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결점을 가장 아름답게 채우는 방식 <이름> 공모(감상)

대상작품: 이름 (작가: 끼앵끼앵풀,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내린뒤해나, 7시간 전, 조회 8

 

 

 

용과 계약한다는 건 이름을 준다는 의미야.”

(본문.P136)

 

 


 

목차

1.용괴(龍怪) 이야기

2.소녀의 카르마

3.가문의 카르마

4.이름으로 채워지는 결점

5.가깝지만 작은 이야기를 기대하며…

 


 

 

1.용괴(龍怪) 이야기

 

언젠가 해당 연작물에서 등장하는 용에 대해 ‘괴룡(怪龍)’이 아닌 ‘용괴(龍怪)’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물음표를 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흔히 수식어가 앞을 차지하는 문법 특성상, 마치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생물을 ‘용(龍)’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기분이었죠.

 

실제로도 작중에 등장하는 ‘용’은, 그 웅장한 외형과는 별개로 ‘용’으로 부를 수 없는 결점들이 부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날개가 있어도 날 수 없고, 다리가 있어도 걸을 수 없는, 우리가 흔히 ‘용’이라는 창조된 생물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요소들이 고장 나 제 기능을 하지 못 하는…… 한 마디로 용의 모습을 한 ‘괴물(怪物)’로 인식하게 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죠. 그런 용이 될 수 없는 결점들을 채워줄 수 있는 소재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아뎁투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이름>이라는 작품은 ‘용괴(龍怪)’ 혹은 ‘아뎁투스’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활약하는 세계를 다룬 연작소설의 일부입니다. 제 경우에는 관련 세계관과 작품들을 대부분 읽어보고 분석했던 독자 중의 한 명입니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용괴’ ‘카르마’ ‘회신자’ ‘아뎁투스’ ‘조감나무’와 같은 고유용어들도 모호하게나마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배경설정들의 뿌리에는 ‘엘든 링’을 비롯한 프롬소프트웨어 게임의 설정들을 차용했다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느 독자들과는 조금 앞선 곳에서 출발선을 당겼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겠습니다.

 

그런 제 입장에서 첫인상을 말하자면, 이번 <이름>이라는 작품은 많은 것이 가려져 있던 전작들에 비하면 제법 친절한 작품에 속합니다. 전작에서는 그 형태를 짐작하는 것이 버겁던 ‘카르마’와 같은 소재들도 시각적인 모습과 인물들로 구현되는 영향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편이며, 등장인물들의 동기와 욕망도 무척 명료해져서 서사 면에서도 큰 이득을 보는 면이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름>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훑어보며, 이 멋진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님들에게 다정한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전작인 <아뎁투스>의 리뷰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니 참고 부탁드려요 :smile:

https://britg.kr/novel-review/217520/

 

 

 

2.소녀의 카르마

 

작중에서 핵심적인 소재로 차용되는 ‘카르마(karma)’는 썩 익숙한 용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통용되는 ‘karma’라는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업보(業報) 또는 업()

생각이나 말·행동으로 지은 원인, 그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결과

 

하지만 이 사전적 의미는 작중의 내용과 선뜻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작중에서 표현되는 것은 ‘업보(業報)’보다는 기독교에서 일컫는 ‘원죄(原罪)’로 치환하면 생각보다 이해하기 쉬운 무언가로 다가옵니다.

 

작중에서 ‘카르마’는 이런 ‘원죄(原罪)’가 환상적으로 구체화되고 시각화된 힘으로 묘사됩니다.

 

(P27). 그것들이 소녀가 이고 있는 죄목이었다.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천 명을 넘게 죽이고, 시체도 범했다. 원주민의 성물을 짓밟아 부수고, 오물통에 던졌다. 그밖에도 많은 죄를 지어 나열하면 끝이 없었다.

(P28). 그의 선조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하여 당대에 죗값을 전부 치르기란 무리였다. 결국 자손들이 그의 카르마를 물려받았고, 이제 소녀의 대까지 이르렀다.

(P31). 적어도 소녀의 대에서 끝날 리 만무했다. 물려받는 날이 왔을 때, 소녀는 부모가 남긴 카르마의 형태를 보았다. 구슬처럼 둥근 윤환이 독특한 모양의 고리를 (중간생략)소녀는 바닥에 쳐서 카르마를 깼다. 그러자 그 잔편이 스며들어 소녀의 것이 됐다.

