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순수하게 악한 것, 순전히 악한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무의도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더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로 어린아이나 그에 버금가도록 순수한 존재가 천진난만하게 악의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그러한 발상을 떠올리는 것을 일컫는 데에 사용되는 듯합니다.
실제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그런 소름 끼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때로는 웃기게 다가올 때도 있고, 다소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 모습이 인간은 본래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의 주요 근거로도 사용되고는 하는데, 글쎄, 과연 어떨까요?
이러한 효과를 이용해서 아이들의 시선으로 어른의 세계를 묘사하는 기법이 문학적으로 자주 사용되고는 했습니다. 이 소설도 정확히 그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는 인간의 천성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인간이 지닌 악함의 근원은 어디인가, 오래도록 내려온 물음에 이 소설이 답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 후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돌볼 시간을 없어 가정부를 고용합니다. 바로 필리핀에서 온 ‘도레미 아떼’입니다. 불법 밀입국자로 묘사되는데, 아이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할 것도 없는 사항입니다. 자신들을 얼마나 잘 돌보아주는가가 아이들의 유일한 관심사일 테니까요.
그리고 도레미 아떼는 아이들을 극진히 보살펴줍니다. 단순히 사용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아이들과 교감하면서 자기 자식처럼 돌봐주죠. 아이들도 그런 도레미 아떼에게 더욱 애착을 느끼고, 눈빛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에게서 친엄마보다 더한 모성을 느끼게 됩니다.1
이 소설은 두 가지 주요한 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축은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이들이 실제로 애착을 느끼는 어머니 간의 대립입니다. 사실 대립이라기에는 친모 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견제하고 공격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아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친모 대신, 오랜 시간 집에 있으며 동시에 자기네를 돌봐주기까지 하는 도레미 아떼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낍니다.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 더한 모성까지 느끼게 되죠.
작중에서 친모는 ‘아빠’로, 도레미 아떼는 ‘엄마’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가사노동 및 육아 참여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 아이들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더욱 애착을 느끼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즉 여기서 친모와 도레미 아떼의 갈등은 아버지와 어머니 간 갈등입니다. 따라서 친모가 도레미 아떼에게 가한 ‘갑질’은 가정 폭력의 은유입니다.
아이들은 친모의 태도를 따라 도레미 아떼에게서 애정을 거두고 대신 반감을 키워가게 되는데, 이는 가정 내에서 제일 낮았던 어머니의 지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사망하고 마는 도레미 아떼의 모습은 그러한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이자, 가정폭력 끝에 목숨을 잃고 말았던 수많은 피해자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유에 의해 도레미 아떼의 죽음은 단순 사고가 아닌 살해로 비춰지고, 독자로 하여금 친모를 그 범인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화장실 바닥을 오래도록 닦는 그녀의 모습은 그 예측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하고요. 나아가 자녀들이 아직 어릴 적 아버지와 이혼했다는 진술의 신빙성마저 의심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자녀로부터 사랑을 빼앗아 갔다는 망상에 빠져 도레미 아떼를 살해한 것일까요?
여기서 소설의 두 번째 축이 빛을 발합니다. 도레미 아떼를 살해한 범인이 아이들의 친모로 모이려는 순간, 즉 추리물로서의 긴장감이 극에 달한 순간, 서술자인 주인공에 의해 친모는 누명을 벗습니다.
진범은 바로 주인공이었습니다.
도레미 아떼에 대한 친모의 태도를 그대로 흡수한 주인공은 도레미 아떼를 자신보다 아랫사람으로 여기게 되고, 그녀를 악질적으로 괴롭히게 됩니다. 그렇게 화장실 바닥에 비누칠을 하고, 그에 의해 도레미 아떼는 미끄러져 사망합니다. 화장실 바닥을 닦는 친모의 행동은 사랑하는 자식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증거 인멸이었던 것입니다.
범행의 동기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도레미 아떼에게 날 선 태도를 보이는 친모의 모습이 크게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순수악이라는 단어는 힘을 잃고 맙니다. 오히려 순수했던 아이들이 타인의 악한 일면을 보고 그것을 모사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소름 끼치는 것처럼 묘사되던 아이들이 사실 도레미 아떼가 죽을 즈음에 이미 중학생이었다는 소소한 반전은 그것을 더욱 강화합니다. 중학생.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는 없지만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알 수 있는, 어른과 아이의 틈에 갇힌 아주 애매한 나이잖아요?
이 소설은 추리물로서의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이 지닌 악의 근원을 조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만화가 최규석 작가의 ‘콜라맨’이라는 작품이 떠올랐는데요, ‘공룡 둘리’로 유명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흥미가 동하신다면 감상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두 갈래 축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든든하게 받치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