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시즘(마르크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체주의와는 다른 것 같지만, 다 읽고 나니 이런 제목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사실 하나가 전체인지 전체가 하나인지도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어느 날 내 몸이 빌린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어떨까요? 그것도 문자로요? 어떻게 봐도 피싱처럼 보여 저라면 무시했을 것 같습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사회에서 그래도 이 몸뚱이만큼은 죽을 때까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다행히 문자에 관한 주인공의 생각은 달랐기에 이야기는 무사히 시작됩니다.
사실 이야기는 4년도 전에 시작됐습니다. 나이 든 맑시스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성원으로 더는 살아갈 수 없었고, 자포자기했죠. 그렇지만 죽음은 두려운 찰나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처럼 이념에도 맞고 처지에도 맞는 제안이 딱 내려온 겁니다! 그렇게 부르주아로서 윤택한 생활을 누려 온 주인공에게 다시 이전의 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끔찍할 수밖에 없었겠죠. 예전에 몸을 버렸을 때와 비슷한 제안을 받았는데도 또 덥석 동의하는 건 물론 묘체인 링고의 육체가 너무나도 매력적이기도 하겠지만, 주어지는 대로 받아먹는 삶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도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맑시스트를 표명한 주인공은 결국 클라우드 의식에 융화되어 링고의 윤활유로 쓰입니다. 다른 사람도 저마다의 줏대가 있고 이념이 있었겠지만, 콤프라치코스가 아이를 납치해 기형으로 변형시키듯 몸의 중개자를 자처하는 콤프라꾸에르뽀는 정신마저 변형시킵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는데, 자기 육체로서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감각과 상황 앞에서 누가 여전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I am that i am일 것 같네요.
나로서 존재하고픈 욕구는 꼬리를 향한 질투로 격하되고, 그마저도 실패하자 주인공은 체념하고 맙니다. 개인을 나누는 게 무의미한 링고에서 유일한 공통 기억에 따르면 지극한 개인화의 시대에서 비대해진 자아 하나가 자기가 사랑하는 존재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 같고요. 이제 링고와 다른 묘체는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면서 살 수 있겠지만, 그런 사회가 오래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이게 바로 너무 오냐오냐만 해 주다간 버릇 나빠진다는 게 아닐까요? 소장도 이런 사랑을 받은 걸까요?
여러 사상과 경제체제, 나를 구성하는 것에 관한 질문들이 나왔어도 끝내는 뭘 해도 사랑받는 꼬리 달린 몸이 되고 싶었던 소장의 이야기 같습니다. 이리저리 휩쓸려 도달한 끝이 이런 욕망의 재료로 쓰이는 거라니 허무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링고가 될 사람이 뛸 듯이 기뻐하는 걸 보니 또 그럼 됐다 싶기도 해서 복잡한 기분이었어요….
그렇지만 뭐, 기분이 복잡하면 어떻습니까! 보관료를 못 내면 어차피 사라질 데이터인데요!