 

독특한 것은 이런 ‘카르마’는 인간의 보편적인 원죄보다는, 어느 특정 인물과 그 조상으로 연결된 하나의 가문이 짊어지게 되는 죄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작중의 ‘소녀’는 이런 ‘카르마’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소녀가 죄악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핏줄이 남긴 죄악들을 ‘카르마’라는 형태의 힘으로 물려받아, 그것이 곧 자신의 원죄가 된 셈이죠. 그 원죄의 낙인은 ‘이름’을 거세한 것입니다.

 

(P25). 소녀는 이름이 없었다. 죄인에게 이름은 허락되지 않았다.

 

소녀가 주변사람들에게 ‘죄인’으로 규정되는 것은, 이런 원죄를 물려받은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카르마(원죄)’가 환상적인 소재로 구체화됨으로, 손 밖으로 놓아버릴 수 있는 무언가로 규정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P23). 회신자들이 살아 있는 것의 카르마를 느끼고 달려들었다. (중간생략)망자들은 그녀의 카르마도 탐했다. 그녀가 뭘 짊어졌는지도 모른 채.

(P24). 소녀는 차라리 이 잿더미들에게 자신의 카르마를 넘겨주고 싶었다.

 

이런 ‘카르마’의 쓰임새는 소녀가 벗어날 수 있었던, 혹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점을 만들어줍니다. 소녀가 사는 세상에서는 ‘회신자’라는 존재들이 ‘카르마’를 탐하며 살육을 반복하고, 소녀는 그들에게 부모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넘겨받은 원죄들을 털어버리기를 원합니다. 물론 허락되진 않습니다. 그것이 주변인들의 시선이 옥죄는 탓인지, 한 번 넘겨받으면 몸 밖으로 떼어낼 수 없는 종양에 가까운 것인지, 그 외의 것들은 추측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분명 이 ‘카르마’를 떼어내고 싶다는 자조에 가까운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카르마’를 넘겨받았듯이.

 

 

 

3.가문의 카르마

 

이런 ‘소녀’의 영문도 모를 원죄를 자극하는 것은, 한 때 친구로 불렸던 ‘소사’의 존재입니다. 그녀는 ‘파르바예’라고 불리는 가문의 일원으로, 용을 찾고 아뎁투스가 되기 위한 여정을 이끌고 있는 주체입니다.

 

(P41).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소사 님은 날 친구로 대해줬어.”

 

하지만 현시점에서 소녀를 다루는 소사의 태도는 사뭇 차갑습니다. 그녀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소녀가 물려받은 ‘카르마’를 건드리는 날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55). ‘내 몸에 손대지 마. 이 죄인아.’

(P175). “그 아이는 단순한 노예가 아니야. 지은 죄가 많아 죗값을 치르느라 바쁘지.”

 

소사가 소녀에게 던지는 모든 언어들은, 소녀가 물려받은 ‘카르마’를 과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녀 또한 ‘카르마’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장 ‘카르마’를 근반으로 아뎁투스가 되기 위한 시도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해도, 그 죄인의 손을 더럽히고 있는 원죄가 반드시 그들의 손에 얽혀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낙인을 찍습니다. ‘카르마’를 물려받은 소녀는 ‘죄인’이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카르마’라는 이 세상의 규칙을 거부하는 셈이 됩니다.

 

(P125). “이봐, 죄인. 대답해 봐. 이것도 죄목에 올릴 건가? 일부러 그랬어? 파르바예 가문이 천층탑에 못 돌아가도록?”

(P270). “강한 용과 계약을 맺어 전쟁에서 공을 세울 거야. 그 공으로 당당하게 천층탑에 입성하겠어. 쫓아낸 놈들에게 복수할 거야.”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카르마를 물려받은 소녀에게 찍어 누르는 낙인들은, 단순히 소녀의 원죄를 넘어 자신의 원죄를 은연중에 자극하고 있습니다.

 

(P207). ‘파르바예 가문은 유다의 천층탑에서 쫓겨났다.’

(P211). ‘천층탑 안에 더러운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은 놔두고 충성을 바친 파르바예를 내쳐!?’

