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리뷰함에 있어 작가님의 설명을 훔쳐보는 것은 반칙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게시판의 글을 못 본척 하며 썼습니다.
사실 타임리프 공모전에 출품하신 작품이라 하셔서, 리뷰를 쓰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전문 심사위원 분들의 평가가 한달 안에 나올텐데 이 리뷰의 내용과 평가 내용이 전혀 다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도 있고, 저도 공모전에 글을 냈다 보니 (제 글도 졸작인 주제에) 타 출품작을 지적했다가는 자칫 오해를 살 것 같아서요… 하지만 어차피 사람마다 보는 시선은 다를 수 있고, 작품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독자라는 자기최면을 여러차례 한 끝에, 드디어 리뷰를 쓸 수 있었습니다. 이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쓰여졌음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작품은 좋아하는 여자를 떠나보내지 못해 타임리프를 반복하는 남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굉장히 정적입니다. 얼마나 정적이냐 하면, 캐릭터들에 의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맛은 (기승전결의 단계를 거치며 성숙되는, 서사로 얻는 재미 말입니다)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적입니다. 대신 이 작품은 그 정적인 캐릭터들과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애절한 느낌을 매력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죽음과 타임리프를 다룬 다른 작품인 ‘안녕, 아킬레우스’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지는데, 아킬레우스에서는
사람 간의 욕망과 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핏빛 난장판이 펼쳐지는 반면,
두 남녀가 대놓고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옛 시절,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다룬 이런 애틋한 로맨스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역사가 있습니다. ‘그여자네 집‘의 만득이와 곱단이의 사랑 이야기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특히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의 경우, 순진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어머니와 손님의 애틋한 사이를 그려서 그 효과를 극대화시켰지요. 여기서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여주인공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서술함으로써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춘남녀의 사랑이 자유로워진 현대를 배경으로 할 경우, 이러한 분위기가 예전만큼의 큰 감동을 주지는 못하는 느낌입니다. 취향의 문제이긴 한데요…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사회 분위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소극적인 성격이라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답답했습니다. 물론 엄밀히 이야기하면 이 작품의 경우 두 사람을 가로막는 것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사랑을 불태웠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생각하면, 이 커플이 단 하루도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분명 성격의 영향이 큽니다.
사실 이 작품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히로미는 자신이 그날 밤 죽는줄 모르고, 겨울이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 봤자 시간을 돌리면 결국 아무 성과도 없는 아침으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이 히로미임을 우회적으로 고백해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쳇바퀴 같은 환경이 사랑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겨울이 그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히로미의 마지막 하루가 크게 달라지는 것 없이 그저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화자를 히로미로 잡은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화자라서 얻은 장점은 그녀의 평범한 일상과 대비되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점 말고는 잘 모르겠어요. 시점 때문에, 겨울이 얼마나 그녀를 살리기 위해 공부하고 고군분투했는지 독자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가 어떤 고뇌 끝에 자살을 시도하는지, 얼마나 힘들어했으며 마지막 히로미의 위안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는 그저 추측만 할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감정이입도 잘 되지 않았어요. (다만 이 부분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긴 합니다. 상상을 통해 더 감정이입을 할 수도 있겠지요. 어린왕자가 상자 속 양 그림을 마음에 들어한 것처럼요) 더욱이, 겨울이 암 치료법을 공부했다곤 하지만 히로미에게 실제로 치료라고 할 만한 뭔가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중간에 생략된 하루 중에 병원을 데리고 간다던가 했다면 모르겠지만, 작품에서 보여준 바대로라면 그냥 혼자서 꼼지락거리다가 갑자기 포기하고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전 개인적으로는, 히로미의 시선은 프롤로그로만 보여주고 이후의 이야기는 겨울의 이야기로 채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결말 부분은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오히려 신선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면서 타임리프에서 벗어나거나 하는 뻔한 결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답답한 건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 데자뷰를 암시하는 서술이 있지만 큰 영향은 끼치지 못할 것 같아요. 어쨌든 히로미는 5월 13일 오전 1시에 병으로 죽을 테니까요. 결국 겨울은 영원히 제대로 된 고백은 못할테고, 언젠가 그가 자살에 성공하는 순간 무한한 타임리프는 끝나버리고 히로미는 안식을 찾겠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과감하고 신선하긴 했지만 결말 자체는 심혈을 기울여 짜낸 느낌은 없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이 ‘심계항진‘인 이유를 리뷰를 쓰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의 병명이라기엔 그녀가 가슴이 과하게 두근거리는 걸 느끼는 식의 묘사가 없었으니까요. 혹시 주인공의 죽음에 겨울이 심계항진을 느끼는 건가요? 그랬다면 히로미가 겨울을 안았을 때 심장박동을 느꼈을텐데, 그런 묘사도 없었어요. 결국 그다지 작품 전체와 잘 얽혀있는 제목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심우주 세계로 항속 전진하는 (?)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오 SF인가?! 하면서 읽게 되었거든요. 심계항진의 뜻은 나중에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평범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제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슬슬 후회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네요. 이런 잔잔하고 시적인 작품은 그 격에 맞는 감성을 가진 분이 리뷰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리뷰 업로드 직전에 추가합니다.
사실 심장은 전부터 뛰고 있었지만 환자가 심계항진으로 심장이 뛰는 사실을 느끼는 것처럼, 마지막에 히로미가 반복되는 타임루프를 눈치채는 건가요? 아 아닌가요? 그럼 괜히 스포일러로 가렸네요 하하 부끄러워라 (아무말)
마지막으로, 히로미가 겨울의 간접 고백을 깨닫는 순간의 문장에 대해 감히 한 마디를 남기며 리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히로미는 느닷없이 머리가 새하얗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하는 것이지, 수동형으로 쓰니 어색합니다. 머리가 새하얘진 건 생각이라기보단 기분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아, 내 머리가 새하얗게 된 것 같아’하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문장에서 ‘~것’은 가급적 피하는 편이 낫다고 하더군요. 앞뒤 문구를 보면 느닷없다는 단어도 조금 느닷없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아래와 같이 써보면 어떨까요.
히로미는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진 기분이었다.
사실 저도 문장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나름 책에서 읽었답시고 리뷰 쓸 때마다 눈에 밟혔던 문장들을 짚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한데 리뷰에는 댓글이 안달리니… (궁시렁)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타임리프와 사랑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좋은 조합인 것 같아요.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진짜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