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이버펑크 백합 수사물입니다. 사실 이게 핵심이죠. 이 작품이 사이버펑크 백합 수사물이라는 게요. 이 작품은 작중 내의 설정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 몹시 불친절한 소설이고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을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넘깁니다.
다행인 건 이 소설을 보기 전에는 사이버펑크라는 용어도 몰랐던 저조차도 작품을 이해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는 거죠. 설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기 때문에 그래요.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들 하잖아요? 갑자기 이 작품의 불친절함을 불친절함이라고 부르기 적절한 건지 헷갈리는데, 아무튼 이런 불친절함은 좋아해요. 왜냐면 이건 ‘이 작품의 세계는 현실과 다른 세계지만 그것이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고, 더 나아가면 ‘난 이 세계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으니 생소한 설정은 대충 넘어가고 내가 하려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잘 들어.’라는 뜻이거든요. 그럼 어쩌겠어요. 이야기를 들어야죠.
이야기는 당연하겠지만 사이버펑크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깁니다. 사건의 중심에는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오류, 작은 실수가 있고, 사소한 오류 하나 때문에 반쯤 기계인 주인공과 상당히 기계인 연인. 그리고 사람과 기계가 섞인 주변 인물들은 생고생을…… 흠. 기계고생을 합니다. 말하고보니 작중 내에서는 상당히 차별적으로 들리는 발언이 된 것 같군요. 생소했기 때문일까요? 작품의 소재는 독특하고 좋게 느껴졌습니다.
또 중요한 게 있죠. 이 작품은 백합 소설이라는 거. 이게 뭔 얘기냐면 여자와 여자가 사귄다는 게 그 여자가 기계거나, 기계와 사람이 반쯤 섞인 것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그렇기에 작품에 나오는 오류의 원인은 대부분 사랑입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원리도 사랑이죠. 일관성 있는 주제가 있다는 거고 이것도 좋아요.
다만 수사물이라는 부분에서는 솔직히 좋은 평가를 주기가 힘듭니다. 분량 문제일까요? 아니면 작가의 성향 문제일까요. 사실 수사물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수사를 방해하는 게 없잖아요. 역경 없는 모험물, 강적 없는 배틀물을 보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추리가 심오한 것도 아니죠. 그냥 단서를 주르륵 따라가면 진상이 드러날 뿐입니다. 등장인물한테든, 독자한테든.
초반 단편에서는 강렬하고 독특한 소재와(사이버펑크) 등장인물들의 관계 때문에(백합) 재밌었는데, 독자가 작중 내의 소재를 충분히 이해하고 관계도 이해한 뒷부분에 가서는 솔직히 이야기의 힘이 떨어진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면 사이버펑크가 아니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그 독특한 세계관을 쓴 건가?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실제로 이야기가 밍숭맹숭해지긴 했죠. 좀 조악한 예지만 첫번째 단편이나 마지막 단편이나 주인공의 연인이 위기를 겪어서 주인공이 구하러 간다는 전개는 똑같은데 솔직히 1편에서 겪는 일보다 마지막 단편에서 겪는 일이 더 정도가 약하잖아요. 독자가 느끼는 위기감, 공포감도 덜합니다. 첫번째 단편에선 상대의 정체도 불명이었고, 그 위험성도 미지수였어요. 하지만 마지막 단편에서는 상대의 정체와 위기가 꽤 구체적으로 제시된단 말이죠. 아니, 아예 단편 하나를 미지의 위기를 구체화하는데 사용했어요. 작중 내에서 실제로 어떤게 더 위험한지는 상관없이 첫 작품에서 느꼈던 긴장감을 후반부에서 느끼기 힘듭니다.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진상이 사소해요. 첫번째 단편. 번역 오류가 만들어낸 미치광이 살인마. 충격적이죠. 두번째 단편. 사랑과 설계상의 오류. 안타까웠습니다. 세번째 단편. 연인의 다툼과 계산 오류. 재미없었어요. 사건의 진상과 그게 밝혀지는 과정이 별 볼일 없었던 것도 컸지만 수사보다 백합 내용이 더 비중 많았습니다. 그것도 현실에서 보면 짜증나기 그지없는 커플의 다툼이 말이죠. 네번째 단편은 마지막 단편을 위한 중얼중얼이었고, 마지막 단편은 연인을 구하고 세계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거창함에 비해서 밍밍했습니다. 공감도 잘 안 되고요.
적어도 블렉 포레스트 주민이 레드 벨벳으로 가선 안 되는 이유만이라도 제대로 설명됐다면 그렇게 공감이 안 가진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작중 내에서 레드 벨벳은 그냥 ‘부자들 동네’로 설명되는데 왜 블랙 포레스트 주민은 레드 벨벳으로 올라가지 못하는/올라가선 안 되는 건가요? 차별묘사도 안 나오고, 레드 벨벳에 블랙 포레스트 주민의 칩에만 작용하는 방해자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괜히 장편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재미없었냐고 물으면 아니지만 만족했냐고 물으면 아닙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