 

작중에서 소사가 속해 있는 ‘파르바예’ 가문은 ‘천층탑’이라는 집단에서 쫓겨난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막연한 감성의 영역이지만, 적어도 파르바예 가문이 ‘천층탑’으로 돌아간다는 목적은 더 높은 자들을 향한 시기와 질투를 넘어, 가문의 복권을 노린다는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P225) ‘이기적인 것. 네 부모도, 나도, 내 부모도파르바예를 위해서 지금껏 살아왔다. 한데 혼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해?’

 

문제는 그런 천층탑으로의 귀환 자체가 그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녀는 파르바예 가문이 가지고 있는 복권 의식에 가장 난폭한 방식으로 시달렸던 피해자에 가깝습니다. 작중의 묘사에 따르면, ‘천층탑으로 돌아간다’는 목적의식을 부여하기 위해 어린 소사를 고문에 가까운 방식으로 학대했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P241). “그럼 그 죄인 노예는 남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거군요.” “남의 죄가 아니야. 선조의 카르마를 계승한 이상 그 아이의 책임이야. 내가 내 선조를 따라 파르바예인 것처럼.”

 

한 마디로, 그녀의 이름에 새겨져 있는 ‘파르바예’라는 문구 자체가 그녀의 ‘카르마’로 작용하는 셈입니다. 물론 그것이 소녀처럼 유산처럼 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낙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자신의 의지가 무시당하고 겁탈당하는 듯한 감각은, 작중에서 물려받는 ‘카르마’와 크게 다른 방식은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소사가 한때 친구였던 소녀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경멸하는 것은, 어쩌면 ‘파르바예’라는 원죄를 물려받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P325). “그 이름 없는 노예가 대속하고 있는 죄는 너희 파르바예 가문의 죄다. 멸망한 우리 도시에 저지른 짓이란 말이다. 아무 노예를 붙잡아 가문의 카르마와 죄를 떠넘긴다고 해서…” 노인의 두 눈이 희번덕였다. “깨끗해질 줄 알았나?”

 

그런 의미에서, 이름 없는 노인과 마을이 지적하는 파르바예 가문의 ‘죄’는, 그들이 다루고 있던 ‘카르마’의 규칙을 전면으로 부정하게 만드는 핵심을 보여줍니다. 죄를 떠넘긴다는 얄팍한 수가, 곧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공감 받을 수 없는, 공유하고 물려주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결국 죄를 지은 주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한 의식에 방점을 찍어주고 있죠.

 

(P321). “아직도 모르겠나? 우습기 짝이 없군. 남에게 죄를 전가하고 그 후손은 잘 먹고 잘 사는 꼴이라니.”

(P336). “네 카르마의 빈 자리를 다시 채워주마, 파르바예. 이제 진정으로 속되할 시간이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는데, 막상 파르바예에게 죄를 묻겠다는 노인의 태도 또한 소사에게 찍힌 가문의 낙인, 즉 ‘카르마’의 원리와 동일하게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냉정히 따지면, 소사는 소녀처럼 가문의 피해자입니다. 파르바예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소녀를 멸시해야만 했던 것도, 천층탑이라는 목표를 세운 것도, 전부 그녀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오로지 ‘소사’를 향해 그 원죄를 묻습니다. ‘소사 파르바예’라는 이름을 멀쩡하게 가지고 있는 그녀조차도, 어떤 죄인이라고 멸시받은 소녀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은 셈입니다.

 

(P25). (생략)…… 죄인에게 이름은 허락되지 않았다.

 

 

 

4.이름으로 채워지는 결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작품처럼, ‘이름’이라는 요소는 어떤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여느 창작물에서 ‘이름’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결점으로 묘사되는 것 또한,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개념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속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름’을 만드는 주체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름’을 만드는 주체는 타인입니다. 부모, 형제, 친척, 이름 모를 어른 등……. 누군가 탄생해서 처음 숨을 쉬기 시작했을 무렵에, 그들에게 ‘이름’을 주는 주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 기존의 있던 이름을 거세했다는 것이 주는 이미지는 사뭇 잔혹합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말이죠.

 

(P25). 소녀는 이름이 없었다. 죄인에게 이름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도 ‘이름’이 주는 속성과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의미가 흥미롭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파르바예 가문의 ‘죄’를 떠맡아서 ‘죄인’이 된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소녀에게 죄를 맡기고 이름을 빼앗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소녀가 ‘카르마’를 떠맡을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만큼, 처음부터 이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죠. 그것은 단순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선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점이 있는 짐승. 그것이 작중에서 이름 없는 소녀(죄인)를 다루는 태도입니다.

