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이 작품에 대해 제 감상을 짤막하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생각입니다.
21세기 고행이 왜 고행(苦行)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
본 작품은 고행하는 늙은 스님인 “무염”이 “아가”라고 하는 여자를 거둬들이면서 발생하는 짤막한 스릴러입니다. 무염은 해탈을 위해 수행하지만, 끝내 해탈에 이르지 못합니다. 초중반까지 제시된 무염은 분명 해탈까지 한 걸음 남은, 정말 초연한 수행자로 나타났으나, “아가”라는 여자와 엮이면서 모든 게 어그러지고 맙니다. 무염은 해탈을 위해 수행하지만, 해탈에 집착할까, 조급해지진 않을까 하며 해탈조차 해탈하고자 합니다. 그런 무염은 병에 대해서도 건강하기를 바라지 않고 병을 통해서 오히려 더욱 수행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해탈조차 해탈하려는 태도는 “아가”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병을 통(通)하려던 무염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병에게 휘둘리고 맙니다. 독자는 아이러니와 비극 앞에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해탈조차 해탈하는 데 실패한 무염을 안타까워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해탈이란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낸다고 여겨야 할까요? 만약 무염이 자신이 치매인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번뇌를 잊어감에 감사할까요, 수행을 잊어감에 두려워할까요? 아가라는 여인 역시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무염의 번뇌이며, 어디까지 무염의 치매 증상일까요? 이 작품의 제목이 마라 파피야스인 건, 단순히 무염이란 수행자를 방해하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역시 번뇌를 가져다주는, 작품 자체가 마라 파피야스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요?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 무염의 수행에 따르면, 이조차 해탈하고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모든 것은 덧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이 수행을 방해하는 도구인 성욕과 치매는 어떤 정신적인 고난보단 신체적인 고난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고환이 존재하는 한, 뇌가 망가져가는 한 무염이 추구하는 ‘해탈’에는 영영 닿을 수 없겠죠. 역시 답은 하나입니다. 그건 바로 전뇌화…! 괜히 붓다 사이버펑크가 조합되는 게 아니겠죠. 고행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