 

(P129). “만물의 이름들은 전부 그것들이 세상에 난 뒤에 이름이 지어졌지. 인간, 짐승, 호수, 나무용은 달라. 용은 세상에 나기 전부터 이름을 가져.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이름을 잊고 말지.”

 

그런 의미에서, 작중에서 ‘용(龍)’이라는 생물을 다루는 방식은 이런 ‘죄인’의 속성과 닮아 있으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카르마’를 물려받게 되는 죄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름을 잃게 될 예정이었다면, 이 세계의 ‘용’이라는 존재는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부여받지만 탄생으로 그것을 놓아버리게 되는 처지에 이릅니다. 이름이 거세당하는 것을 결함으로 취급되는 이치를 떠올리면, 작중의 ‘용’은 이런 결점에 가장 걸맞은…… 용이라고 불리지 못 해 ‘용괴(龍怪)’로 규정되는 셈입니다.

 

이 작품에서 ‘이름’은 인간의 결점이자, 그 결점을 메꾸기 위한 목적으로 작용합니다. 자신의 소멸된 ‘이름’이라는 결점을 인간과의 인연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용의 속성에도 부합하는 설정이죠.

 

(P136). “용과 계약한다는 건 이름을 준다는 의미야.”

(P138). “용들은 뭘 하고 싶어 할까? 이름을 찾고 싶어 해.”

(P144). “용은 파르바예 가문의 숙원에 관심이 없어. 하지만 소사님은 그들이 되려 하질 않고, 그들이 파르바예의 일원이 되기만을 원하지.”

 

소사가 아뎁투스를 목적으로 ‘용’을 찾아 헤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로 자신의 부족한 힘(결함)을 채우기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관계는 다소 일방적이고, 또 고집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이름’이 주는 의미를 떠올리기 보다는, 그 관계로 청산할 수 있는 가문의 업을 더 이기적으로 강요하고 있죠. 작중에서는 그 또한 소사의 ‘결점’으로 언급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름’을 다른 주체로부터 선물 받는다는 기존 관념에 반해, 마치 스스로가 그 주체가 되어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비춰집니다. 하지만 작품은 이런 흐름 또한 ‘이름’이 주는 가치를 역설하는 장치로 활용합니다.

 

(P493). [네 엄마가 주려 했던 거야. 결국 주지 못했지만내가 줄게.]

(P528). “너에게 이름을 줄게. 잃어버린 내 원래 이름에서 갈라져 나온 이름을.”

(P530). “그걸 너의 진짜 이름으로 삼아. 그리고 그 이름에서 딴 새로운 이름을 나에게 지어줘.”

 

결국 ‘이름’의 속성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주체로부터 받는 인정이고, 애정이며, 그 존재를 규정하겠다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녀는 마지막에서야 모친이 숨겨놨던, 죄인의 이름으로는 차마 받지 못 했던 ‘이름’을 되돌려 받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곧 ‘이름’이 주는 가치는 다른 이가 나를 규정해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는 것을, 작가는 분명 잊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P657). 어쩌면 처음엔 간단했는데, 이름을 붙이다 보니 복잡해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조금이라도 아는 거 같은 느낌이 드니까. “어떤 걸?” 자기 자신을.

 

후에 소녀가 찾게 될 자기 자신은 어떤 형태일까요? 용과 함께 ‘크로셀’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진 빈 공간들에 또 다른 ‘이름’이 깃들기를 기대하면, 부족한 해석을 마치겠습니다.

 

 

 

5.가깝지만 작은 이야기를 기대하며…

 

길고 지루한 이야기로 시간을 뺏었습니다만, 고백하자면 저 또한 이 작품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부하는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님께서 이 해석들을 보고 ‘내 의도와 다르다’며 실망하실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해 가슴이 불편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감정적이고 사변적인 주장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존재합니다. 분명 인물들마다 구체적인 배경이 있고 서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머릿속에 잡히는 이미지들이 그들이 되뇌었던 감정적인 호소에 가깝다면, 이 작품은 소설적으로 다소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는 인상도 받게 됩니다.

 

제 주제에 감히 이 멋진 작품에 피드백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작품이 더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있다면, 그 길에 작은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며 몇 가지 제안을 해볼까 합니다. 혹시 이 작품을 퇴고할 의향이 있으시다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다듬어보면 어떨까요?

 

첫째, 소사와 소녀의 거리감을 더 좁혀보면 어떨까요?

 

이 두 사람은 ‘카르마’라는 벽에 의해 갈라진 사이를 묘사하는 주체입니다. 다만 그것은 배경설정으로 판단되는 요소이지, 인간이 주고받는 상처에 대해서 논하자니 굉장히 표면적으로 언급되는 수준에 그쳐 있습니다. 몇 가지 문장을 덜어낸다면, 사실상 이 둘이 남남처럼 보일 정도로 건조한 것도 한 몫 합니다.

 

의외로 방법은 간단합니다. ‘소사’ 쪽에서 소녀를 더 의식할 수 있는 묘사를 키워주면 됩니다. 지금 작중에서 ‘소사’를 움직이는 것은 가문에서 억지로 주입한 동지의식입니다. 그녀의 목적 또한 아뎁투스가 되어 가문의 복권을 노리는 것에 함몰될 뿐이며, 막상 본인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욕구보다는 가문의 욕구를 감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에 가까우니, 그것에서 바깥으로 벗어나 있는 듯한 소녀로서는 소사의 서사에 섞이지 못 하고 겉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만일 소사의 ‘아뎁투스가 되겠다’는 목적에, 작게나마 소녀의 존재가 언급된다면 어떨까요? 어떤 식으로든 소사가 노리는 가문의 복권이, 곧 한때 친구였던 소녀의 복권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으로 그녀가 고집하는 여정이 그녀 자신을 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작중에서 소사의 목적과 방식은 ‘실패’로 묘사되는 만큼, 끝내 이름을 얻고 ‘성공’하는 소녀와 대비되기 위한 관계를 의도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곧 정답이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저 하나의 보잘것없는 의견으로 구겨 넣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둘째, ‘이름에 담는 이미지를 더 축소해보면 어떨까요?

 

사실 본문에서 감탄의 언어로 해석해놨던 ‘이름’ 그 자체도 의미 면에서 모호한 점이 많습니다. ‘이름’ 그 자체야 상상하기 어려운 무언가는 아니지만, 그 이름을 다루는 방식들은 상상이 불가능한 무언가에 영역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용에게 주어지는 ‘이름’의 의미가 그러하죠.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태어나면서 이름을 잃는다. 본문에 담긴 내용을 천천히 음미해보면 끝내 도달하는 답을 있겠으나, 그 자체의 개념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허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저 문장만 툭 떼어놓고 제시했을 때 어떤 의미인지 선뜻 알아듣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어렵지 않습니다. 당장 김춘수 시인의 사례를 들었던 것처럼, 이름을 받고 존재가 완전해지는 의미야 숱하게 이뤄져 온 이미지입니다. 지금 이 작품에서 그 명료한 이미지를 방해하는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무기로 내세우고 있는 용과 카르마,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이미지로 판단됩니다. 이런 단점들이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비롯되는 불친절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판타지 또한 독자들과 같은 인간이 활약하는 이야기인 만큼 간단한 개념에 초월적인 이미지들을 함축시키는 것은 다소 벅차다는 인상에 도달할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이름’이 주는 관습적인 의미처럼,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소사와 소녀, 소녀와 엄마, 뱀과 소녀……. 마치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시련을 이겨냈던 기분 좋은 추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듯이, 이들이 한 데 모여서 찾아낸 무언가가 작지만 함부로 놓칠 수 없는 보람찬 인상을 줄 수 있기를 말이죠.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에서도 사우론이라는 거대한 악과 대적했다는 서사를 다루지만, 결국 마지막에 인상에 남는 것은 그 과정에서 보여줬던 프로도와 샘이라는 두 인물의 애틋한 관계였던 것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작품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과 대사를 하나하나 짚어보며 작가님께서 숨겨놓은 의미를 찾는 것은, 따뜻한 모래사장에서 예쁜 조개껍질을 골라내는 듯한 묘미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 놀다가 문득 뒤돌아본 모래밭에 방금 지나왔던 흔적을 되짚는 것 또한, 내가 이 작품에 얼마나 몰입하고 빠져 있었는지를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듯합니다.

 

문해력이 부족한 독자가 쓴 글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한 편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에도 멋진 한 편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하겠습니다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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